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보성녹차밭으로 가는 길목 삼나무길
ⓒ 김선화
청명한 가을날, 코스모스 한들한들 바람에 날리는데 정작 집 밖을 나서지 않는 부시시한 일상은 따분하기 짝이 없다. 하루종일 울리지 않는 핸드폰이 웬일인지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진동으로 해놓은 핸드폰이 디리릭 디리릭 나름대로 신호를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첫사랑의 설렘처럼 가슴이 콩닥 뛸 만큼 반가운 전화가 올 리가 있겠는가, 카드 연체 아니면 보험 가입하라는 전화겠지 싶어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와 아이만 갈 수 있는 여행인데 어떠세요?"

1초의 망설임 없이 "꼭 갈 수 있어요" 했다. 곱게곱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선 아들을 얼싸안고 한참을 빙빙 돌았다. 이번 여행은 전라도 보성차밭을 경유하여 흙빗기 체험과 낙안읍성 민속마을이란다.

전라도 지역은 가 본 적이 없어 우선 여행지부터 맘에 들었고,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여행이라서 1초의 망설임도 필요가 없었다. 보성차밭은 남들이 다녀온 사진으로만 실컷 보았지, 정작 내 눈으로 가 보지 않아서 그 푸르름을 꼭 보고 싶었다. 이런 우리 모자에게 차밭을 보여준단다.

▲ 사랑의 하트를 녹차밭에서
ⓒ 김선화
보성에 도착해서 녹차 정식의 웰빙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서울보다 날씨도 따뜻한 것 같았고 인심도 좋았다. 반찬 수가 가지 가지라 젓가락이 어디로 먼저 가야 할지 몰랐다. 밥 한 톨 남김 없이 아들도 깨끗이 비워버렸다. 새벽 일찍 내려온 탓도 있고 전라도 음식이 맛깔나다는 것을 아들도 눈치 챈 모양이다.

식사후 따뜻한 녹차 한 잔은 후한 인심만큼이나 따뜻했다. 점심식사 후 도착한 녹차밭의 입구는 정말 멋졌다. 삼나무가 쭉쭉 뻗어 있는 초록색의 융단은 장관을 이루었다. 여름 싱싱할 때 왔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가을빛에 우람하게 서 있는 삼나무 길은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데 손색이 없었다.

자연 속으로 퐁당 빠져버린 기분이 든다.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녹차밭에 도착 했는데 아들이 "우아~~우아~~" 소리를 질렀다. 잘 다듬어놓은 녹차 고랑길이 한도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겨울 준비를 하려는지 연보라 색깔도 눈에 띄었다. 비좁은 방안에서 바싹 말라버린 티 녹차만 홀짝거렸던 녹차의 향도 인심좋게 마셨는데 이렇게 녹차 기운이 가득한 차밭에 와보니 녹차를 배불리 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엔 멋진 차밭을 남편에게 꼭 보여줘야 하겠다.

▲ 찰흙으로 작품만들기 준비완료
ⓒ 김선화
녹차 차밭을 돌아나와서 부근에 도자기 체험학습장으로 갔다. 일본 국보가 된 조선사발과 보성분청사기 체험을 할 수 있는 학습장이었다. 잘 익은 찰흙을 내어주면서 빚어보란다. 도재 송기진 선생님의 설명을 따라서 찰흙을 치대면서 반죽을 하였다.

신이 난 아들도 한움큼의 찰흙을 가지고 있는 힘껏 찰싹찰싹 내리쳤다. 반죽을 잘 해야 모양을 빚을 때 흙이 부서지지 않고 잘 붙는다고 했다. 몇 덩이의 찰흙으로 찻잔도 만들고 막사발도 만들고 이름모를 형체도 몇 개나 만들어보았다. 직접 만든 도자기를 택배로 부쳐주기도 한단다. 신청은 언제든지 가능하고 대신 택배는 착불이다.

이렇게 찰흙놀이를 얼마만에 해보았던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 시골 친구들과 소매에 반들거리는 코를 닦으면서 진흙놀이를 해보고는 30년의 세월이 훌딱 지나버린 것 같다. 찰흙을 내리치다가 얼굴을 '쓰윽~' 문질렀는지, 아들의 코밑이 찰흙으로 팩을 하고 있었다. 일부러 진흙팩을 하기도 하는데 이참에 우리 아들 피부 하나는 끝내주게 번들거리게 생겼다. 부지런을 떠는 모습에서 얼마나 신이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 수박바 맛이 어떠하냐?
ⓒ 김선화
장난 기 가득한 아들은 결심한 듯 신중하게 무엇을 만들었다. 엄마가 도와준다고 해도 한사코 비밀리에 만들더니 드디어 완성품을 내놓았다. "짜~~잔" 하고 들이댄 작품이 바로 '수박바' 란다. 옆에 같이 온 엄마들도 깔깔 웃고 같이 온 형들도 깔깔거렸다.

▲ 물레방아를 돌리는 모자
ⓒ 김선화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다듬기 도구로 수박바 손잡이까지 완벽하게 완성시켰다. 송기진 선생님께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체험학습장을 찾았지만 수박바를 완성한 사람은 우리 아들 혼자란다. 옆에 형도 한 입 주고 송기진 선생님도 한 입 베어물고…. 우리는 찰흙 수박바를 맛있게 먹는 흉내를 내었다. 아들 덕에 체험장 안이 웃음바다로 변하고, 아이들도 엄마들도 모두가 행복해 하는 얼굴이라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찰흙빚기가 끝나고 드디어 물레방아를 체험하게 되었다. 사랑과 영혼을 너무 많이 봐왔기에 돌아가는 물레방아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아들과 나란히 안아서 손에 힘을 몽땅 빼고 돌아가는 속도에 맞추어서 손만 올려놓으란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이 어린아이 볼살처럼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물레를 돌리는 속도에 맞추고 손을 좁고 넓게 움직이면서 사발도 만들고 찻잔을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들뜬 마음 자세가 아니라 한없이 평온한 침착함이란다. 한순간만 방심하면 엉뚱한 모양이 되어버리기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했다. 맘을 한 곳에 모으고 장인의 정신처럼 최고의 작품을 만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물레방아를 돌려보았다.

▲ 도자기 체험장 주변 배경
ⓒ 김선화
바깥은 도자기를 구울 수 있게 장작불을 넣는 곳이 있었다. 주위엔 장작 나무들이 즐비하였고 옆에는 깨어진 도자기 그릇들이 잘게잘게 부서져 있었다. 굴 속에도 들어가보고 체험장 안에 놓아둔 사발들을 만져도 보았다. 손으로,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어서 너무 좋은 것 같다. 내 아이와 나는 이번 여행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촉감으로 전해오는 옛선조들의 기품을 조금은 느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오는길에 찻잔 두 개를 품에 안겨주었다. 부부가 찻잔으로 사용하란다. 녹차잎을 동동 띄우고 그윽하게 향기 맡으며 이 잔에다 마셔봐야지.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죄인 되다
ⓒ 김선화
도자기체험학습장을 나와서 순천으로 이동을 하였다. 마지막 코스인 낙안읍성마을에 도착을 하였다. 아침일찍 서둘러서 여기저기 돌았건만 해는 벌써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순천시 낙안면에 소재한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넓은 평야지에 축조된 성곽으로 성내에는 관아와 100여 채의 초가가 돌담과 싸리문에 가려 소담스레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옛 고을의 기능과 전통적인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는 서민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현재85세대 229명이 살고 있음)에도 보고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전통문화로서, 낙안읍성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용인민속촌이나 제주민속마을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데 낙안읍성마을엔 주민이 살아서 각종 토산물(지역 농산물)을 팔기도 하였다.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죄인 앞에서 죄인 흉내도 내어보고 "매우 쳐라~~ 아악~~" 하고 소리도 내보았다. 죄인들이 거짓 증언을 했을 때, 죄인을 추궁하는 장소인가 보다. 아들도 매우 치고 엄마는 열심히 맞고 그렇게 성안을 둘러보았다. 아들이 살살 때리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건만 있는 힘껏 나를 내리쳤다. 아들의 회초리가 생각보다 따끔거렸는데 겉으론 웃었더니 아들이 더 내리쳤다. '아, 웃지 말 걸'.

▲ 지게에 모든 시름 지고서 날려버리자
ⓒ 김선화
성을 도는데 지게를 보더니 신기한지 자기도 한 번 져보고 싶다고 했다. 아들 몸보다 무게도 더 나가고 키도 큰데 감당을 할 수 있나 모르겠네. 한 발짝 떼더니 힘에 부친지 그저 생글생글 웃기만 하고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고 따져물었다. 균형잡기가 힘들었는데 알고보니 한쪽 지게날이 부러져서 기우뚱 하였다. 열심히 지게를 져보고는 혓바닥을 낼름 내보이는 아들이다.

좀 더 크면 이 엄마도 태울 수 있겠지. 지게를 보니 우리 아버지가 생각났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지게에 태워준 기억이 난다. 내가 어릴 적엔 짐을 올리고 내리는데는 지게만한 운송수단이 없었다. 두 개의 지게발 위에 나란히 발을 놓으면 아버지의 걸음걸이에 따라 출렁 거려 신이 났던 기억이 났다.

자동차보다 더 신나고 놀이기구보다 더 재미 있었던 지게타기를 언제 또 할 수 있으려나 시간을 꺼꾸로 돌릴 수 있다면 내 아버지랑 지게타기 놀이를 할텐데. 아련한 생각에 잠시 머무는 동안 옆에 사람의 도움으로 내 아들을 지게 위에 앉게 했다.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들은 엄마 보고 걸어보라고 한다. 몇 발짝 못 가서 아들은 내려오고 말았지만 친정아버지가 태워준 그 기분을 아들은 반도 느끼지 못했으리라. 지게에 얽힌 아버지와의 추억을 나중에 우리 아들에게 들려주어야겠다.

▲ 죄인압송 퍼레이드 모습
ⓒ 김선화
우리가 갔을 때 죄인 압송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옛날 복장 차림의 수많은 사람들이 죄인을 나무옥에 가두고 거리에서 사람들이 돌로 치는 죄인 압송 퍼레이드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들도 스폰지 돌을 던져보더니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 궁시렁대었고, 더 큰 스폰지 돌로 힘차게 던져 죄인 발목에 적중했는데 죄인이 아프다고 한바탕 난리를 부렸다.

물감으로 시뻘겋게 분장을 한 모습도 헝클어진 머리칼도 직접 만져본 아들이 수문군아저씨랑 악수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짚신과 옛날 복장이 신기한지 아들은 굳이 짚신을 신어보겠다고 한다. 보아하니 짚신이 얇고 닳아서 테이프로 붙여 신고 다녔다. 현대식 신발이 아닌 짚신 체험도 할 수 있어서 아들은 좋은가 보다.

▲ 5백년 추정되는 은행나무에서 아들과 찍다
ⓒ 김선화
큰 노거수 300~600백년 정도 된 나무들이 32그루가 있는데 은행나무 아래서 아들과 찍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을 지켜주고 바람을 지켜주는 노송이 그 자태만으로도 얼마나 숭고한 세월을 살았는지 짐작이 갔다. 500~600년을 우리가 살 수는 없지만 노거수처럼 무게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너무 조급하게 살지 말며, 또 너무 나태하게도 살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 같았다.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처럼 순리대로 살아주길 원하는 노거수를 보니 고된 세월 속에 여유가 느껴졌다. 초가지붕 이엉잇기가 한참이었는데, 11월 15일부터 주중 주말에 상관 없이 지붕을 잇고 있다고 했다.

다양한 문화체험도 할 수 있고 직접 수문복장을 입고서 체험할 수 있어서 아이들과 오기 적합한 것 같다.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었던 이번 여행을 하면서 좁아진 시야가 많이 넓어진 것 같았고, 하루종일 아들의 종알거리는 질문에 바로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미안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미리 공부 좀 하고 갈 껄 하는 아쉬움이 컸다. 여행이란 거창하게 많은 경비가 들지 않고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길이 많은 것 같다. 그저 여행을 간다고 하면 부담부터 들었는데, 낯선 곳의 새로운 볼거리가 내 생활에 큰 활력을 줄 것 같다.

아들과 둘이 떠난 여행에서 값진 추억을 얻었다. 호기심 가득한 아들의 눈망울에도 모처럼 떠난 엄마의 마음 속에도 알찬 추억 여러 개가 살포시 자리를 잡았다.

 

덧붙이는 글 | 추가설명

전남 보성은 우리 나라 녹차의 40 % 정도를 생산하는 차의 고장이다. 보성읍에서 18번 국도를 따라가면 황성산 자락을 넘는 봇재를 이른다. 길 양쪽에 10 곳의 녹차밭이 펼쳐진다. 

여의도 면적의 3 배나 되는 84만 평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차밭이 모여 있는 곳이다. 대한다업ㆍ동양다업ㆍ보성영농조합 등에서 연간 200여 t의 차를 생산한다. 녹차는 1년에 서너 번 잎을 딴다. 4월 중순에서 5월 초에 따는 어린 잎을 으뜸으로 친다. 

우전차ㆍ곡우차ㆍ세작차는 모두 햇찻잎이다. 중작이나 대작은 햇차처럼 손으로 일일이 따지만 잎이 좀 거칠다. 더워지는 7월에는 떫은 맛이 강해 주로 엽차용으로 쓴다. 이때는 기계로 찻잎을 딴다. 문의 보성다원(daehantea.co.kr) 061-852-2593 

▲대중 교통=광주 시외 버스 터미널에서 30 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보성행 직행 버스(1 시간 30 분). 보성읍에서 30 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율포행 군내 버스 이용(15 분). 
▲승용차=호남고속도로를 이용, 동광주 IC를 나와 광주 제2순환도로-화순-29번 국도-보성읍-18번 국도

- 도자기 체험학습장의 전화번호는(061-853-0158)

낙안읍성 민속마을

낙안읍성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이곳은 삼한시대 마한땅, 백제때 파지성, 고려때 낙안군 고을터며, 조선시대 성과 동헌(東軒), 객사(客舍), 임경업장군비, 장터, 초가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성과 마을이 함께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에 지정된 곳이다.

조선태조6년(1397)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아 방어에 나섰고 300년후 인조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33세때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했다. 이 낙안읍성은 다른 지역성과는 달리 넓은 평야지대에 1∼2m 크기의 정방형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이 4m, 너비 3∼4m, 성곽 총 길이가 1410m로 동내, 남내, 서내등 4만1천평에달하는 3개 마을 생활근거지를 감싸안은 듯 네모형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어 400년이 가까운 지금도 끊긴 데가 없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도 성안에는 108세대(279명)가 실제 생활하고 있는 살아숨쉬는 민속 고유의 전통마을로서 민속 학술자료는 물론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지역번호 모두 061 이다.

낙안사삼주 제조장 754-2517 낙안읍성민속마을 안내 749-3347.749-3893
낙안읍성내 민악 정원애(754-3389) 김옥금(754-2648)
김연성(754-3498) 조영남(754-2853) 김맹덕(754-6644)
송효종(754-2510)
맛집 성내 난전식당1호(754-6589)난전식당2호(754-6912) 대양식당(857-0343벌교)
가는길 호남고속도로-주암나들목-27번국도-송광사앞
http://www.nagan.or.kr 자세한 내용은 낙안읍성 민속마을 홈페이지에 들어오면 상세히 설명이 나와 있어요.

11월여행이벤트 응모합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