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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새
ⓒ 행정자치부 홈페이지
제헌헌법 원본과 대한민국 최초 국새가 분실된 데 이어, 조선시대의 국새도 모두 없어진 것으로 얼마 전 감사원 조사에서 밝혀졌다.

궁중 유물 2천여 점 속에 기록상 13개가 있어야 할 조선시대 국새가 사라진 것인데, 특히 미군정 당시 맥아더 장군이 일본으로부터 환수해 우리나라에 돌려준 것으로 기록돼 있는 옥새 6개마저 행방불명이 됐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고, 담당 공직자들의 처신이 실로 한심할 뿐이다.

그러면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의 망명정부가 만들어 썼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새는 현재 존재할까? 불행히도 그것 역시 '아니다'이다.

1951년 한국전쟁 중 1·4후퇴가 시작되자, 국새를 포함한 임시정부의 공인상자를 임시로 맡아 보관하던 사람이 경기도 안성의 어느 집 지하에 묻어 뒀었는데, 피난을 다녀오니, 기이하게도 하필이면 그 장소가 공습을 당하여, 인장들이 모두 부서져 버렸다고 한다.

의문투성이인 임시정부 국새와 문헌의 '피재'

"이 공인함은 손에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상자인데, 6·25사변 전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셨던 조경한 지사가 손수 보관하고 있다가, 사변 때 피난을 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시면서 그때 혜화동에 살고 있던 조태국(趙泰國) 청년한테 맡겼다.

그 뒤 1953년 6월에 서울 신당동에 사는 유선기(柳善基) 청년이 조 지사가 일시 머물고 있는 전주시(全州市) 처소로 와서 보고하기를, 1·4후퇴 때 자기도 두 번째로 피난을 하게 되어, 어르신께서 맡긴 공적인 물품과 사적인 물품을 태국 군과 분담해 보관키로 하고, 임정 공인상자와 기타 물품 절반을 자기가 가지고 서울을 떠났으며, 그것들을 경기도 안성군 읍내에 사는 한 친구 집 지하에 매장하였더니, 그 뒤 기이하게도 하필이면 그 장소가 로켓탄 공습을 당하여 공인이 모두 재로 바뀌거나 부서져 버렸다고 하였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조경한(1900~1993) 지사가 1953년 10월에 쓴 '대한민국전 임시정부 문헌 피재 전말기'(大韓民國前 臨時政府 文獻 被災顚末記)에서


우리 임시정부와 관련, 불행하고 어이없는 일은 또 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의 역사를 기록한 소중한 문헌들이 역시 같은 한국전쟁 때 통째로 사라졌다. 전해지는 말로는, 서울 돈암동 한 주택 창고에 보관해 뒀는데, 미군 비행기가 발사한 소이탄에 맞아 몽땅 불에 탔다고 하나, 의문투성이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그 해 11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지사들이 중국 충칭(重慶)에서 귀국하면서, 두 기관이 가지고 있던 중요 문헌들을 정리해 임정의 문헌과 물품을 넣은 상자 열 개, 임의원의 문헌과 물품을 넣은 상자 세 개, 합해 모두 열세 개의 가죽 상자를 가지고 환국했다.

그때부터 1946년 1월 중순까지는 백범이 묵고 있던 서울시 경교장에 그것들을 간직했다가, 그 뒤 몇 차례 보관처를 옮기는 과정에서, 임의원의 문헌과 물품 상자 세 개는 임의원의 후신인 '비상정치회의' 본부로 옮기고, 임정의 정치문헌과 물품이 든 상자 열 개만은 그 해 5월에 다시 정리해서 상자 열 개를 여덟 개로 만든 뒤, 6월에 조남직(趙南稷, 임정 비서처 서무위원회 용도과장으로 복무 중)의 혜화동 주택으로 옮겨 보관했다. 그 뒤 조남직은 가정 사정으로 혜화동에서 성북동으로, 성북동에서 다시 돈암동으로 두 차례 이사를 했는데, 보관물도 그때마다 함께 따라다녔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물품 관리의 총책임자인, 전 임정 국무위원 조경한 지사는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3년 여름 서울로 돌아와, 그 해 10월 조남직 가족이 살고 있는 돈암동 집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그리고 그때 그 곳에서 임정의 문헌과 물품이 모두 사라진 것을 알게 됐다.

조남직의 부인이 말했다. '육이오동란 중 임정 보관물을 안채에서 일 미터쯤 떨어진 작은 창고 안 밑바닥에 깔아두고, 그 위에다가 집안의 각종 세간을 쌓아 두었었다. 남편은 북으로 끌려갔고, 팔순 시부모와 자식과 함께 갖은 험난을 겪으며 지냈다.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이 서울을 철수하게 되자, 모자는 병든 시부모 두 분만 집에 남겨 놓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다시 올라와 보니, 그 사이에 이 집이 소이탄을 맞아 창고가 완전히 불에 타 없어졌고, 그 안에 두었던 보관물도 당연히 그때 다 사라졌다.'

애국지사 조경한은 임정 물품을 보관했던 조남직 주택의 여러 정황이 소이탄과 같이 화재를 일으키는 포탄을 맞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말을 의심할 수도, 그 이상 추궁할 수도 없는 처지라서, 깊은 상심만 안고 돌아왔다." - '대한민국전 임시정부 문헌 피재 전말기'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국새와 문헌 찾아야

두 가지 물품 보관의 총책임자였던 조경한 지사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피력했다.

"국새가 든 공인상자가 공습에 사라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 느꼈던 그때의 상심을 결코 잊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 이제 또다시 이런 날벼락 같은 사변(문헌 분실)을 설상가상으로 겹쳐 당하고 보니, 무어라 지금의 이 심정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옛 역사에도 변란으로 중요한 역사문헌이 소멸된 예들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자못 상식 밖의 드문 일이라고 인정하고 싶다.

더구나 우리 민족이 갱생의 문을 열고 앞날을 개척해 나가는 이때에, (민족)정기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이 물품이 한결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짐은 아마도 민족의 운명이 아직도 암흑에서 맴돌게 됨을 일부 상징함이 아닌지 하여, 더욱 슬프고 두려움 섞인 비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따라서 잃어버린 유물 가운데서 비록 찢기고 부서진 것일지언정 단 한 조각이나마 이 세상 어느 한 구석에 남아 있어, 다행히도 하늘이 도와 불행한 시기에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용의 비늘과 봉황의 발톱과 같은 상서로운 물건을 얻은 것처럼, 우리 민족에게 위로와 기쁨이 될 것이거늘···! 나는 한 가닥 남은 앞날의 희망으로 그리 되기만을 빌어 마지않는다."


▲ 국새 변천 과정
ⓒ 경향신문
이상이 국새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귀중품과 독립운동 사료로서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임시정부 문헌들이 세상에서 사라진 전말이다.

어쨌거나 우리의 부주의와 관심 소홀로, 우리는 이 겨레가 대대로 영구 보존해야 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징이며 역사 자료인 국새와 문헌들을 잃어버린 죄인이 되었다. 그런데 더욱 통한스러운 일은 그런 물건들을 잃어버리고도 되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 우리 정부나 관련 학계의 무심함이다.

피로 쓴 임시정부 27년의 역사. 윤봉길 의사의 거사 직후 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군경의 눈을 피해 항저우로 옮겼다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쇠가죽 상자 여러 개에 나누어 목선에 싣고 양자강을 따라 피난길에 올랐던, 그 귀중하고도 귀중한 임시정부의 공인상자와 문헌상자들.

그때부터 우한을 거쳐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쟝, 충칭에 이르도록 중국 중원 대륙을 헤맨 끝에, 일제 패망과 더불어 해방 조국으로 환국할 때까지도 지사님들께서 늘 소중히, 정말 목숨을 걸고 간수해 왔던 것들인데, 그걸 잃어버리다니···!

임시정부가 돌아온 지 예순 해 만에 이 땅에는 비로소 임시정부를 기념하는 단체가 생겼다. 그러면 이 단체는 어떤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인가? 내 생각엔 무엇보다도 수수께끼처럼 사라진 국새와 문헌상자들을 찾는 거족적인 운동에 당장 나서야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가장 먼저 착수해야할 사업은 바로 이것이다. 아니, 이 일은 기념사업회가 떠맡아야 할 신성한 의무이다. 나는 지금 저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실 선열님들의 눈초리가 무섭다.

이 글은 다큐멘터리 감독인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이봉원 부위원장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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