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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룡마을에서 바라다 본 도곡동 타워팰리스의 모습
ⓒ 인권실천시민연대
버스 종점에서 내려 마을이 시작되는 곳을 찾았다. ‘구룡마을 주민자치회’라는 큼지막한 간판을 내단 망루가 고민을 쉽게 덜어주었다. 컨테이너 박스와 철제 계단 등으로 얼키설키 지어놓은 3층의 망루는 흡사 중세시대 야전초소를 연상케 했다. 철거촌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망루는 봄단장을 하는 중인지 페인트칠이 한창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아파트 단지나 제법 큰 상가 주차장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관리실에서 건장한 남자 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언뜻 마을을 드나드는 이들을 감시하기 위한 시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부터 떠나지 않던 그들의 눈길이 잠시 다른 곳을 향해 있는 틈을 타 재빨리 마을로 들어섰다.

뒤통수에서 “어디 가시오?”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짐짓 못 들은 체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몇 번이나 소개돼 낯설지 않은 ‘구룡마을’ 탐방은 그렇게 약간의 긴장과 떨리는 마음을 누른 채 시작됐다.

가난, 벗기 힘든 굴레

본격적인 마을 초입에 이르자 머리를 맞대듯 지붕을 맞댄 판잣집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몇 가구에, 몇 명이나 살고 있을까?’ 다닥다닥 붙어 숫자도 가늠하기 힘든 판잣집들, 인기척마저 별로 느껴지지 않아 딴 세상에나 온 듯 불안한 마음이 가슴 한곳에서부터 일어났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한가롭게까지 보이는 마을의 판잣집들은 높이가 사람 키를 크게 넘지 않았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은 꿈도 꿀 수 없을 듯 근근이 시멘트로 포장된 길도 얼마 이어지지 못하고 군데군데 끊기고 있었다.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 570번지 일대를 일컫는 구룡마을, 그러나 이 마을은 행정 지도 어디에도 표시돼 있지 않다. 주민 대부분이 사유지를 불법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세대별 주소도 없다. 이른바 유령 마을이다. 강남의 부를 상징하는 도곡동 타워팰리스와 직선으로 불과 1.3㎞ 거리인 이 마을에는 동사무소나 치안센터, 소방서 같은 기본적인 행정기관은 물론 흔하디흔한 학원이나 오락실 하나 없다.

국내 최대의 판자촌

구룡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86년 7월, 88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정부가 대대적인 빈민가 철거작업을 벌이면서였다. 88올림픽이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란 사실은 이곳에서도 분명해졌다. 하루아침에 보금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비닐하우스를 지으면서 시작된 마을은 1988년 규모가 급격히 커져 현재 17만여평에 2천여 가구가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판자촌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 서너평인 쪽집에 사는 주민들의 삶은 ‘열악함’ 그 자체다. 비닐 지붕과 너덜너덜한 문짝이 지탱하고 있는 집들은 걷어차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하다. 날이 따뜻해지면 더욱 심해질 악취와 색 바랜 옷들이 널린 빨래줄, 동네를 배회하는 비쩍 마른 강아지는 1960년대 판자촌 바로 그 광경이다.

공동화장실도 그때 그대로, 화장실 문을 열면 나무 발판 두 개 위에 나무 뚜껑이 놓여 있다. 주민의 80% 이상은 아직도 이런 공동화장실을 쓴다. 1960년대에서 진화된 것이 있다면 LP가스통이 들어와 연탄불을 벗어났다는 점과 전화선이 들어왔다는 것 정도. 학생이나 젊은 사람이 있는 가정에서는 인터넷을 끌어오기도 했다.

▲ 미로 같은 길을 따라 늘어선 쪽방들
ⓒ 인권실천시민연대
불법으로 남의 땅에서 살다보니 마을 주민들은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자신이 살고 있는 개포동으로 올리지 못하고 인근 교회나 일하는 음식점, 친척집 등으로 위장전입을 해놓고 있다. 주민자치회가 이곳을 강남구 개포1동의 일부로 인정받아 주민등록상 주소지로 등재하려고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기각되고 말았다.

빈부의 차는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나무로 벽을 대고 비닐로 지붕을 씌운 판잣집의 규모부터가 다양하다. 최하 서너평짜리 쪽집에서 이런 집들을 두세채 튼 7~8평짜리 집에서 20평이 넘는 ‘맨션’도 있다고 한다. 현재 2000여 채의 판잣집 가운데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1000가구 정도다.

절반 정도는 비어 있는 셈이다. 비어 있는 집도 마을에서 인정하는 ‘주인’은 다 있다. 판잣집 입구마다 마을자치회에서 만든 주민 명표가 붙어있어 주소도, 건축물 대장도 없지만 ‘주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주거 주민’과 ‘딱지 주민’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개발 둘러싼 주민 갈등 깊어지는 구룡마을

이 마을에는 2개의 자치회가 활동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구룡마을자치회(마을자치회)’와 지난 1999년 만들어진 ‘구룡마을 주민자치회(주민자치회)’가 그것이다. 양 자치회 회관은 마을 초입에 100여 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을이 생길 당시부터 자치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전기요금 같은 공과금을 수납하는 일이다. 무허가 비닐하우스촌이다 보니 집집마다 전기계량기를 달지 못하고 대신 자치회가 9개 지구마다 변압기 1대씩을 설치해 전기요금을 걷어 대납했다. 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 공과금을 걷다 보니 일부 자치회 간부가 이를 횡령하는 일이 생겨나면서 주민의 원성을 샀다.

이 과정에서 1999년 7월 2지구 100여채에 불이 난 사고를 계기로 자치회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구룡마을 주민자치회’를 구성해 떨어져 나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구룡마을 주민은 이들 두 단체의 분리로 반으로 갈려 아직까지 공과금도 따로 낼 뿐 아니라 재개발 등 마을 운영방향을 놓고 심한 갈등을 빚고 있다. 갈등이 최고 수위에 올랐을 때는 두 단체가 상대방의 본부격인 마을회관과 자치회관을 중장비를 동원해 부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양쪽 회관 사이에는 남북한을 갈라놓고 있는 휴전선을 연상케 하는 긴장감이 감돈다.

다시 들이닥치는 ‘개발 유령’, 그 끝은?

구룡마을에 다시 ‘개발 유령’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마을주민들 사이에는 골이 깊어가고 있다. 개발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경. 5년이 지난 지금은 강남의 마지막 노른자위 땅으로 불리면서 마을 전체가 들썩이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마을주민 상당수가 자신들의 미래는 물론 현재의 처지를 명확히 볼 수 있는 시야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거주 주민 상당수가 노인이거나 배움이 부족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법적으로 토지에 대해 주장할 권리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발이 되기만 하면 새로운 삶의 ‘돌파구’가 열릴 수 있으라는 허망한 꿈을 꾸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난 때문에 이곳을 택한 ‘주거 주민’들 가운데서도 언제부터인가 이른바 ‘딱지’(입주권)를 기대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구룡마을을 배회하는 ‘개발 유령’은 주민들에게 ‘막연한 기대감’을 심어주면서 힘들지만 건강하게 살아온 이들의 삶과 정신을 조금씩 갉아먹어 가고 있는 것이다.

둘로 갈라진 자치회의 갈등도 그래서 깊어지고 있다. 대표성 다툼이 치열하고 그럴수록 상대방의 도덕성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난무하고 있다. 지난 2000년 두 자치회 중 한곳에서 주민들의 전출입을 관리하기 위한 주민(회원)증을 발급하고 이 주민증이 ‘딱지’로 인식되면서 한 장에 수천만원씩에 거래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양분된 주민들 사이의 골은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깊어졌다. 이런 일의 이면에는 대부분 개발 브로커나 부동산업자들이 있다. 주민들도 어렴풋이 그 사실을 알게 됐지만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생관계를 어쩌지도 못한 채 더욱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웬 십자가가 이리도

구룡마을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다른 곳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한 가지를 꼽으라면 유독 캄캄한 마을 한가운데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십자가들이다.

그 흔한 학원이나 편의점은 물론 변변한 가게 하나 없는 마을에 교회는 무려 13개나 된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집을 찾게라도 되면 대개는 불쑥불쑥 십자가가 솟은 개신교 교회가 꼽힌다.

“뭣 하러 저러는지들 몰라. 나중에 교회라도 지으려고 저라나….”

교회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내놓고 뭐라고 하지는 못해도 ‘뭘 노리는지 다 알겠다’는 말투다. 주민들의 불신이 배어나오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같은 교단 소속 교회인데도 몇십 미터 거리를 두고 경쟁하듯 간판을 달고 있는 것 자체가 마을 주민들로서는 마뜩찮다. 거기다 그 많은 교회 가운데 주민들을 위한 복지나 교육 사업 등 대사회 활동을 펼치고 있는 곳은 단 한군데뿐이어서 주민들의 생각이 비뚤어졌다고만 하기도 힘들다.

교세 확장을 위해 개척(?)에 나섰다고도 할 수 없는 게 상주하는 주민 수가 그리 많지 않은데다 그나마 10여개 교회가 영역이 겹쳐 선교 효과도 미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뻔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회 성직자 중에는 마을 자치회 운영에도 깊이 간여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도 있어 토착 주민들로서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모양새가 돼 불신만 쌓여가는 모습이다.

▲ 구룡마을 입구에 위치한 자치회관 건물과 기도원의 모습
ⓒ 인권실천시민연대
딱지가 만드는 환상

이렇듯 구룡마을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젖어봤을 이른바 ‘딱지’(임대아파트 입주권)라는 신기루가 만들어내는 환각 효과는 가히 위력적이라 할 수 있다. 당장 마을이 개발되면 과거의 삶과는 절연된 새로운 삶이 열리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환상이다.

실제 운이 좋아 ‘딱지’를 받는다 하더라도 임대아파트는 주민 대부분에겐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의 처지로는 수천만원에 이르는 임대아파트 보증금을 마련하는 일도 어려운 일이지만 근근이 입주했다고 치더라도 열에 아홉은 자신들의 수입으로 매달 20만원이 넘는 월세에 공과금을 감당해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매스컴에서는 잊을 만하면 ‘개발’을 부추기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개발 소식에 부화뇌동하는 주민들로서는 개발 이익을 노리는 건설사나 그런 건설사에 솔깃한 언론에 농락당하는 꼴이다.

“만에 하나 개발이 되더라도 임대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몇 없을 겁니다. 다들 헛물만 켜고 있는 셈이지요.”

구룡마을에서 18년째 살아오고 있다는 김병찬(49)씨는 기자의 방문도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불만이 쌓일 만도 한 게 언론사에 나와 취재를 해가면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포장돼 나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들의 그런 행태가 구룡마을과 주민들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마을에서 살아보지 않고 잠시 스쳐가는 이들로서는 마을 곳곳에 드리운 복잡한 속사정을 알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외부인으로서는 쉽게 들여다볼 수 없는 주민들의 삶 자체가 한국 사회의 각종 모순과 얽히고설켜 몇몇 주민들의 말만으로는 마을에 관한 현상적이고 표피적인 접근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기 힘들 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와 함께 구룡마을에 접근해온 기자들을 비롯한 ‘가난’을 겪어보지 않은 수많은 외부인들의 발걸음도 마을을 둘러싼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특히 강남의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 땅을 둘러싸고 벌이는 개발업자나 부동산업자들의 각축은 이익에만 눈이 멀어 고도로 응축된 한국 사회의 모순을 한꺼번에 마을에 풀어놓은 결과를 낳아 더욱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힘들게 만든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오랜 세월 가난의 굴레 속에 살아왔던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탱해준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개발이라는 ‘깨진 독’에 쏟아 붓고 있는 모양이다.

삶의 붕괴를 부추기는 사회, 그리고 몸부림

믿을 수 있는 정책의 부재가 혼란과 문제를 가중시키는 현실은 구룡마을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는 이라고 해봐야 마을 전체를 통틀어 120여세대에 지나지 않는다.

관할 구청에서 주민들의 안전과 화재사고 예방을 위해 전기안전 점검을 실시하기 시작한 것도 화재가 잦아 대형사고의 위험이 커지던 2004년 3월 이후부터다. ‘행정의 개입이 불법거주를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판단으로 인해 이어져온 이러한 행정의 부작위는 결국 문제만 키워온 결과가 됐다. 그렇다고 다른 기관들의 움직임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 곳을 향해 차근차근 준비해나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구룡마을자치회 회장이기도 한 김병찬씨는 구룡마을이 언젠가는 끊임없이 외연을 확대하고 있는 자본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가족이 살아왔고 자식들을 키워낸 마을이 공동체성을 유지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꿈을 털어놓았다.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주민들을 짓누르고 있는 무지를 털어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김 회장은 주민들을 위한 무상교육 터전 건설이 절실하다고 역설한다. 아울러 주민들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누구도 꿈꿔 보지 못한 원대한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가 내놓은 무료직업소개소 설립, 공동작업장 개설 등의 꿈은 자신의 삶에 사랑을 지닌 이만이 건져 올릴 수 있는 희망이었다.

“이곳에서마저 쫓겨나면 이번에는 경기도 어디쯤으로 흘러가겠지요.”

자조 섞인 김 회장의 미래가 현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가난 속에서도 인간성을 유지해온 공동체가 난폭한 자본의 풍랑 속에 좌초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에 안착하길 바라는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났다.

그래도 희망은 자란다

옛 구룡마을자치회관은 마을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자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바로 회관 1층에 자리잡은 ‘구룡바오로공부방’ 때문이다. 공부방은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아이들로 하루 종일 분주하다.

지난 2002년 2월 인경희 수녀(모니카·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비롯한 몇 명의 수녀들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일기 시작한 변화다. 처음엔 무슨 일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돈벌이 나간 사이 갈 곳 몰라 하는 아이들을 하나둘씩 모아 자신들의 비닐하우스에서 밥을 챙겨 먹이고 놀아주기 시작했다.

오후 서너시가 돼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수녀들의 방은 공부방으로 변했다. 홀로 사는 노인을 방문하며 어려움을 돌보는 한편 그해 가을부터는 빈민사목위원회의 주선으로 강남성모병원 가정간호과에서 나와 가정간호 서비스도 제공해오고 있다.

처음엔 “수녀들이 이곳엔 왜 왔냐”, “성당 지으려고 그러냐”며 경계하던 마을에서도 회관 한쪽을 내줘 놀이방이 꾸며지고, 이제는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공부방도 생긴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발적으로 공부방을 찾고 있는 아이들이 30명이 넘는다.

지난해 5월에는 7살부터 중학생까지 40명 가까운 아이들로 스카우트도 만들었다. 스카우트 활동을 하며 아이들의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띠어 가고 있다. 아이들의 마음이 수녀들에게 쏠리자 자연스레 부모들의 마음도 모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들에게 스카우트 지도자 훈련 등을 시켜 아이들과 함께 활동을 하게 하면서 마을 주민들 사이에는 드러나지 않는 변화가 하나씩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많이 변했죠. 자기 주장을 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챙길 수 있게 됐다는 것 자체가 이들로서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모니카 수녀는 그간의 변화가 대견스러운 표정이었다. 피해의식으로 외지인들에게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이 조금씩 열리면서 지난해엔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학교를 파했는지 공부방 문을 열고 우르르 들어서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향해 연신 행복한 미소를 보내는 모니카 수녀, 자신의 아이인 양 아이들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맞이하는 봉사자들의 모습에서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은 풋풋한 희망의 내음이 전해져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이 썼습니다. 서상덕 위원은 가톨릭신문 기자로 재직중입니다.

*이 글은 인권연의 웹진 주간 <사람소리>와 월간 <인권연대>, 미디어다음 <블로거기자단>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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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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