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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반 다인이라는 작가는 그가 남긴 12편의 빼어난 장편추리소설로도 유명하지만, 그가 추리작가가 된 에피소드로도 유명하다. 아시다시피 반 다인은 미술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건강을 해쳐서 병원에 입원해있는 도중에 2000권의 추리소설을 읽고 '나도 한번 써보자'라고 작심으로 추리소설을 쓰게 되었다.

그는 '아무리 재능이 있는 작가라도 6편 이상의 추리물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을 했지만 이 말과는 달리 평생동안 12편의 장편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후기에 발표한 6편의 작품은 초기의 6편보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12작품은 모두 'The xxxxxx Murder Case' 라는 형식의 제목을 갖는다. 여기서 'xxxxxx'는 한편만 제외하고 모두 알파벳 6자로 구성되어 있다. 12편의 장편이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니다. 수십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던 아가사 크리스티나 존 딕슨 카아에 비교하면 반 다인은 결코 다작(多作)형의 작가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적은 수의 작품에도 불구하고 반 다인은 고전추리소설을 거론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하는 작가로 취급된다. 그 이유는 그가 만들어낸 탐정 파일로 반스와 '심리분석추리'라고 하는 독창적인 추리방법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파일로 반스는 친척으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30대의 독신으로 고전 미술품을 수집하고 감상하며 소일하는 젊은이다. 180cm가 넘는 장신에 미남이자 고급 옷차림의 멋쟁이기도 하다. 체스, 포커의 고수이고 고대문명과 도자기를 포함한 고전미술에 대해 해박한 식견을 가진 전문가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작품마다 그가 쏟아내는 엄청난 현학적 장광설은 독자들을 압도한다. 군더더기가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파일로 반스는 그의 지식들을 교묘하게 사건의 해결에 연관시킨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친구를 통해서 범죄수사에 참여하게 되고 첫 사건 <벤슨 살인사건>에서부터 그는 독특한 추리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벤슨살인사건>에서 그는 자신의 범죄관을 피력한다. '모든 살인은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기질의 문제야', '현장에서 발견되는 모든 물적증거는 완전히 무시해버려'라는 말들은 그가 범죄를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이후에 진행되는 추리의 방법들을 예견하게 한다. 물적증거를 중시한 홈즈와는 반대되는 연역 추리인 것이다.

또한 그는 '그림을 보면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있듯이 범죄현장을 보면 누가 범행을 행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한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사건의 모든 정황, 범죄의 디테일에서 나타나는 범인의 성향과 심리를 추적해서 범인을 지목하고 검거한다. 파일로 반스는 <벤슨 살인사건>에서 피해자가 평소와 달리 가발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케닐 살인사건>에서는 애완동물을 키울만한 성향이 아닌 인물에 대해서 고심한다.

물론 이런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물적증거를 얻지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심증만으로 추리해 나가다 보면 범인의 정체에 대해서 나름대로 확신을 하면서도 검거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생긴다. <카나리아 살인사건>에서 파일로 반스는 바로 이런 경우에 직면하게 된다. 범인에 대해서 심증을 굳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물적증거가 없자 파일로 반스는 교묘한 심리전을 통해서 범인을 파국으로 몰고간다.

그렇다고 파일로 반스가 오로지 심리분석만을 이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기계적인 트릭을 간파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린 살인사건>에서 권총을 현장에서 없애는 트릭과 벽난로에서 총탄이 발사되는 트릭을 꿰뚫어보고, <케닐 살인사건>에서는 밀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직접 핀과 끈을 가지고 실험을 하기도 한다.

반 다인의 작품들이 고전으로 취급되는 또 한가지 이유는 작가가 가지고 있던 추리소설에 대한 독특한 태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는 '미스테리 소설은 일종의 지적인 게임이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페어플레이로 유지되어야 한다'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반 다인은 '추리소설의 20 규칙'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다. 독자와의 페어플레이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대부분 수긍할만한 규칙이지만 그 안에는 반 다인 스스로 지키지 못했던 규칙도 있으니 흥미롭다.

또한 반 다인은 이런 규칙을 바탕으로 여러 추리물들을 평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놓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는 사실이다. 정당한 방법이었는지 아닌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일테고, 소설을 쓰는데 그런 까다로운 규칙이 적용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도 각자가 생각할 만한 문제일 것이다. 중요한 점은 반 다인이라는 작가가 이런 자세를 가지고 추리소설을 대하고 작품의 창작에 임했다는 점이다.

반 다인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작가이다. 인기가 없다기 보다는 알려지지 않고 지명도가 없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현재 구하기 쉬운 것은 해문에서 출판된 <벤슨 살인사건> 뿐이다.

대부분 추리물들의 상황설정은 작가가 정교하게 만들어낸 '세트 플레이' 같은 면이 많지만, 반 다인의 작품들에서 그가 보여주는 인간 심리의 여러 측면은 감탄할 정도이다. 특히 <벤슨 살인사건>에서 범죄와 인간의 심리에 대한 파일로 반스의 도저한 변론은 꼭 한번쯤 음미해볼 만하다.

덧붙이는 글 | 아래의 목록은 반 다인의 전체 작품과 국내 출판 현황입니다. 반 다인에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The Benson murder case (1926) : 벤슨 살인사건(해문출판사)
 The Canary murder case (1927) : 카나리아 살인사건 (자유추리문고)
 The Greene murder case (1928) : 완전범죄 (풍림 출판사)
 The Bishop murder case (1929) : 승정 살인사건 (동서추리문고)
 The Scarab murder case (1930) : 딱정벌레 살인사건 (자유추리문고)
 The Kennel murder case (1932) : 케닐 살인사건 (자유추리문고)
 The Dragon murder case (1933)
 The Casino murder case (1934)
 The Garden murder case (1935) : 가든 살인사건 (자유추리문고)
 The Kidnap murder case (1936)
 The Gracie Allen murder case (1938)
 The Winter murder case (1939)


벤슨 살인사건

S. S. 반 다인 지음, 김재윤 옮김, 황금가지(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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