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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열전-여성,세상을 열다>
ⓒ 아세아문화사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를 통하여 만난 한국여성들의 인권유린은 뜻밖이었고 충격이었다. 난 왜 이제껏 여성을 억압하는 관습으로 '칠거지악'이나 '씨받이'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을까?

부여에는 어떤 이유가 됐든 질투하는 아내를 숫제 죽여버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시체를 산에 아무렇게나 버려 들짐승 밥으로 주기도 했다고. 그래도 항의 한마디 할 수 없는 친정, 아니 항의는커녕 시체라도 돌려받으려면 딸을 죽인 신랑에게 마소(가축)라도 바쳐야만 가능했단다.

그런가 하면 고려 중엽에는 사대부들 사이에 남의 아내나 첩을 강탈하거나 훔쳐서 자기 것으로 점유해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결혼도감', '과부처녀', '추고별감'이란 관제나 직제를 만들어 강제로 모집한 제 민족의 여자들을 원나라 등에 공녀로 바치기도 했던 이 파렴치한들 중에는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뻔뻔스런 인사까지 나올 정도였단다.

가두어 기르는 가축, 일종의 동산(動産)이었던 한국 여성들

'칠거지악'으로 여인들을 집안에 묶어 두고 열녀를 생산하였던 나라. 남아선호사상이 빚어낸 '씨받이'의 나라 조선은 어땠을까?

조선에는 객첩(客妾)과 헌첩(獻妾)이 있었고 약탈혼과 보쌈이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임진왜란 직후 적들에게 짓밟힌 아내의 정조가 치욕스러워 이혼하기를 당당하게 요청하는 뻔뻔스런 남자들이 줄을 이었다나!

@BRI@객첩, 헌첩은 무엇인가. 객첩(客妾)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뜻으로 자신의 아내나 첩, 혹은 딸을 제공하던 풍습이다. 헌첩(獻妾)은 자신의 출세나 영달을 위하여, 또는 자신의 허물을 무마하려고 제 아내나 딸을 바치는 풍습. 어느 정도였느냐면, 지방의 양반자제가 장원급제를 하고 귀향하는 길에 상납받는 여성들은 10여 명은 보통이었다나!

물론 이렇게 상납받은 여인을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더더욱 없는 그저 1회용일 뿐.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낯선 남자에게 바쳐진 여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자신들의 무능함으로 지켜내지 못한 것을 반성하기는커녕 전쟁 중에 짓밟힌 아내나 딸에게 이혼과 자결을 강요하는 사회이고 보면 이후 여인들의 삶은 뻔하다.

남해안 낙도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외도를 권하는 풍습이 제법 성행하고 있었다. '물질'이나 '길쌈'으로 돈이 모이면 통영 혹은 여수나 부산 같은 곳으로 남편을 원정케 해서 주색으로 호색으로 호강시켰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절할 일은 남편이 되도록 먼 곳에서 오래 놀다 와야만 그녀들의 체면이 섰다던가? 이 자랑 하나를 위해 그녀들은 밤낮없는 노동으로 손발이 거칠게 되었다. 이렇게 거꾸로 뒤집힌 윤리의식은 아내들이 인격도 없는 가축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책 230P '여성, 가두어 기르는 가축')

참으로 웃기는 일인데 엄연하게 있었던 풍습이요, 심지어는 남편의 폐병에는 아내의 심장이나 간이 좋다는 미신 때문에 자살을 강요당한 여인들도 비일비재했단다. 그야말로 당시 여성들은 '가두어 기르는 가축 같은 존재', '남자의 소유물, 즉 동산(動産)의 일종으로 취급될 뿐'이었다. 물물교환 되듯 팔리는 여인들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책을 통하여 만나는 한국여성인권유린의 실례는 끝도 없다. 이런 사례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쌀 한 말, 혹은 보리 한 가마에 팔려가기도 했던 딸들의 이야기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하게 할 만큼 어이없고 충격적이었다.

1920년대 억압받고 유린당한 여성들의 목숨을 건 선택을 보자.

...자유와 평등, 인격에 눈을 뜬 부작용이겠지만 이혼은 1920년대 말에서 근래에까지도 사회에서 하나의 변괴로 인식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이혼을 못하는 여자들은 또 하나의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은 남편 음식에 양잿물을 섞는 독살사건이다. 1930년대 서대문에 수감된 살인범은 남자 53명에 대해서 여자 47명으로 여자가 약 90퍼센트인데, 그중 66퍼센트가 본부(本夫) 살해범이었다.

세계적으로도 남녀 살인범의 비율을 보면 남자 100명에 대해서 여자가 4명이다. 이를 보면 한국에 여자 살인범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더욱이 본부 독살은 1920년대 한국 특유의 범죄였다. 가히 한국의 범죄 특산물이라고 할 정도로 본부 독살이 많았다. (본문에서)


부끄럽지만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하루가 멀다 않고 신문에 올라오는 기사들은 이혼과 이와 같은 본부 살인. 저자는 당시의 신문기사와 사례 등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구한말에서 1930년대까지 이 땅의 여성들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속도감 있게 들려준다.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이 남긴 한국 여성사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로 만나는 '한국 여성 가혹사'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정도였다. 부모들의 사사로운 잇속으로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되어 과부가 되어 평생 수절해야만 했던 지난날 한국 여인들의 한을 내 어찌 이해하랴.

70년 전 남편을 독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평등과 인권(성)을 주장해왔지만 황혼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여전한 현실이고,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남편을 살인하는 일까지 최근의 일인지라 같은 여자로서 책을 읽는 동안의 비통함과 무거운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책에는 가부장제의 굴레와 일제의 가혹한 통치 아래 자신의 삶을 찾으려던 신여성들의 도전과 좌절(1부),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매매춘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이에 맞춰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기생들과 새로 등장하는 일본 게이샤들의 요지경 세태(2부), 여염집 부녀들의 애환과 애정 풍속 등등, 다채로운 여성사(3, 4부) 관련 글들이 풍성하게 실려 있다.

윤심덕, 김일엽, 박경원, 나혜석, 배정자 등 비교적 많이 알려진, 한국 근대 신여성들의 격정적인 일대기를 시대 흐름 따라 읽는 맛도 좋았다. 이들뿐이랴. 질곡의 구한말 천주교에 대한 믿음으로 순교의 꽃을 피운 김마리아나 또 다른 여인들 이야기나 무명의 수많은 여인들의 다양한 일화도 재미있다. 성종(조선)의 처녀 재판이나 구한말 기녀들의 이야기도 파란만장하고 재미있는, 한국여성사였다.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는 <임종국선집> 중 7권. 친일문제연구에 전념을 다하던 중 폐기종으로 타계한(1989년) 임종국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들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고인이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정리한 것이다.

3, 4권에 해당하는 <한국인의 생활과 풍속>(1995년 상, 하)이 나온 지 꼭 10년만이다. 앞서 5, 6권 <여심이 회오리치면>(상, 하)가 2006년 1월에 출간되었다. 여러모로 의미와 가치가 남다른 책이다.

"임종국선생의 원고들을 선집으로 편찬하면서 새삼 선생의 시대를 앞서간 문제의식과 연구 성과, 그리고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친일문제에 관한 선생의 연구 업적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 분야 연구에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친일청산을 향한 선생의 외로운 개척자의 길은 이제 역사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어디 그뿐이랴! 2,30년 전만 해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사회사나 여성사에 대해서도 선생은 대중적 서술 형태를 빌어 기초를 닦아 놓았다. - 임종국선집을 출간하면서,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소장)

덧붙이는 글 |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임종국선집7)-민족문제연구소/아세아 문화사/2006년 10월 30일/1만4000원

▲제1권:친일, 그 과거와 현재(1994)▲제2권:또 망국을 할 것인가(1995.2)▲제3권:한국인의 생활과 풍속(상)(1995.11)▲제4권:한국인의 생활과 풍속(하)(1995.11)▲제5권:여심이 회오리치면(상)(2006.1)▲제6권:여심이 회오리치면(하)(2006.1)▲제7권:여인열전-여성,세상을 열다(2006.10)▲제8권:빼앗긴 시절의 이야기(근간)


女人列傳 - 여성, 세상을 알다

임종국 지음, 아세아문화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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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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