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이동순 외 <어디서나 보이는 집>
ⓒ 선
"진정 비물에 흘러가던 토성탕이 여기란말인가.
넝마를 줏는 어머니를 기다려
해질녘 진탕속에서 울며 섰던 그 시절에
사람은 살았어도
삶을 꽃피울수 없던곳이 여기란말인가,

아, 보통강이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개수공사의 첫삽을 뜨신
잊지 못할 5월의 그 봄날이 그대로
너의 아름다움으로 된 이 기슭에서
나는 락원의 주인으로 해빛속을 걸어가누나.
나는 행복한 사람으로 꽃밭속에 서있구나

슬픔과 원한이 흐르던 물결우에
사회주의강산이 비껴 찬란하고
감탕물이 밀려들던 이 가슴속에
충성의 더운 눈물이 고이고 또 고이는
5월의 보통강!

아, 나의 삶,
인민의 발걸음이 수놓아질 이 봄을 가꾸시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첫삽을 뜨시였구나
보통강의 5월을 꽃피우신
사랑의 첫삽을!"


- 163~4쪽, 홍현양 '보통강의 5월이여' 몇 토막

지금은 그나마 세월이 참 좋아졌다. '위대한 수령님'이란 낱말이 담긴 북한문학작품을 이렇게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불과 십 몇 년 앞만 하더라도 이같은 북한문학작품을 읽거나 출판하거나 책만 가지고 다녀도 뺄갱이로 낙인 찍혀 곧바로 서슬 퍼런 국가보안법에 걸려 모진 고문 끝에 철창 신세를 지기 일쑤였다.

위에 적은 시는 북한의 대표적 문예지 <조선문학>에 실린 시다. 1976년 5~6월호 <조선문학>에 실린 이 시는 1970년대 수령 형상화라는 큰 틀 속에서 창작되어진 북한문학의 속내를 고스란히 엿보게 한다. 이 시에 나오는 '위대한 수령님'과 '어버이수령님'은 당연히 김일성이다.

시인은 비만 오면 마구 쓸려내려오던 흙탕물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었던 보통강을 손질하기 위해 "개수공사의 첫삽"을 뜬 김일성에 대한 찬사를 아낌없이 늘어 놓고 있다. 김일성 때문에 "사람은 살았어도/ 삶을 꽃피울수 없던곳", 보통강이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낙원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가만히 회고해 볼 때 그동안 표면적으로는 북한문학에 대한 관심과 애착을 일견 가지는 듯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수용의 자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거부와 단절을 전제로 한 소극적이고도 제한적인 어정쩡한 접근이었던 태도를 철저히 반성해야만 한다."- '책머리에' 몇 토막

영남대 국문과 교수이자 시인 이동순(56)과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북한문학팀(박승희, 김석영, 곽은희, 박영식, 서민정, 하정숙, 김진아)이 1970년대 북한의 대표문학작품을 소개하고 정밀하게 분석한 북한현대대표문학선집 <어디서나 보이는 집>(도서출판 선)을 펴냈다.

632쪽이나 되는 두툼한 이 책은 이동순 민족문화연구소장과 북한문학연구팀이 지난 3년에 걸쳐 백여 차례의 세미나와 집중토론을 한 끝에 일구어낸 알찬 수확이다. 이동순은 이번 작업을 통해 "낯설기 짝이 없었던 북한의 시, 소설 작품들이 결코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궁극적 수용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리용악의 '어느 한 농가에서', 오영재의 '오직 한 마음', 조벽암의 '농장의 새 딸 순이', 동기춘의 '땅은 흙이 아니다' 등 40편의 대표시와 김수범의 '열정', 서정호의 '첫 공연', 최창학의 '사랑의 길' 등 9편의 대표소설, 박승희의 '수령의 시대, 70년대 북한시의 행방', 박영식의 '소설 작품 해설' 등 8편의 작품해설 및 논문이 그것.

특히 이번에 소개된 북한문학작품들은 1968년부터 1978년까지 11년 동안 북한의 대표적 문예지 <조선문학>에 실린 시와 소설 중 민족동질성 회복에 도움이 될만하다고 여겨지는 작품을 가려뽑았다. '천리마 대고조기'에서 수령 형상화라는 '주체시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씌여진 북한의 대표적 문학작품이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그이께서
몸소 인민을 존중하시고
인민의 리익을 제일생명으로 여기시는
훌륭하고도 지중한 산모범을
누구나가 혁명생활의 거울로 삼고있으며
숭고한 그 정신을 군률로 삼기 때문에

원쑤들에게는 사자처럼 용맹하고
범처럼 무자비하면서도
인민들앞에서는 순하디순한 양과도 같이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줄 아는
김일성장군님의 참된 전사들!"


-22~3쪽, 리용악 '어느 한 농가에서' 몇 토막

박승희 교수는 '수령의 시대, 70년대 북한시의 행방'이라는 논문에서 "주체시대로 접어들면서 북한문학은 수령 형상화란 주된 흐름 속에서 문학의 방향을 수령 그 자체에 두게 된다"고 말한다. 수령은 곧 민족 해방을 위한 인민의 구원자로서 문학의 전형이자 삶의 지침이라는 것이다.

시인 이동순은 누구인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평론 당선

▲ 시인 이동순
ⓒ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냉전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해묵은 이념논쟁이나 사상의 선명한 색깔 구분은 예나 제나 현대사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이다." -'책머리에' 몇 토막

시인 이동순은 195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왕의 잠'이,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개밥풀> <물의 노래> <지금 그리운 사람은>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철조망 조국> <꿈에 오신 그대> <봄의 설법> <가시연꽃> <기차는 달린다> <아름다운 순간> <그대가 별이라면>이 있으며, 민족서사시 <홍범도>를 펴냈다.

문학평론집으로는 <민족시의 정신사> <시정신을 찾아서> <시와 시인 이야기> <한국인의 세대별 문화의식>이 있고, 여행서 <시가 있는 미국기행> <실크로드에서의 600시간> 등 여러 권이 있다.

지금 영남대 문과대학 국문과 교수를 맡고 있는 시인은 제5회 '신동엽창작기금', 제1회 '난고문학상', 제15회 '금복문화예술상'을 받았다. / 이종찬 기자
박 교수는 "주체사상은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임을 주창하는 사상"임이 분명하다고 못박는다. 하지만 인민대중은 수령형상화라는 큰 틀 속에서 바라보면 "수령의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민대중일 뿐"이라고 꼬집는다. 즉, 인민대중이 인민해방의 주체가 아니라 "수령에 의해 인민해방이 실현" 된다는 것이다.

리용악의 시 "누구나가 혁명생활의 거울로 삼고있으며/ 숭고한 그 정신을 군률로 삼기 때문에"라든가 윤경자의 "오직 장군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가는 인민이 되고저/ 마음도 지혜도 하나로 합치며/ 언제나 밝아오는 래일에 살고있는 우리 마을"(이 편지를 씁니다) 등에서도 북한의 인민대중은 모두 수령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민대중이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열매는 어머니의 젖줄기만 빨아서 크는 것이 아니였구나. 따뜻한 해빛 아래서 그 빛발을 받아야만 싱싱하게 더욱 탐스럽게 무르익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기 자식을 참된 삶을 누릴 수 있게 의지적인 인간으로 키워주신 수상님께 뭐라고 고마움과 은혜를 말씀 올렸으면 좋을지 격동된 심정을 누를 길 없었다./ 만성로인은 위대한 수령님을 위하여 늙고 쇠잔한 육체이나 정신적으로 자기 생애의 참된 열매를 맺자면 아들과 같이 생활에서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신념을 가지고 의지적인 생활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가르치며 배운다는 말이 이런 일을 두고 한 말 같았다./ 만성로인은 춤추듯이 설레이는 푸른숲속에 과원의 만발한 화원이 더욱 사랑스러웠다. 늙은 나무들이 애어린 나무들과 같이 어깨를 걸고 화창한 이 봄을 노래하듯 바람을 타고 설레이는 과수들을 만면에 희열을 띠고 바라보았다."


- 236~7쪽, 김종원 '열매는 어떻게 익어야 하는가' 몇 토막

이 작품은 1969년 11월호 <조선문학>에 실려 있는 단편소설이다. 늙은 사과나무 한 그루를 살리는 방법을 놓고 티격태격하는 이 소설은 원예기사 의철과 의철의 아버지 만성로인, 태환로인이 주인공이다. 의철이 과학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만성로인은 경험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태환로인은 의철의 도우미다.

의철은 김일성이 100년 이상 살려서 후대에게 넘겨주라고 한 북청사과나무의 갱생 문제 때문에 원예학 전문기사인 아버지 만성로인과 맞선다. 의철은 예순이 넘은 이 사과나무를 살리기 위해서는 덧거름을 줘서 수세를 좋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만성로인은 사과나무의 원가지 하나를 잘라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린다.

의철은 사과나무의 원가지를 잘라내는 것은 사과나무를 불구로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의철은 사과나무의 뿌리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여기며 만성로인의 반대를 뿌리치고 뿌리를 파헤쳐 문제의 원인을 밝혀낸다. 가을이 되어 사과나무에 탐스런 열매가 열리자 만성로인은 자신의 생각이 모자랐음을 인정하고 젊음의 활력을 느낀다.

박영식은 '소설 작품 해설-1970년대 북한소설의 인물 형상 소고'란 논문에서 이 소설은 "경험주의를 극복한 주체적 과학주의의 전형"이라고 평가한다. 이어 1970년대 북한소설의 인물 형상은 사회주의 건설 사업을 위한 천리마 기수 형상과 인민대중 혁명사업을 위한 공산주의 인간 형상, 그리고 혁명 건설 사업의 종자로서 청소년 형상 등 세 가지라고 요약한다.

"1970년대 북한소설에는 대부분의 주인공들을 주체적 인간으로 성장하는 인물들로 형상화하고 있다... 주인공이 이러한 주체적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는 항상 조력자의 도움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한 조력자로는 선험적 지식을 가진 '아바이'와 김일성 등이 일반적으로 등장한다. '아바이'와 김일성은 주인공의 스승이자 가장의 역할을 담당하며 주인공의 성장을 돕는다." -박영식

<어디서나 보이는 집>은 천리마시대에서 주체시대로 넘어가는 1970년대 북한문학의 현주소다. 이 책은 60년 이상 이어진 남북분단으로 인해 생겨난 민족적 갈등, 거부와 단절의 공간에 새로운 물꼬를 틔워준다. 북한문학작품을 통해 북한의 사상과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나아가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꾀하자는 것이다.

어디서나 보이는 집 - 북한현대대표문학선집

이동순 외 엮음, 선(2005)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