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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의 입양을 문서화한 '예조입안'문서
ⓒ 정윤섭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고려 시대의 가족제도 형태를 이어받아 남녀가 똑같이 재산을 나누는 ‘균분상속제’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제도는 16세기 후반 이후 18세기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현상 중에서 16세기 초 이래로 입양 사례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양제도가 나타난 것은 남녀 균분산속이 무너지고 장자상속으로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이같은 양자제도는 18세기 중반 이후 양반사대부 집단 내에 성리학을 기본으로 한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로 정착되어 일반적인 흐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장자상속과 입양사례를 가장 실감나게 엿볼 수 있는 것이 녹우당 해남윤씨가다. 녹우당에 가면 해남윤씨가에서 전해 내려온 많은 고문서들을 만날 수 있는데 고문서들 중에서 가족제도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고산의 입양사례를 증명하는 ‘예조입안((禮曹立案)’문서다.

고산의 결혼과 입양

이 문서는 조선시대 가족제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예조입안은 만력(萬曆) 30년(선조 35년, 1602) 6월 초 2일에 윤유심(尹唯深)의 둘째아들인 선도를 윤유심의 형인 유기(唯幾)에게 양자로 들일 것을 예조(禮曹)에서 허가한 결재문서다.

이곳에는 양쪽 집안의 동의서와 동성 및 이성(異姓)권의 보증서를 확인하고 <경국대전> <입후(立後)>의 규정에 의하여 이를 허가하여 달라는 청원서에 대하여, 이를 결재한 좌랑, 정랑, 참의, 참판, 판서의 수결(지금의 서명)이 찍혀있다.

@BRI@그 당시 양자로 입양한 사실을 문서로 결재한 것을 보면 입양이 임의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 문서는 장자의 혈통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직계혈통에 대한 시비와 재산권 상속에 있어서 중요한 증명이 되는 것이다.

해남윤씨가는 유독 입양을 통해 대를 이은 경우가 많은데 이는 고산의 부(父)인 윤유기(1554~1619)에서부터 시작된다. 입양은 해남윤씨가의 독특한 가풍으로 이어지는데, 장자(적자)가 없어 대를 잇지 못할 경우 가통을 이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해남윤씨가에서는 일찍부터 이러한 입양을 통해 대를 잇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조선중기까지도 균등분배로 재산을 상속하였던 타 집안과는 달리 일찍부터 장자 상속제를 받아들여 재산이 흩어지지 않고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녹우당은 종손이 없을 경우 입양을 통해 대를 이어가는데 어초은 윤효정 이래 12대 윤광호에 이르기 까지만 종손으로 4명이 입양되어 종통을 잇는다. 윤유기는 윤구의 둘째 아들인 윤의중의 둘째 아들로 그는 큰 아버지 윤홍중에 입양된다. 그리고 윤유기는 다시 아들이 없자 동생인 윤유심의 셋째아들인 선도를 입양한다.

이후 입양은 계속 이어지는데 해남윤씨가에서 종통이 거의 끊어질 뻔한 것을 아주 힘겹게 이어간 때가 있었다. 어초은 윤효정의 14대 손인 윤광호(光浩 1805~1822)때다.

이 무렵 12대손은 지정(持貞)으로 부인 남양홍씨가 후사가 없이 22세에 별세하고 그도 26세에 요사해 버린다. 이에 13대손인 종경(鍾慶)이 입양되었으나 그도 장수를 하지 못한다. 또한 양천허씨에게 겨우 얻었던 독자 광호가 18세에 병사하고 만다.

광호는 신행길에서 돌아와 신부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죽고 마는데 광호와 결혼한 광주이씨는 종가에 와서 숙부(일가친천)들의 섭정(압력)속에서도 험난한 생활을 이겨내며 충청도에서까지 십촌이 넘은 조카를 입양 하여 대를 잇게 한다. 이로 인해 광주이씨는 나중에 집안을 일으킨 종부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그의 고난스런 시집살이 내용을 ‘마당과부의 원정(原情)’이라 할 수 있는 ‘규한록(閨恨錄)’ 한글수필로 남기기도 하였다.

입양은 종가에 있어서는 특히 한 집안의 대를 이어가게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초 어초은 윤효정 뿐만 아니라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 등 유력한 인물들을 키워낸 해남정씨가 대를 잇지 못하고 재지사족의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을 보면 이 입양제도의 극명한 대비를 살펴 볼 수 있다.

▲ 문중을 일으킨 광주이씨 종부의 한스런 시집살이가 담긴 '규한록'
ⓒ 정윤섭
결혼도 당파 따라

고산 윤선도는 8살 되던 해에 큰아버지에게 입양된다. 그리고 17세에 남원윤씨와 결혼한다. 대대로 해남윤씨가 인물들은 처복(?)이 좋았는데 남원윤씨 집안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어 대단한 집안은 아니었던 듯하다. 고산은 85세로 장수하였던 만큼 여러명의 부인을 거느리기도 하였는데 정부인인 남원윤씨를 비롯하여 한양조씨 그리고 경주설씨를 두기도 하였다.

경주설씨는 고산이 진도에 머무를 때 얻은 부인으로 고산은 이곳에서 간척사업을 하였는데 이곳 토착민의 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설씨는 고산이 보길도에서 생활할 때 함께 지냈다고 하며 그곳의 후손들이 경주설씨와의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산은 경주설씨와의 사이에 난 아들 중에 학관을 매우 사랑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서얼이 차별받는 신분사회였지만 고산은 무조건 서얼을 차별하려 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산은 보길도에서 임종시에 학관이 시종토록 하였다고 한다. 고산은 첩의 자식도 사랑함에는 다를 바 없었다고 하지만 선조의 유업은 서손에게 함부로 나누어 주지 않았다고 하여 신분사회의 한계는 완전히 벗어날 순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인연 때문인지 학관의 무덤은 고산의 무덤이 있는 금쇄동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잠들어 있다.

고산은 남원윤씨로부터 3남2녀, 한양조씨로부터 1남1녀, 경주설씨로부터 1남2녀를 얻는다. 고산이 85세로 장수하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는데 재지사족으로서 권세를 누렸던 당시 양반신분사회의 한 모습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당시 양반 사대부가들은 서로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꾀하거나 주로 같은 당파와의 통혼 관계를 맺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당시 사화와 붕당정치 시대에 결혼이 서로의 결속을 다져가는 수단으로도 이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고산이 진도에 머무를때 바다를 막아 간척했다는 굴포리 일대
ⓒ 정윤섭
당시 결혼에서 배우자의 선택이란 어려운 일이었다. 고산의 첫째 아들인 인미(仁美)의 장인은 감사(監司)를 지낸 전주유씨 유항(柳恒, 1574~1647)이며, 조부인 영길(永吉)또한 별시장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혁혁한 가문 출신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항의 숙부인 유영길의 동생이 소북파(小北派)의 영수인 유영경(柳永慶, 1550~1608)이었던 까닭에 당파에 연루되어 광해군 이후에는 많은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녹우당 해남윤씨가는 국부(國副)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재산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그 재산이 소멸되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입양을 통한 종통의 계승과 장자상속이라는 일관된 제도적 장치가 잘 마련되었기 때문이라고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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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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