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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9일 전북 순창에 있는 회문산의 하늘은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회문산 입구의 민박집을 출발하는데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낮게 내려앉은 검은 구름이 금방이라도 쫙쫙 소나기를 내려 퍼부을 것 같았지만 모두들 우산을 받쳐 들고 산으로 향했다.

▲ 빨치산사령부 입구 옆에 있는 부조
ⓒ 이승철
회문산 쪽을 바라보니 높은 곳은 온통 구름에 덮여 있고 좆박골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휴양림 골짜기는 그런 대로 짙은 녹음 속에 밝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일단 빨치산 사령부가 있던 곳까지라도 가보기로 하고 내가 앞장을 섰다.

휴양림 매표소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개울을 건너 노령문이다. 노령문 오른쪽으로 출렁다리가 걸쳐 있다. 다리 아래는 개울물이 바위 위를 구르는 구룡폭포다. 조금 전까지 많은 비가 내려서인지 시원하게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흐르는 물줄기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한다.

다시 왼쪽 길을 따라 걸었다. 개울 좌우에는 근래에 세워진 듯한 임대용 목조가옥들이 산뜻한 모습이다. 다시 비가 후두둑 후두둑 굵은 빗방울로 변하였다. 큰 나무 밑에서 잠시 기다리노라니 다시 빗줄기가 가늘어진다.

▲ 회문산 가는 길에서 본 옥정호( 회문산 일대를 둘러싸고 있음)
ⓒ 이승철
“이거 오늘 등산은 안 되는 거 아냐? 하늘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데….”
“그래도 가는 데까지 가 보는 거지 뭐. 비가 너무 많이 쏟아지면 그냥 내려오기로 하고….”

나이는 어쩔 수가 없나보다. 젊은 시절에는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을 뚫고도 등산을 잘도 하였는데, 그래도 아직 돌아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제법 많은 비가 쏟아지는 빗속으로 일행은 앞으로 나아갔다.

비는 변덕스럽게 오락가락 하였다. 잠깐 내리다가 금방 그치기를 반복하여 우산을 폈다가 금방 또 접기를 반복하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휴양림 입구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였다. 사방용 둑을 지나니 왼편에 옛 빨치산 사령부를 재현해 놓은 벙커가 나타났다.

어둑한 입구에는 빨치산 병사가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섬뜩하다. 전등을 켜고 안으로 들어가니 벙커 내부는 목재 모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든 사각형의 지하실이었다.

▲ 빨치산 사령부 내부 모습
ⓒ 이승철
첫번째 오른편 작은방에는 지휘부의 작전회의를 하는 장면이 연출되어 있고, 복도를 사이에 둔 양편에는 산죽을 깐 바닥에서 옷을 깁거나 장비를 보수하는 병사의 모습과 쓰러져 잠든 모습 그리고 그 시절 그들이 사용하던 수통이며 그릇 등 장비가 초라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상하네, 이런 낮은 산 입구에 빨치산 사령부가 있었다니….”
“아닐 거야. 진짜 사령부는 이곳이 아니고 훨씬 더 높은 곳이었겠지.”
“소설 남부군에서 보면 회문산 정상에서 투구봉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고 읽은 것 같은데….”
“맞아 그랬을 거야. 그들이 바보들이 아닌 담에야 이렇게 산 입구에 사령부가 있었을 리가 없지.”

모두들 나름대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이야기들을 나눈다. 밖으로 나오니 왼편에 빨치산을 상징하는 부조가 세워져 있다. 총을 겨눈 병사와 무언가를 이고 진 양민들의 모습이다. 그 밑으로는 쓰러진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 빨치산사령부 입구
ⓒ 이승철
“우리 친정어머니 말에 의하면 그 시절은 너무 끔찍했대요.”
“친정이 이쪽이셨습니까.”
“저 산 넘어 쌍치면이었는데요, 그쪽도 여기와 마찬가지였답니다.”
“어떻게요?”
“저 사람들도 나중에 대부분 비참하게 죽었지만, 주민들의 고통과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답니다. 낮에는 국군과 경찰들이 이 지역을 장악하였지만 밤이면 산사람들이 내려와 그들의 세상이었대요.”
“산사람이라고요?”
“빨치산을 어머니는 그렇게 불렀습니다.”
“친정어머니 지금도 살아계십니까?”
“아니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살아계실 때 그 시절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산사람들의 요구로 밤새워 주먹밥을 만들어 새벽에 산으로 전달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하고 나오다가 국군이나 경찰에게 발견되면 빨갱이라고 처형당하고, 그들의 요구를 거스르면 반동분자라고 그들에게 당하고, 또 어떤 어머니들은 그렇게 주먹밥을 만들어가지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이동하는 그들을 따라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데요.”

밤과 낮이 다른 지역지배 구조 속에서 주민들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의 요구도 무시하거나 거스를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자유나 권리, 생명의 존엄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생사여탈권은 밤과 낮이 바뀌는 지배자들의 것이었던 셈이다.

▲ 회문산 자연휴양림
ⓒ 이승철
빨치산, 파르티잔(partisan)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다. 당원이나 동지 당파를 일컫는 말이지만 주로 유격대원이라는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에스파냐어에서 나온 게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빨치산은 정규군이 아닌 비정규군으로 주로 적의 배후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활동하는 현지의 지리에 밝아야 하고 지역주민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활동이 불가능한 특수성을 갖고 있다. 우리 나라 빨치산의 효시는 일제시대 항일 유격대원이다.

바로 이 회문산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면암 최익현 선생과 임실의 의병장 임병찬이 바로 그들이다. 전기 빨치산이 주로 항일 유격대원이었다면 후기의 빨치산은 6·25를 전후한 공산 게릴라를 지칭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빨치산은 공산주의자'로 획일화되고 말았다.

당시 이 지역 빨치산 사령부의 사령관은 전북도당 위원장이었던 방준표였다고 한다. 이 회문산에 지휘부를 두고 이택부대, 보위부대 등의 직속부대와 군당 부대 등 2천여 명의 빨치산이 이 회문산을 근거지로 게릴라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 6,25 양민희생자 위령탑
ⓒ 이승철
국군의 소탕작전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결국 지리산으로 옮겨가기까지 이 지역에서는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갔다. 주변을 돌아보니 온통 잡목들로 가득하다. 이 산의 특징 중의 하나는 소나무가 별로 눈이 띄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치열한 전투로 불타버린 나무들 중에서 잡목들만 다시 자란 탓일까?

“이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참 불쌍한 사람들이야.”
“그럼, 다 아프고 쓰린 역사의 희생양들이지…. 일본의 식민지배가 만들어 놓은 남북분단이 원인 아니겠어?”
“이곳에서 죽어간 빨치산들이나 국군, 양민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싸우거나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모두 시대를 잘 못 만난 탓이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경사도 심하지 않고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정상을 저만큼 앞에 둔 지점에서 발목이 삐끗하였다. 빗물로 미끄러운 산길에서 조심성이 부족하였던 모양이다. 도저히 더 올라갈 수가 없어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부득이 내려오기로 하였다.

▲ 빨치산들이 쓰던 물건들
ⓒ 이승철
절름절름 내려오는 길목 오른편 언덕에는 '6·25 양민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 산의 어느 능선 어느 골짜기에 가슴 아픈 죽음들이 잠들어 있을까? 비운의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들이 눈물이라도 흘리는 것일까. 역사의 슬픈 현장에는 또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시인이승철 을 검색하시면 홈페이지 "시가있는오두막집"에서 다른 글과 시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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