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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는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김성수가 자란 환경은 과연 민족주의자를 낳을 만한 환경이었을까? 그가 어렸을 때에 고부에서는 소작농민들이 동학농민전쟁(1894년)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작농민의 군대는 지주계급과 일본의 연합군대에 의해 분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작농민으로 대표되는 조선 민중에 대한 사랑이 생길 수 있었을까? 게다가 그는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이 같은 집안 내력을 볼 때에, 그에게는 친일 행위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기 자신과 집안의 이익이 일본제국주의의 이익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김성수 선생의 친일행위는 부득이한 것이었고, 실제로 그분은 조선 민중을 사랑하셨다'고 옹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가 조선 민중을 진정으로 사랑하였다면 그의 친일행위 역시 재평가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친일행위에도 무언가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학교를 세웠다는 것만으로는 겨레 사랑을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김성수 집안의 민중 사랑을 검증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집안이 소작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조사하는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사람의 인격을 파악하려면, 농업과 얽힌 인간관계를 조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 점이 이번 제3편 기사에서 잘 드러날 것이다. <기자 주>


식민시기에 차곡차곡 재산 불어난 김성수 집안

▲ 일제치하에서 토지를 잃고 간도로 이주하는 조선 농민들.
ⓒ <한국백년>
1910년대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된 시기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토지조사사업이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변호한다. 하지만, 조선 땅이 근대화되는 것과 조선 민중이 근대화되는 것은 분명히 구별돼야 한다. 일제가 벌인 근대화사업이 조선 땅을 위한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조선인이 아닌 일본 이주민과 일본 본국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조선 민중에게 해악을 끼쳤다는 문서 자료를 내놓으라"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그런 자료가 세상에 남아 있을 리는 없다.

토지조사사업 이후로 수많은 조선 농민들이 토지에서 유리되었으며 또 수많은 조선 민중들이 만주로 또 해외로 이주하였다는 점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조선 민중에게 불행을 안겨 주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실증 자료는 없다.

그리고 일제시기에 수리조합사업(토지개량사업의 일환)이 누구의 주도로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식민지 근대화의 수혜자가 누구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일본 도요타 재단의 자금 지원(책의 서문 참조)을 받아 이영훈 교수 등이 1992년에 펴낸 <근대조선 수리조합연구>에 의하면, 일제치하에서 조선인 조합장을 둔 수리조합과 일본인 조합장을 둔 수리조합의 몽리(蒙利, 수리시설에 의해 물을 받음) 면적은 각각 46대 54였다. 일본인 지주들이 주도한 지역에서 수리시설 혜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던 셈이다.

▲ 학창 시절 동생 김연수와 함께한 김성수(왼쪽). 두 사람은 법적으로는 사촌간이지만, 실제로는 친형제다. 훗날 김연수는 일제에게 비행기를 바쳤다.
ⓒ <수당 김연수>
일부 경제사학자들은 <근대조선 수리조합연구>라는 책을 식민지 근대화론의 근거 자료로 내세우고 있지만, 자신들이 스스로 밝힌 위 수치에서 나타듯이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인 지주가 조선인 지주보다 더 많은 수리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그만큼 조선의 토지가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갔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근대화였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의 일례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인 소작농은 물론 조선인 지주까지도 밀리고 있던 식민지 상황 하에서 김성수 집안의 경제 상황은 어떠했을까? 1910년대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이 집안의 재산 변동 상황을 김기중(양부)과 김경중(생부)의 경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김성수의 호적관계를 잠시 언급하기로 한다. 김성수는 김요협의 차남인 김경중의 4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래로 동생 김연수를 두었다. 그런데 위로 세 형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김성수는 김경중의 장남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김성수는 3살 때인 1893년에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다. 김기중에게는 김성수 외에도 김재수라는 아들이 또 있었다.

그런데 김기중·김경중 형제는 5, 6백평 되는 집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솟을대문 하나가 두 형제의 거처를 가로막고 있었을 뿐이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두 형제의 재산 상황을 따로 언급하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한 집안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 김성수의 양부인 김기중.
ⓒ <수당 김연수>
먼저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던 1910년대에 김기중 쪽의 재산은 얼마나 불어났을까? 참고로, 김성수는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마치고 1914년(24세)에 귀국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젊은 유학파 김성수가 조선에 돌아와 의욕적으로 활동하던 때였다.

이 글에서 김기중 쪽의 재산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김용섭(전 연세대·서울대 교수)의 <고부 김씨가의 지주경영과 자본전환>이라는 논문을 활용하였음을 밝힌다. 김성수 집안의 추수기(秋收記, 경영문서)를 근거로 한 이 논문은 완성 당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 역사학자의 말에 따르면, 김용섭이 고려대 교수의 도움으로 고대 도서관에 있는 관련 서류를 입수하여 논문을 발표하자, 주식회사 삼양사의 고위 간부가 해당 교수의 문책까지 주장했다는 것.

제2편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김요협(김성수의 할아버지)이 김기중에게 남긴 재산은 1000석(石) 토지였다. 평년작을 기준으로 할 때에, 1000석 토지는 대략 1600두락(斗落, 마지기) 또는 100정보 정도다.

토지조사사업 끝나자 재산도 '100배'

▲ 김씨 집안의 신태인 농장.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료를 거두는 모습이다.
ⓒ <수당 김연수>
그런데 토지조사사업이 끝나던 1918년에는 김기중·김성수·김재수 3부자 명의의 토지가 1만 1707마지기가 된다. 9년 사이에 약 7.3배 증가한 셈이다. 그리고 6년 뒤인 1924년에는 1만 3606마지기가 된다. 1909년부터 1924년까지 약 8.5배 증가한 셈이다.

당시 이 집안이 소유한 토지는 고창군·부안군·정읍군·옥구군·김제군·장성군·화순군·논산군·대전군 등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도 김성수 집안의 토지는 꾸준히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김경중 쪽의 재산 증식 실태를 다음과 같다. 제2편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1909년에 김요협이 김경중에게 물려준 재산은 200석 토지였다. 주식회사 삼양사가 1974년에 발행한 <삼양 50년>에 따르면, 1924년 당시 이 재산은 "100배 가깝게" 불어났다. 그리고 <인촌 김성수전>이나 <수당 김연수>에서는 그 규모가 1만8000석 토지라고 하였다. 만석꾼이 되고도 훨씬 남는 규모다.

요약하면 1909~1924년 기간에 김성수의 양부인 김기중은 토지를 8.5배 늘렸고, 그의 생부인 김경중은 약 90배 늘렸다. 19세기 중반에 할아버지 김요협이 만석군인 장인으로부터 증여받은 '그 약간의 전답'이 이처럼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조선인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대조적인 일이라 하겠다. 일제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던 시기에 김성수 집안은 이처럼 대대적인 토지축적을 이뤄낸 것이다.

그럼, 김성수 집안이 그토록 엄청난 재산 증식에 성공한 요인은 무엇일까? 물론 집안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여기에는 2가지의 객관적 요인이 있다.

첫째, 김성수 집안의 농업경영은 일본의 경제정책에 편승하는 것이었다. 김성수 집안이 양반관료인 동시에 지식인이었다는 점은, 그 집안이 시대적·역사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집안이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더군다나 생부인 김경중이 1907년에 <조선사> 17권을 저술하였다는 것은 이 집안 사람들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민감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이 집안은 주요 경영상의 고비마다 '시대를 읽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 김성수의 생부인 김경중이 저술한 <조선사> 17권.
ⓒ <수당 김연수>
1918년과 1924년의 상황을 보면, 김성수 집안의 토지 중에서 논이 차지하는 면적이 전체의 92%를 상회했다. 반면, 밭이 차지하는 비율은 5~7%에 불과했다. 언뜻 보기에는 사소한 것 같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김용섭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전북 지역의 논밭 비율은 77:23이었다. 그러므로 김성수 집안의 논 비율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많이 높다. 이는 김성수 집안이 다른 전북 지역 지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논농사에 주력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바로 이 점이 일제의 농업정책과 맞닿는 부분이기도 하다.

개항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조선 강점 이후로 일본은 조선 쌀을 집중적으로 수입하였다. 나중에는 이 정책이 바뀌긴 했지만, 식민지 초기에 일제는 조선을 상품 판매시장 겸 원료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쌀 등 농산품을 조선에서 일본으로 옮겼다. 그러므로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선의 밭보다는 논에 관심을 더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수시로 소작농 바꾸고 마름 자르고

▲ 김씨 집안의 '만주진출'을 설명하고 있는 <수당 김연수>의 목차. 밑줄 친 부분이 '만주진출'에 관한 것이다.
ⓒ <수당 김연수>
이처럼 일본이 조선의 논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기에 김성수 집안은 밭보다는 논에 주력하였다. 경영자의 입장에서 '고객'의 의중을 간파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일제의 경제정책을 활용한 합리적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성수 집안이 일본에 안테나를 맞추고 있었다는 점은 그 집안이 '만주진출'에 나섰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만주진출'이란 표현은 이 집안에서도 사용되는 표현이다.

만주국이 세워진 뒤인 1936년 3월 김성수의 친동생인 김연수가 삼양사의 거점을 만주에 마련한 것도 그 한 가지 예가 된다. 이후 만주에는 이 집안이 만든 천일농장 등이 세워지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경로인 조선-만주는 김성수 집안의 사업 경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점만 갖고는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다. 돈을 벌기 위해 정치권력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은 경영자로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집안 사람들이 개항 이후로 일본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성수 집안 사람들이 심리적 안테나를 일본에 맞추고 있었다는 것, 이점은 다음 4편부터 소개할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둘째, 김성수 집안의 농업경영은 '인간 경영'이라고 하기에는 2% 부족했다. 서두에서 제기한 바 있듯이, 이 점은 김성수의 겨레 사랑을 검증하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김성수가 객관적으로 친일파이고 또 그의 집안이 일본자본주의에 편승해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그와 그의 집안 사람들이 조선 농민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었다면 김성수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었다. 조선 농민들을 배려했다는 점이 입증되면, 객관적인 친일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를 민족주의자 혹은 휴머니스트라고 부를 가능성이 존재한다.

김용섭의 논문에 의하면, 1923년경을 기준으로 할 때에 김기중·김성수·김재수 3부자 명의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민은 총 1978명이었다. 웬만한 대기업을 연상케 하는 규모라 하겠다. 그런데 그 소작농민의 과반수는 경작 토지가 3단보(段步)에도 못 미치는 영세농들이었다. 일반적인 소작 규모보다도 적은 규모였다.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김씨 3부자가 소작인을 수시로 교체하였다는 점이다. 1918~1924년 기간 동안 김씨 3부자의 토지 2053필지 중에서 6년간 소작인의 변동이 없었던 것은 845필지에 불과했다.

그 외의 대부분의 땅에서는 소작인이 수시로 교체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김씨 집안의 소작인들은 고용불안을 겪은 것이다. 이처럼 김씨 3부자는 소작인을 수시로 교체함으로써 소작인들의 충성을 이끌어내는 한편, 소작 조건을 한층 더 악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소작인이 땅을 잃는 것은 생명을 내놓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소작인을 수시로 교체하였다는 점에서 김성수 집안의 인간관(人間觀)의 일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리 이윤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그처럼 냉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씨 집안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의 소작인들도 그 당시에는 다 힘들었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김성수는 일반 지주와 달리,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며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었다. 또 그는 훗날 부통령까지 지낸 사회의 지도층이었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농업 경영에 대한 판단 역시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김성수 3부자는 농업관리인(마름)도 수시로 교체하였다. 1918·1923·1924년의 경우를 보면, 김씨 3부자의 땅을 관리하는 마름은 총 38명이었다. 그런데 1918~1924년 시기에 그 지위를 그대로 유지한 사람은 12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마름들은 수시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물론 기업 경영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지만, 김성수의 집안에서 이처럼 소작인과 마름의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뒤집기 어려운 사실이다. 김성수 집안은 합리적인 경영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민족주의적인 휴머니스트가 되기에는 2%가 부족하였던 것이다.

민족주의자라는 증거는 어디에?

▲ 만주에 세워진 삼양사 봉천 사무소.
ⓒ <수당 김연수>
앞서 소개한 바 있듯이, 그는 1943년에 청년 학생들에게 황국을 위해 싸울 것을 권고하면서 "제군아, 의무에 죽으라"고 말한 바 있다. 소작인과 마름을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면, 남의 집 아들들의 생명을 경시하는 그러한 발언을 차마 꺼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김성수에게서 친일파의 혐의를 벗겨 주려면 그가 진실된 민족주의자였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어떤 자료에서 김성수의 '억울함'을 밝혀줄 지 의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910년대에 김성수 집안은 엄청난 양의 토지 확대에 성공했으며, 이 과정에서 그 집안은 일제의 경제정책을 활용하고 또 소작인·마름을 합리적으로 이용했다.

그럼, 다음 시기인 1920년대에 김성수 집안은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1910년대까지는 일제의 경제정책을 이용하기만 하던 이 집안은 1920년대에 가면 좀 더 대담해진다. 그 점은 제4편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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