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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도시 목포와 생가터 양동이 지닌 문화적 배경

이난영이 가수로 성공한 그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목포라는 항구도시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양동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주는 의미를 짚어본다.

▲ 1897년 개항된 이후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항구 도시로서 번성한 목포에서 이난영은 태어났다. 사진은 당시 목포항 풍경
ⓒ 목포백년회 발행 '목포백년사' 중에서
목포는 1897년 개항장이 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신흥도시였다. 항구도시라는 특성상 타지역보다 선진 문물이 먼저 유통되는 지역이었다. 호남권 근대문화가 목포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병원, 학교, 교회 등이 호남에서 가장 먼저 유입되고 목포를 중심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1935년 '목포의 눈물'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발표되고 크게 성공한 것도 당시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1935년은 목포가 가장 번성하던 전성기였다.

항구도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1916년 목포에서 이난영은 태어났다. 그는 가수로 데뷔한 지 6년째가 되던 1939년 어느 날,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항구 도시 목포의 딸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내 고향은 남쪽 목포항입니다. 어디든지 그렇지마는 항구에서 자라난 처녀들은 노래를 무척 즐기지요. 나도 그랬습니다. 망망한 대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외로운 바위 위에 홀로 앉아서 석양이 어물어물 떨어지는 서쪽 하늘을 우러러 희망의 노래를 부른답니다. 그러면 비단결 같은 푸른 물결은 내 노래를 싣고 하느적 하느적 이 항구에서 저 항구, 저 항구에서 또 다른 항구, 이렇게 전 세계의 항구란 항구에는 모조리 들려서 나의 노래를 전해 준답니다. 아니 전해주는 것 같이만 생각되지요.(1939년 인터뷰 기사 중에서)"

이난영은 1916년 6월 6일 당시 주소로는 목포부 양동72번지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에 대해서는 '죽교동'이라는 일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호적과 이난영 자신의 초등학교 학적부 등을 확인한 결과 태어난 곳과 어릴 적 거주지는 모두 목포 양동이었음이 밝혀졌다.

필자는 이난영의 태생지가 목포 양동이었다는 점에 더욱 주목한다. 이난영의 어릴 적 거주 지역이 이난영이라는 불세출의 가수를 탄생시킨 하나의 배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당시 목포는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일본인 마을과 조선인이 거주하는 조선인 마을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이난영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조선인 마을 중에서도 외국인 선교사들이 주로 거주하던 '양동(陽同)'이었다.

'양동'은 1897년 목포개항 이후 전라도 선교를 위해 들어온 교회 선교사들이 터를 잡고 활동하였던 곳으로, 이 일대에 전남 최초의 교회인 양동교회, 최초의 여학교 정명여학교, 최초의 의료시설인 목포병원 등이 설립되었다. '양동'이라는 지명 자체가 서양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이난영이 살았던 양동은 외국인을 자주 접할 수 있고, 서양식 교회, 병원, 학교 등이 들어선 당시로서는 아주 특수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 철거전 이난영 생가 사진. 굉장히 비좁은 골목과 좁은 터로 인해 생가를 복원하여 공원으로 만들려는 목포시의 계획이 무산되었다. 현재는 주변에 소방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생가터는 소공원으로 조성되었다.
ⓒ '추억의 노래모임' 제공
이난영이 어린 시절 동네에서 흘러나오는 축음기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적 감수성을 키워나갔다는 구전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서양인들이 근처에 다수 살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당시 목포의 조선인 마을 가운데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신식 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장소는 양동이 유일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이는 근대 문물의 변화가 역동적이었던 목포라는 항구 도시가 지닌 문화적 배경과 함께 가수 이난영이 기존의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크게 다른 대중가요 가수라는 신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든 하나의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지난 2002년 이난영의 생가터(목포시 양동)에 조성된 이난영 소공원의 모습.
ⓒ 최성환
이난영의 본명과 어린 시절

이제 이난영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보자. 이난영의 어린 시절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는 북교초등학교의 학적부와 당시 호적이 거의 유일한 자료가 될 것 같다. 한동안 목포시에서조차 이난영의 호적이나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었는데, 그의 본명이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난영(蘭影)'이라는 이름은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지은 예명이다. '난영'이라는 예명을 지어준 사람에 대해서는 태양극단(태양극장)의 박승희 단장이라는 설과 후에 가수로 성공시킨 OK레코드 이철 사장이라는 설이 있다. 정황으로 봐서는 태양극단 시절에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본명은 '옥례(玉禮)'로 알려져 왔다. 이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 학적부와 목포시 호적에서 확인된 기록상 그의 이름은 '이옥순(李玉順)'이었다. 아버지의 이름과 동일한 글자(順)를 자녀 이름으로 사용했을 것 같지 않은데, 호적에 올릴 당시 기록원이 실수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오빠인 이봉룡의 호적에는 이름이 '옥례'로 수정되어 있다. 오빠인 이봉룡 역시 연예계 활동 당시에는 '이봉룡(李鳳龍)'이라는 한자를 사용했는데, 호적에는 쓰기 편한 '용(用)'자로 기록되어 있다. 예전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런 혼란이 그동안 '이난영'의 호적을 쉽게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였던 것 같다. 이난영의 이름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옥순玉順(호적상 이름)-옥례玉禮(본명)-난영蘭影(연예계 활동후 예명)

필자는 고향에서의 이난영에 관한 작은 기록이라도 찾아볼 마음으로 북교초등학교 학적부 보관실을 방문하여 이난영이 초등학교에 다녔을 법한 시기의 기록을 모두 뒤졌다. 1916년생이니 정상적이라면 1924년부터 1927년 무렵에 학교를 다녔을 것으로 보고 관련 기록을 찾았는데, 처음에는 이옥례라는 본명으로 찾다 보니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 그의 아버지 이름이 이남순(李南順)이었다는 점을 가지고 최종 확인한 결과 이난영의 학적부가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름은 앞서 밝힌 대로 이옥순으로 되어 있다. 이후 이 학적부의 기록된 주소와 가족관계를 토대로 목포시에 보관된 호적기록도 찾을 수 있었다.

이난영의 학적부에서 하나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난영이 다닌 것으로 알려진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의 학적부가 아닌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와 관련된 내력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하고 넘어가겠다. 현 목포북교 초등학교의 전신인 목포공립보통학교에는 1908년 12월 무안읍교육부인회에서 목포사립여자학교를 목포보통학교에 합병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여자부가 설치되었다. 이렇게 해서 남·녀 학생이 공학하게 되었으나, 학생 수가 매년 증가해 가자 여자만을 위한 학교를 분리·독립할 필요가 생겼다.

이에 지방민들이 진정하여 1923년 4월 목포 북교동 131번지에 별도의 교사를 신축하여 우선 여학생들을 이곳으로 옮기고 다음해인 1923년에 여자 보통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어 여학생을 위한 보통학교가 탄생했다. 이난영은 1923년에 바로 이 여자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 이난영이 다녔던 목포공립보통학교 여자제강부의 수업장면. 여성들에게 기술 교육을 시행하는 모습이다. 이난영도 이런 학교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학교를 그만둔 후 목포 면화공장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 목포북교초등학교
그러나 여자보통학교는 개교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1928년에 다시 목포공립보통학교와 통합돼 합병폐교하게 되었다. 폐교하게 된 이유는 학교에 불이 난 이후 교사를 재건할 비용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목포의 원로들도 이 여학교의 존재를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다. 지방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난영이 바로 이 학교를 다녔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학교가 불이 났음에도 이난영의 학적부가 현 북교초등학교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북교초등학교의 당시 모습. 이난영이 다니던 공립여자보통학교가 이 학교와 통합되어 관련 학적부가 현재 목포북교초등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 1932년 목포사진지 중에서
이난영의 가족관계와 초등학교 자퇴

학적부와 호적을 토대로 가족관계를 정리해 본다. 아버지는 이남순(李南順), 어머니는 박소아(朴小兒)이고, 2살 연상으로 오빠 이봉룡(李鳳龍)이 있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데, 이난영의 초등학교 학적부에는 직업이 철공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난영에 대해 회고문 형식으로 기록한 각종 가요사 책자를 살펴보면 대부분 이난영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다고 묘사되고 있다. 그 때문에 가정이 원만하지 못했고, 어머니가 먼저 집을 나갔다는 식으로 전하고 있다.

지금으로서 그러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비록 자상하지 못했던 아버지였다고는 하나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가수로 활동을 시작한 이난영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항상 애틋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한 추억을 가진 아버지 이남순은 이난영이 가수의 길에 들어선 무렵인 1933년 8월 26일에 사망하였다.

이후 이난영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가 담긴 '아버지는 어데로'라는 곡을 발표(1936년, 손목인 작곡, 신불출 작시)하기도 한다. 노랫말에 '유달산'이라는 고유 지명이 등장하여 이 노래가 이난영의 아버지를 애도하며 부른 노래라는 암시를 준다.

어머니는 이난영이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폭압에 못 이겨 집을 나가 제주도로 떠난 것으로 구전되는데, 이봉룡의 호적에는 어머니가 1950년 11월 3일 목포시 양동 72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사이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이난영은 초등학교 시절 1학년과 3학년 때 각각 재수(再修)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를 다니기 어려웠던 것 같다. 학적부에는 3학년 때까지의 성적표가 기록되어 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인지 교과목의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음악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 창가(唱歌) 과목은 9점을 맞아 다른 과목에 비해 훨씬 좋은 점수를 받았다. 이때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초등학교 시절 이난영의 학적부 기록. 목포공립여자 보통학교를 3학년까지 다녔고, 중간에 2번 휴학을 했다. 1929년에 자퇴한다.
ⓒ 최성환
학교를 다닐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던 이난영은 결국 4학년 때 자퇴 원서를 제출하고 학교를 중퇴한다. 자퇴사유에는 거주지 이전이라고 되어있다. 이는 이난영이 제주도로 떠난 어머니를 찾아갔다는 근거가 될 것 같다. 원로 작곡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난영을 오빠인 이봉룡이 어머니가 있는 제주도로 보냈다고 한다. 자퇴원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자퇴원서 제출자인 보호자란에 이름은 아버지인 이남순이라고 적혀있으나, 도장은 이봉룡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동의 없이 오빠가 동생의 장래를 위해 결정을 내린 것이다.

▲ 1929년 이난영의 자퇴원서. 거주지 이전을 이유로 자퇴한다고 되어 있고, 이난영의 오빠인 이봉룡의 도장이 찍혀있다.
ⓒ 최성환


<다음 글에서는 이난영이 데뷔한 태양극단과 이난영의 인연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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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인문한국 교수, 다도해와 목포항의 역사, 스토리텔링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