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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가수 '이난영(李蘭影, 1916~1965)'이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거나 그가 남긴 가요계의 업적이 칭송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화인물로서 그를 바라보고 싶고, 지역의 문화자원으로서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 지닌 가치가 소중하게 활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지방자치시대가 열린 이후 전국은 각 지역을 상징할 수 있는 매개체를 개발하기 위해 앞 다투어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인물=지역"이라는 이미지 공식을 성립시키기 위한 노력이 다방면에서 시도되고 있다.

현시대는 어느 지역하면 순간적으로 연상되는 문화코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가수 '이난영'은 호남권 특히 '목포시'에게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1935년에 그가 불렀던 노래 <목포의 눈물>은 목포를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코드이다. 나이 지긋한 한국 사람이라면 <목포의 눈물>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동시에 목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심지어 최근 북한에서 개최되는 각종 기념공연에서도 <목포의 눈물>은 불려지고 있고, 북측동포들의 많은 갈채를 받고 있다.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은 분단의 세월을 넘어 남과 북의 공감대를 형성시켜주는 문화자원이기도 하다.

▲ 유달산에 세워진 목포의 눈물 노래비와 이난영.
ⓒ 최성환
그러나 정작 가수 '이난영'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너무나 빈약하다. 문학인이나 미술가였다면 이미 그에 대한 연구 논문이 수십 편은 발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가수'를 예술가가 아닌 '딴따라'로 취급해 온 그동안 우리문화계의 풍토상 '가수 이난영의 삶과 예술세계'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거나 글로 정리되지 못해왔다. 역사를 공부하는 필자 역시, 대중 가수를 주제로 논문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난 2002년 목포에서는 이난영 음반자료를 중심으로 '이난영 추모 전시회'가 개최된 적이 있었다. 필자가 당시 전시회를 준비했는데, '이난영'에 대한 간단한 소개문이나 연보를 작성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존에 '이난영'에 대해 소개된 자료마다 그 내용이 제 각각이고, 연보도 통일성이 없었다. 심지어 고향인 목포시에도 '이난영'에 대한 자료가 전무했고, 변변한 사진자료 하나 확보되어 있지 못했다. 이 때부터 '이난영'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봐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껴왔지만, 아쉽게도 지금까지 이렇다할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 이난영 추억의 노래 앨범자켓
ⓒ 최성환
최근에 목포에서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이난영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그의 묘지를 경기도 파주에서 고향인 목포로 이전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각종 기념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일제강점기 유행가 가수들에 대한 문제가 도마에 올라있는 상황이라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난영'의 경우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사 1차 명단(2005년 8월 발표)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그 역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난영과 부부관계를 맺었던 작곡가 '김해송'과 가수 '남인수' 두 사람은 모두 친일인사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흔히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 크게 성공하면서, 일제강점기라는 특수 체제하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굴곡이 심했고, 한 여인으로서는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 지금도 이난영의 죽음을 놓고 자살설이 난무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때문에 '이난영'에 대한 연혁을 정리하는 일이 더 절박해졌다. 이점이 부족하지만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이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 주기적이고 체계적인 글을 써낼 자신이 없지만, 우선 시작해본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연재를 통해 '이난영'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평가 등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해 지기를 기대한다.

가수 이난영 주요연보

1916년 6월 6일 목포 양동72번지 출생.
1923년 현 북교초등학교 입학, 1929년 4학년 때 가정형편으로 중퇴.
1933년 9월 태양극단 시절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꿈> 녹음.
1933년 10월 OK레코드사 <향수(鄕愁)>, 11월 <불사조> 취입 가수 데뷔.
1934년 2월 <봄맞이>로 인기를 얻기 시작.
1934년 일본 동경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에 한국인 대표로 출연.
1935년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의 눈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음.
1936년 7월 오까랑꼬(岡蘭子)라는 예명으로 일본가요계 진출.
1937년 11월 김해송(金海松)과 결혼.
1937년 12월 <해조곡> 대히트 기록.
1939년 1월 문일석 작사, 이봉룡작곡, <목포의 추억> 발표.
1939년 남편 김해송의 블루스 곡 <다방의 푸른꿈>으로 전성기를 맞음.
1942년 오빠 이봉룡 작곡 <목포는 항구다> 대히트.
1946년 12월 남편 김해송과 뮤지컬 전문쇼단 KPK악극단 창단 활동.
1958년 <목포의 눈물> 영화제작, 하한수 감독, 전옥 주연, 십만 관중 동원.
1959년 '김시스터스'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시작.
1962년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감. 1년 정도 생활하다 귀국.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장례식.
1969년 시민 기금으로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 건립.
1986년 10월 1일 사후21년 만에 목포시 '시민의 상(교육문화부분)' 수상.
2003년 목포 양동 이난영 생가에 소공원 조성.
2004년 목포문화연대 측에서 이난영 묘지 이전 및 추모사업 제안.
2005년 목포에 이난영 기념사업회 발족.
2005년 이난영 유가족들과 묘지 이전 및 기념사업 협의.
2006년 3월 묘지 이전, 유가족 초청 추모 콘서트 등 예정.

덧붙이는 글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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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인문한국 교수, 다도해와 목포항의 역사, 스토리텔링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