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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안의 명물 교자. 제갈량이 산 재물을 바치는 악습을 철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 조수영
여행 2일(2006년 8월 4일). 점심은 서안의 명물 교자를 먹기로 했다. 우리가 보통 만두라 부르는 속이 들어간 쌈을 중국에서는 교자라 부른다. 정작 중국에서의 만두는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밀가루떡을 말한다.

만두의 유래에 대한 여러 설이 있는데 제갈량이 '칠종칠금'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남만정벌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심한 풍랑을 만난 제갈량은 사람의 머리 49개를 바다의 신에게 제물로 바쳐 한다는 말을 듣고, 대신 밀가루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바다에 띄우고 제사를 지냈더니 풍랑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산 재물을 바치는 악습을 철폐하기 위해 제갈량이 고안한 것이 만두라는 이야기다. 그럼 그때 제갈량은 만두를 사람 머리 크기로 만들었을까? 머리만한 만두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이 양식장의 부이 같았을 것 같다.

호두만두, 개구리만두 등 갖가지 교자가 20가지 나왔다. 한 번 나올 때 한 개 씩만 먹었는데도 배가 부르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서태후 물만두'이다. 크기가 워낙 작아 '진주만두'라고도 불린다. 서태후가 8국 연합군에 쫓겨 서안에 피난 왔을 때 입맛을 돋우기 위해 만들어 먹었던 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태후 만두는 연꽃 국에 넣고 끓여 먹는다. 국자로 물과 함께 떠서 먹는데 교자가 한 개 들어 있으면 운이 좋고, 두 개가 들어있으면 쌍복이 들어오고, 세 개는 발전을 하고, 네 개는 사계절 내내 운이 좋고… 7개는 북두칠성이 돌보고… 하나도 없으면 무병장수한단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

중국 사람들은 요리로 만들어 먹지 않는 것이 없다. 산동의 곰 발바닥 요리, 장강의 상어지느러미 요리, 중경의 모기 눈알 요리, 원숭이 골 요리는 중국의 4대 희귀 요리에 속한다.

원숭이 골 요리의 경우 동물협회에서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고, 국가 차원에서도 자제를 요청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기다. 오죽하면 "중국인들은 하늘에 날아다니는 것 중에서는 비행기, 땅에 붙어 달리는 것 중에서는 자동차, 바다에 있는 것 중에서는 잠수함 외에는 다 먹는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아직도 밝히지 못한 진시황릉의 비밀

▲ 아직도 내부가 발굴되지 않은 진시황릉. 지금은 하나의 야산으로 보일 뿐이다.
ⓒ 조수영
화청지에서 8km 정도 여산의 북쪽으로 가면 진시황릉이 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 진시황이 이곳에 묻혀 있다. 진시황이 즉위하면서 착공에 들어가 50㎢에 달하는 부지와 각종 부장품을 마련하고, 70만 명이 동원되어 37년간 공사하였다. 현존 최대라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동원된 인부 20만 명과 비교하면 가히 대단하다.

당시에는 이곳에서 병마용에 이르는 넓은 구간이 화려한 궁전으로 둘러싸여 있었다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석류나무로 덮인 야산의 모습이다. 2200년 전 황릉을 처음 쌓았을 당시의 높이는 지상 200m이었다 하나 지금은 76m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동서로 485m, 남북으로 515m의 크기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은 즉위하자마자 여산에 치산 공사를 벌였다. 지하수를 세 번 지날 만큼 땅을 깊이 파고 녹인 구리를 부어 동판을 깔고 그 위에 안치되었다. 능 안에는 궁전과 누각을 세웠고, 천장에는 하늘의 별과 달의 천문도를 보석으로 장식했으며 아래에는 중국의 산하를 재현하였다. 장인들로 하여금 자동으로 발사되는 기계장치가 된 쇠뇌를 만들게 하여,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발사되도록 했다. 진시황의 지하궁은 기계를 이용해 수은이 흐르게 하여 온갖 하천과 강, 바다를 만들고, 인어기름(도롱뇽 기름으로 추정하고 있다)으로 초를 만들어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했다"고 전하고 있다.

▲ 황릉 아래에는 진나라 병사들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 조수영
후에 항우가 이곳을 파괴했을 때 30만 명을 동원하여 30일 동안 그 보물들을 날랐다고 하니 그 호화로움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진시황은 무덤의 비밀이 밝혀질 것을 우려해서 매장 직후 능 안의 모든 문을 잠가서 매장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생죽음을 당하도록 했다. 학자들은 실제 무덤 주변의 수은 함량치가 다른 곳보다 월등히 높게 탐지되는 것으로 보아 책 내용의 대부분이 사실일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진시황릉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지만 무덤의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다. 봉분 앞 화단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계단을 따라 정상에 올라갈 수 있을 뿐이다. 이곳의 유물은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갈 때 모두 가지고 가버렸고, 아직 내부는 발굴되지 않아 보여줄 것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인류의 8대 불가사의, 병마용갱

▲ 왕릉 정상에서 내려본 모습. 왕릉으로 오르는 길은 비교적 완만한 계단으로 되어있다.
ⓒ 조수영
덥고 습한 서안의 더위를 꾸욱 참고 정상에 올랐다. 서쪽에는 진·한·당나라 황제들의 무덤이 있고, 남쪽으론 위수가 흐르고, 북쪽에는 여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얼핏 보아도 명당 중의 명당이다. 저 멀리 병마용 박물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 옛날 저곳까지 화려한 궁전으로 꾸며져 있었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정상에는 조그마한 기념품점과 진시황에 대한 약간의 기록과 유일하게 왕비와 합장하지 않은 황릉이라는 설명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시황제가 스무 명이 넘는 자녀를 두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의 황후와 후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아마도 아무도 믿지 못하는 그의 괴팍한 성격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실제 중국은 진시황릉의 아래에 숨겨져 있는 지하궁전을 일부러 발굴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한 번 손대기 시작하면 너무나 엄청난 작업이고, 그 엄청난 작업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고도의 발굴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발굴권을 넘겨줄 수 없다는 중국의 자존심 때문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기껏해야 부장품인 병마용갱은 인류의 8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불리고 있다. 정작 진시황릉 안의 모습이 드러난다면 인류는 또 다른 불가사의한 유산을 갖게 될 것이다. 그날을 기약하며 병마용 박물관으로 향한다.

▲ 왼쪽이 진시황릉과 궁궐이 있었던 터. 2km떨어진 곳에 병마용 박물관이 있다. 세계적인 병마용 박물관도 진시황릉의 부장품일 뿐이다.(직접 그림)
ⓒ 조수영

진시황제, 그는 누구인가?

정(政, 미래의 시황제)은 기원전 259년, 전쟁의 시대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전국시대는 강력한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어 거의 언제나 전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의 부친은 전국칠웅 가운데 하나인 진나라의 장양왕이었고, 모친인 조희는 장양왕을 후원한 부유한 상인인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이었다. 후에 일부 역사가들은 시황제가 실제로는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그의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면은 초기 진나라 군주들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전부터 쓰던 제왕이라는 호칭대신 우주만물을 주관하는 신이라는 의미인 황제(皇帝)에, 최초(始)라는 뜻을 붙여 시황제라 부르기로 했다. 이 후 황제의 이름은 이세황제이다.

진은 원래 서쪽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으나 차츰 국력을 길러 여러 나라를 차례로 정복하였다. 이 후 강력한 통일 정책을 펴 여러 지역을 하나의 중국으로 만들어 갔다(기원전 221년). 중국의 영어 표기인 차이나(China)도 진(Chin)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니 진나라가 중국역사에 미친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자신의 영역을 다스리던 제후들이 세력을 잃고, 각 지방은 황제가 임명한 관리들이 다스리게 되었다.

또 지방마다 달랐던 화폐와 문자, 도량형을 통일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 이후에도 북방의 유목민족의 세력이 부담스러웠던 시황제는 이들을 막기 위해 전국시대에 여러 나라들이 만들었던 성들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지금은 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있지만, 이는 당시 진나라 사람들이 10여 년간 30만 명 이상 동원되는 힘든 고통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시황제를 폭군적 이미지로 굳히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분서갱유로 일컬어지는 사상 통일책이었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서적들이 금서로 취급되어 수거되고 소각된 <분서(焚書)사건>이 일어났고, 이듬해에는 이에 비판적인 유생 460여 명이 생매장 당하는 이른바 <갱유(坑儒)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독재적 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최초의 선례로, 세계적 언론탄압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러 2차 순찰에 나섰다가 천하를 통일한 지 11년 뒤인 49세에 죽었다고 한다. 이 후 진나라는 급격한 통일정책과 가혹한 강압정치와 만리장성, 아방궁과 같은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의 큰 발발을 불러 일으켜 멸망하게 된다.

중국을 통일한 지 겨우 15년 만의 일이었다. / 조수영

덧붙이는 글 | 1)칠종칠금(七縱七擒)-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준다는 뜻으로, 상대를 마음대로 다룸을 비유하거나 인내를 가지고 상대가 숙여 들어오기를 기다린다는 말.   

2)남방-지금의 북부 베트남 지역

3) 모기눈알요리 만드는 법- 박쥐 중에는 모기를 주식으로 하는 종류가 있다. 그러나 모기 눈알만은 소화시키지 못하고 배변 때 배설한다.  주방장들은 동굴로 가서 박쥐의 배설물을 모아 물로 걸러내 눈알만 채집한다. 과정은 별로 위생적이지 않지만 완성된 요리는 최상의 진미로 부르는 것이 값이 된다. 

4)시황제의 도량형-홉(0.33㎡, 180㎖)이라는 표준 용기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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