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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8시에 출발하여 95번 국도인 서부관광도로를 타고 대정으로 향하였다. 제주경마장과 운전면허시험장을 지나면 다음 출구가 원동교차로이다. 교차로로 내려와 한라산 쪽으로 올라가면 바로 삼거리가 나오는데 왼쪽 작은 길로 10여 미터 가면 예전 원동마을을 알려주는 '원지(院地)'라 새겨진 비석이 나온다. 그 뒤에는 서부관광도로가 나기 전에 까페로 사용한 것 같은 버섯 모양의 집이 있다.

 

 이 마을 출신 재일동포가 세운 조선시대 원(院)이 있었던 마을을 표시하는 표석

 

원동마을은 조선시대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중간 지점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한 마을이다. 16가구 60여명의 주민이 주막 외에 목축과 밭농사를 하였으나 48년 11월 13일, 유격대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토벌대에 의해 어린애와 노약자를 남겨놓고는 행인들을 포함하여 60~80명을 모조리 학살하여 폐허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근처 마을의 이장과 면의원을 지낸 세도가가 이 마을의 생존자가 어린애들 뿐이라는 걸 알고 마을의 토지를 가로채 그 토지를 서울의 투기꾼에게 넘겼다고 한다. 유족 중 일부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소송을 했으나 공소시효로 인해 돌려받지 못했다고 한다. 조상의 땅을 함부로 팔지 않는 제주도에서 1970년 대 이후 외지인에 팔려나간 땅의 대부분이 이와 같이 훔친 땅이라고 한다.

 

널브러진 시신을 돼지가 먹고, 그 돼지는 군인이 먹다

 

광평교차로를 지나 동광으로 들어갔다. 동광육거리에서 왼쪽에 있는 주유소를 끼고 올라가니 잠시 후 오른쪽에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을 알려주는 표석이 서 있다. 무등이왓은  130 가구가 모여 살던 동네로 땅이 척박하였다. 47년 여름 미군정의 경작 면적만을 기준으로 삼는 잘못된 획일적인 수곡정책으로 인한 공출문제로 47년 8월 군청 직원이 청년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했다.

 

경찰이 이를 강하게 탄압하자 청년들이 입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48년 11월 마을 소개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유 없이 마을 유지 10여 명이 학살당하는 등 100명 이상 학살되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48년 12월 12일 잠복한 토벌대가 시신을 수습하러 온 사람을 붙잡아 산 채로 화장시킨 '잠복학살사건'이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자 널브러진 시신을 돼지가 먹고, 그 돼지는 군인의 먹이가 되었다.

 

120여명의 무등이왓 사람들의 은신처였던 동광 큰넓궤는 찾기 힘들어 포기하였다. '궤'는 자연동굴을 의미하는 제주말로 큰넓궤는 4·3 사건 때 마을사람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다. 이 굴에 은신한 무등이왓 주민들이 발각되어 49년 1월 대부분 체포되어 학살되었다.

 

시신은 없고 희생자가 입었던 옷가지 등을 묻은 동광헛묘

 

동광육거리에서 창천으로 가는 길과 대정으로 가는 길 사이 밭에 4·3 유적지 표시가 보였다. 하지만 가는 길이 온통 자라난 작물로 채워져 있어 가까이 가기 힘들었다. 4·3 희생자 중에는 온전한 시신을 남긴 경우가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신 수습조차 하지 못하게 군인들이 막아 그대로 방치되어 훼손된 경우가 많았다. 서귀포 정방폭포 소남머리에서 학살된 시신을 1년 뒤에 찾으러 갔으나 조그만 구덩이에 뼈들만 엉켜 있어 구분이 불가능하여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봉분에 시신은 없고 희생자가 입었던 옷가지 등을 묻은 9명의 묘가 바로 이 동광헛묘이다.

 

살아남은 수백 명 한국전쟁이 나자 또 다시 학살하다

 

서부관광도로를 따라 계속해서 대정으로 향하였다. 모슬포에 가까이 오자 '섯알오름 학살터'와 '백조일손지묘'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섯알오름 학살터로 가는 길가 밭에는 온통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비행기 격납고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움푹 파여 있는 이 학살터는 4·3 항쟁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무고한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곳이다.

 

1950년 8월 20일 보도연맹사건이라 불리는 예비검속에서 정부로부터 인원수가 할당되어 한림과 대정 지역에서 끌고 온 254명을 학살했다. 공산군이 들어오지도 않은 제주도에서 단지 공산군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으로 모두 죽인 것이다. 군에서 시신 수습을 금지하여 56년 5월에서야 시신을 수습하였으나 시신을 구별하기 어려워 정상적인 무덤 조성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백조일손지묘'이다.

 

 섯알오름 학살터, 당시를 생각해 보며 걷도록 둘레에 산책길이 나 있다.

 

백여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 묻힌 무덤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되돌아 나와 '백조일손지묘(白祖一孫之墓)' 이정표를 따라 찾아갔다. '백조일손지묘'는 '조상이 다른 백여 할아버지가 한낱 한시에 죽어 뼈가 엉키었으니 그 자손은 하나다'라는 기막히고 기구한 이름의 무덤이다. 학살된 후 6년이 지나서야 시신을 수습했으니 누구의 시신인지 구별할 수 없어 조상은 다르더라도 같은 시각에 죽은 사람들은 모두 한 자손이라는 생각에서 묘를 함께 쓴 것이다.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시신들의 신원이 정확하다고 판단된 경우를 제외한 132기의 무덤으로 되어있다. 

 

 백조일손지묘, 뒤에 산방산이 보인다

 

1956년 유족들이 부지를 공동 구매해 유해를 안장한 후 '백조일손지지(白祖一孫之地')라 이름하고 다음해에 총살된 원혼들의 이름을 빼곡히 적어 넣은 2m의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4·19 때 도주했던 경찰들이 5·16 군사쿠데타 이후 복직되면서 망치로 비석을 부쉈다고 한다. 군 수뇌부가 사실상 학살의 주역인 쿠데타 군사정부는 공동묘역 해체명령을 내려 묘역까지 없애면서 그들의 범죄행위를 은폐하려 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깨진 비석이나마 잘 보존해 1999년 깨진 비석을 다시 묘역의 중앙에 전시하였다. 

 

 “5·16 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白祖一孫之地’ 묘비의 파편”이라고 적혀 있다.

 

사병들 실습용으로 양민들을 학살하다

 

12번 국도를 따라 서귀포로 향하였다.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잘 되어 있어 자전거 타는 데 불안함이 거의 없는 것이 제주도 자전거여행의 큰 장점이다. 서귀포에 있는 정방폭포 소남머리에 도착하였다. 정방폭포는 그 아래에 있고 소남머리는 그 위에 해당한다. 이곳은 4·3 때 최대 학살터로 물줄기가 떨어지는 기암절벽과 부근 소남머리가 그 현장이다. 1948년 11월 24일 이후 여섯 차례 이상 대학살이 자행되고 살인 경험이 없는 사병들 실습용으로 양민들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49년 1월 22일 무등이왓 사람 한 살부터 70대 노인까지 86명이 학살된 곳이다.

 

정방폭포 안내소에 들리니 마침 안내자가 5·16 도로는 박정희가 죄수를 동원하여 길을 만들었다며 설명한다. 5·16 군사정권에 의해 4·3 항쟁이 유린되었음에도 성판악을 가로 질러 가는 11번 국도를 5·16 군사쿠데타를 기념하는 516 도로라고 이름하여 굳이 이를 기념할 것은 무엇인가?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다음 날 일정을 생각하여 남원까지 갔다. 오늘은 105km를 주행하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쓰면서 이영권의 <제주역사기행>을 참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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