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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1940년 8월11일 마지막 호를 발행하고 일단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때 <조선>은 왜 폐간해야 했을까? 이것은 <조선>이 친일지(親日紙)냐, 민족지(民族紙)냐의 진실게임과도 연결된다. 친일지로 보는 측은 총독부 정책에 순응한 협력폐간으로, 민족지라고 주장하는 측은 탄압에 의한 강제폐간으로 규정한다.

기호학을 ‘거짓말의 이론’으로 규정한 푸코의 정의에 따르자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은 자신의 정체를 민족지로 규정하면서 일관되게 강제폐간이라고 주장한다. 민족지로서의 의미를 구축하고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은 일제에 항거하다 괘씸죄에 걸려 강제로 폐간당한 민족지일까?

▲ 일장기를 제호 위에 올리고 일황 부부 사진을 1면에 실은 <조선일보> 소화 15년(1940년) 1월 1일자 신년호

이와 관련하여 전남대 최영태(서양사) 교수는 <역사비평> 2004 봄호에 ‘조선일보 폐간을 둘러싼 논란과 진실’을 발표한 바 있다. 광주에서 만난 최 교수는 3년 전 <한겨레신문>에서 <조선>의 친일행적에 관한 기사들을 보면서 확인을 위해 마이크로필름을 뒤진 게 서양사학자가 한국언론사 논문을 쓰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이 논문에서 <조선>이 일제의 전시 경제정책에 맹종하고 있는 실상을 소개한 후 폐간의 사유와 경위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우선 현실적인 사유로서 전쟁으로 인한 종이 부족을 들고 있다. <조선>은 일제의 정책을 성실하게 따랐다고 한다. 그 증거다.

“이와 같이 금년에 신문, 잡지용지 배급량이 줄어들게 되는 것은 만주와 지나 방면에서 선무공작에 쓰이는 용지가 격증한 까닭이다. 이것은 국내사정보다 더 긴급한 것이므로 만난을 배제하고 해야 될 일인즉 부득이한 사정이라.”(1940년 6월22일자)

최 교수는, 조선일보측과 정진석(한국외대·언론학) 교수가 총독부 문서 <언문신문통제안>과 <언문신문통제의 필요성>의 일부 내용을 근거로 “일제가 두 신문에 불신과 경계심을 가졌다고 하여 그것이 조선일보의 민족지적 성격을 부각시키고 폐간이유를 설명하는 유력한 증거로 채택”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요 역사왜곡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당시 총독부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조선인 신문은 이미 체제 내에 완전히 편입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조선일 신문들에 대해 간헐적이나마 경계심을 표명한 것은 단지 잠재적 위험성을 가정한 예방적 차원이었다고 해석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폐간을 알리는 1940년 8월11일자 사고(社告)와 방응모의 ‘폐간에 제(際)하여’를 협력폐간의 명백한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방응모의 글만 소개한다.

“구주전쟁을 계기로 하여 세계정세는 급전직하로 일대 전환기에 처하게 되고 국내정세는 일층 긴장과 분려(奮勵)를 요하게 되었는데 각종 사업을 조정 통제하려는 국책은 드디어 신문통제라는 당국의 방침에 조선일보도 순응치 아니하면 안될 지경에 도달했습니다.”

이 논문에 대해 정진석 교수가 반론을 했고, 최 교수가 다시 재반론을 했다. <역사비평> 가을호에 실린 반론문에서 정 교수는 “최영태는 나의 논문과 신문 칼럼을 인용하면서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주장하거나 통계자료를 왜곡하는 등으로 나의 학문적 업적을 폄하하고 언론사 연구를 전공으로 삼는 본인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진석은 최영태가 인용한 자신의 글 ‘주식회사 매일신보의 설립과 경영’(<관훈저널> 2003년 여름)과 ‘KBS의 역사왜곡’(<동아일보> 2003년 8월18일자) 어디에서도 조선일보를 ‘민족지’로 표현하지 않았으며 ‘민족지적 성격을 부각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역사비평>에 나란히 실린 ‘재반론 : 정진석 교수의 반론에 답한다’에서 정 교수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최 교수는 우선 “정 교수는 이미 위의 두 글을 쓰기 전부터 조선일보를 민족지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 모음>(LG상남언론재단, 1998)과 <일제의 민족지 압수기사 연구>(2001)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최 교수는 또 정 교수가 폐간과 관련하여 종이부족과 조선일보의 친일행적을 거론했다고 주장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총독부의 비밀보고서 내용을 소개할 때는 총독부가 양대 신문의 보도내용에 만족하고 있다는 내용은 생략하고 오직 불온시한다는 부분만 강조하여 소개”하고 있다든지, “총독부의 보고서 내용 중 양대 신문이 총독부에 협조적이었다고 기술된 부분은 철저하게 외면해버렸다”는 것이다.

통계자료 왜곡에 대해서도 최 교수는 “오히려 잘못은 정 교수가 저지르고 있다”고 반박한다. 분명히 정 교수의 글에 나온 <표>를 인용한 것인데도 정 교수는 반론문에서 출처도 없는 <표>를 제시하며 왜곡이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문제의 <표>를 보면 똑같은 구조의 <표>에 오직 하나의 숫자만 다르게 돼 있다. 최 교수는 정 교수 논문의 <표>를 근거로 1931~1939년 사이 <조선>의 압수기사 건수를 60건이라고 했는데, 정 교수는 출처 불명의 <표>를 제시하며 67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최 교수는 “오히려 정 교수가 사실 확인도 정확히 하지 않은 채 ‘반론보도문’을 통해 피신청인이 자신의 글을 의도적으로 왜곡 인용했다고 비난함으로써 공개적으로 피신청인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학문적·인격적 모독을 가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역사비평>은 이 문제를 내년 봄호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한편 최영태 교수는 내주 15일 열리는 ‘조선일보 친일 반민족행위에 대한 민간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폐간과 관련한 진실을 배심원들에게 설명할 예정이다. 진실은 하나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명명백백하게 가려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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