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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의 옹호자들은 "김성수는 일제치하에서 경성방직이라는 민족자본을 세운 민족자본가"라며 그를 민족주의자로 평가한다. 그가 경성방직을 설립한 것은 사실이지만, 경성방직이 과연 민족자본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우리 사회는 경성방직=민족자본이라는 명제를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김성수와 그의 기업활동을 숭상하게 된 것은 일부 지식인들이 그를 미화하는 작업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1991년 동아일보사 발행 <평전 인촌 김성수-조국과 겨레에 바친 일생>이라는 책에 실린 황명수의 '인촌 김성수의 기업활동과 경영이념'이라는 소논문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1933년 태생인 황명수는 일본 메이지대학 출신으로 단국대 학장, 한일경상학회 회장 등을 거쳐 지금은 일본 문리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학자다.

김성수 옹호자들 "경성방직은 순수 민족자본"

▲ <평전 인촌 김성수> 283쪽. 경성방직을 민족자본이라고 설명했다.
ⓒ <평전 인촌 김성수>
황명수 교수 <평전 인촌 김성수-조국과 겨레에 바친 일생> 283쪽에서 "경성방직주식회사는 순수 민족자본에 의한 최초의 주식회사라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그는 바로 윗문단에서 친일파 박영효가 초대 사장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같은 책 287쪽에서 박영효를 "민족적 양심과 기개를 잃지 않은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친일파 박영효가 경성방직 초대 사장인 점을 염두에 둔 기술로 볼 수 있다. 엄연한 친일파를 근거 없이 민족주의자로 미화해 김성수와 경성방직의 이미지를 보호하려고 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위의 예처럼 일부 사회 지도층이 김성수 미화작업 때문에 오늘날 일부 한국인들은 김성수를 민족자본가로 생각하면서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는다. 경성방직의 성격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성방직의 성격을 재조명하는 것은 오늘날의 주식회사 경방을 폄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의 우리 역사를 바로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경성방직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흔히 토착자본을 민족자본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둘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조선인이 조선에서 세운 기업이라면 분명 토착자본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김성수는 당연히 토착자본이다.

그러나 토착자본이 곧바로 민족자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토착자본이라는 상위 개념 아래에는 민족자본과 매판자본이라는 하위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외세자본에 맞서 대항적 성격을 띨 때에, 토착자본은 민족자본의 성격을 갖게 된다. 반면, 외세자본에 대해 기생적 성격을 갖게 되면 토착자본은 매판자본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토착자본일지라도 그 성격에 따라 민족자본이 될 수도 있고 매판자본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제3의 일반적인 의미의 토착자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경성방직이 토착자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기업을 민족자본이라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경성방직의 초기 경영자가 친일파 박영효, 친일파 김연수(일제에 비행기 헌납) 등이었다는 점은 차치하고, 여기서는 경성방직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2가지 측면을 살펴보려고 한다. 경성방직이 민족자본이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 '태생의 문제'와 '존립의 문제'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경성방직의 '태생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경성방직은 과연 조선인 자본에 의해 세워진 민족자본인가?

경성방직의 형식적 출발점은 1919년 10월 5일이다. 그날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가졌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적 출발점은 아니다. 왜냐하면 제4편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 정상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성방직의 실제적 출발점은 1926년경으로 봐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형식적 출발점인 1919년 10월 5일 시점에서 볼 때에, 경성방직은 토착자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족자본이라고 해석될 만한 여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 출발점인 1926년경을 기준으로 하면 경성방직의 성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제4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924년부터 매년 일제 당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고, 그것이 중요한 원인이 되어 경성방직이 조업 정상화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4편에 설명했듯이 사이토 마코토 신임 조선총독이 3·1운동 이후 신(新)친일파를 재건하는 상황 속에서, <동아일보>는 1920년대 초반부터 총독부에 대해 조선인 자본의 보호를 요구하였고, 김성수는 1922~1926년 기간에 사이토 총독과 13번이나 만났다.

일본과 다른 판로를 개척한 경성방직

▲ 조업이 정상화된 이후인 1927년 당시의 경성방직.
ⓒ <수당 김연수>
둘째, 경성방직의 '존립의 문제'가 있다. 경성방직이 민족자본이 되려면, 그 태생이 민족자본다워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존립 역시 민족자본다워야 한다.

모든 기업이 외세자본에 대해 대항적 성격을 띠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김성수 측이 경성방직을 민족자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경성방직이 과연 그런 기업이었는지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경성방직이 보인 실제 경영방식은 <동아일보> 주장과는 딴판이었다. 김성수가 세운 <동아일보>에서는 외세자본에 대항하자는 취지의 사설을 여러차례 발표하였다. 1920년대에 지속적으로 발표된 <동아일보> 사설의 핵심은 '우리 민족이 일제치하에서 살아가려면 우리 자신의 산업을 보호·육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동아일보>는 민족기업을 살리기 위하여 조선 민중의 민족주의에 호소하였다. 이 신문은 '조선 형제여'(1920년 6월 20일자 사설) 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조선 민중에게 조선 제품을 애용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소비조합 결성을 통해 국산품을 애용하면 외국상인이 배척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성수가 세운 <동아일보>에서는 외세자본에 대항한 민족자본을 역설하였지만,그가 세운 경성방직의 실상은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 경성방직은 일본 자본과의 경쟁을 시도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일본 자본과의 경쟁을 피하고 있었다.

구한말 이래로 한반도 중부·남부 지방은 일본 동양방직(東洋紡織)의 판로였다. 그리고 일본자본인 조선방직(朝鮮紡織)이 부산에 세워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경성방직이 만들어졌다.

주식회사 경방이 1969년에 발행한 <경성방직 50년>에 의하면, 경성방직의 주된 진출경로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방이었다. 이 책에서는 판로 개척에 관한 경성방직의 결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미 동양방직의 독무대가 된 남한 일대에는 본 회사가 딛고 설 땅이 없음을 절감하고, …… 관서, 관북지방에 눈을 돌린 것이었다."
"당시의 중역 회의록을 보면 김연수 씨가 관서, 관북지방에 중점으로 선전 공세를 벌이고 평양, 원산 등지에 판매원을 파견하도록 역설하였다."


김성수가 세운 <동아일보>에서 외국상인·외국상품 배척을 주장하던 시기에, 역시 김성수가 세운 경성방직에서는 일본 기업과의 경쟁을 피해 북부지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경성방직 50년>에서는 북진정책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실상은 일본기업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던 셈이다. 일제 당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입장에서 일본 자본과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였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성방직의 또 다른 판로는 만주지방이었다. 이 점은 이 회사의 창립취지서에도 표명되고 있다. 취지서에서는 "자급은 물론 여액(餘額)은 만주지방에도 이출(移出)할 것을 기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대로 경성방직은 1938년 만주 봉천에 지점을 설치하게 되었다.

제3편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김성수 집안의 기업 활동 경로는 일본제국주의의 만주진출 경로와 흡사한 면을 갖고 있다. 물론 만주진출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1876년 개항 이래 한결같이 일본의 국가발전 경로와 이 집안의 집안발전 경로가 놀라우리만치 일치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위와 같은 경성방직의 판로 개척 경로를 보면, 이 기업이 존립 측면에서 외세자본과의 대항적 성격을 띠기보다는 외세자본의 경쟁을 회피하는 방향을 취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경성방직은 그 태생에서부터 일제 당국의 자금 지원을 받았고 그 존립 과정에서도 일본자본과의 경쟁을 회피하고 공존을 선택했다. 이것은 분명 민족자본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태생과 존립의 양 측면에서 경성방직은 민족자본이라 하기에 부족한 기업이었다. 따라서 "경성방직은 민족자본이고 그렇기 때문에 김성수는 민족자본가이며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힘들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6편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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