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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하는 천익창씨
ⓒ 김영조
수풀을 헤치며 물길을 건너 아무도 가려하지 않던
이 길을 왔는데 아무도 없네 보이질 않네
함께 꿈꾸던 참 세상은 아직도 머네


안치환은 <수풀을 헤치며>란 노래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그것은 마치 천익창의 외침으로도 들린다. 선구자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가? 수풀을 헤치며 물길을 건너 아무도 가려하지 않던 길을 그는 묵묵히 걸어간다. 어쩌면 국악계의 이단아일지도 모르는 그런 천익창에게서 여러 번 전자우편이 왔다. 그를 만날 수밖에 없다.

예전에 국악방송 송혜진 편성팀장에게 천익창에 대해서 물은 일이 있었다. 그 때 송 팀장은 천익창은 악기의 개량이라는 자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일 것이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국악계에서 이렇다 할 대접은 받지 못하는 듯하다.

나는 맘먹고 그를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마침 서울가야금경연대회가 있는데 그의 계승자이자 아들인 천새빛이 축하 공연을 하기로 했단다. 국립국악원 우면당으로 향한다.

가야금과 개량가야금

가야금을 가야고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기원전 6세기 가야의 가실왕이 중국 악기를 본떠 가야금을 만들었고, 우륵을 통해 신라에 전해졌다"라도 되어 있다. 가야금은 무릎 위에 뉘어 놓고, 손가락으로 줄을 뚱겨 연주하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현악기이다. 가야금은 오동나무로 만든 몸통과 열두 줄, 줄을 지탱해 주는 안족(雁足)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야금의 종류에는 쓰임에 따라 정악 가야금, 산조 가야금으로 나눠진다. 또 줄의 수에 따라 17, 18현 가야금, 21현 가야금, 22현 가야금, 25현 가야금 등이 있고, 음 높이에 따라 저음 가야금, 고음 가야금이 있다.

▲ 천새빛이 연주한 개량가야금
ⓒ 김영조
그러면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현악기인 가야금을 왜 개량하게 되었을까?

국악기를 개량하려는 이유로는 크게 3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중음역 중심의 전래 악기를 저음부나 고음부를 보강하여 음역을 확대하려함이다. 둘째, 전통 악기와 전통 음악을 넓은 극장에서 연주해야 하거나 서양 악기와의 협연 기회가 늘어나면서 보다 큰 소리를 필요로 한다. 셋째, 5음계 연주를 하도록 만들어진 국악기를 12반음의 연주가 가능하도록 개량하여 현대적, 서구적 연주법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직까지 전통 악기의 활발한 개량이 이루어지지 않고, 개량 악기가 잘 보급되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 까닭에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악기 개량을 한 사람들은 연주가들이 전통 음악에만 안주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연주자들은 개량 악기가 제대로 개량되지 못하고, 오히려 기존의 연주법이나 악기의 특성마저 훼손된 개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이러한 주장들을 증명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전통악기의 개량은 필요하고 또 악기를 개량하려는 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한복판에 바로 '천익창'이 있다. 천익창은 아들 천새빛에게 개량 가야금 연주법을 전수했다. 그 개량 가야금 연주법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의 소리' '가야금 연주의 새로운 역사' '신기의 열손가락 연주법' 등의 꾸밈말로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1973년 가야금을 시작으로 개량 발전시킨 천익창의 개량 국악기는 고음, 저음, 명주 등 3개의 창금과 23현, 25현 34현까지 개발된 상태이며, 모든 장르의 음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천새빛의 연주는 23현, 25현 가야금 2대로 열손가락 연주법에 의한 독주를 선보인다. 이 48줄에서 표현되는 2대의 각기 다른 음색은 그의 연주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음악이다. 천익창이 개량 발전시킨 3대의 가야금을 위한 독주는 3대의 악기를 열손가락 연주법으로 동시에 연주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400가지 이상의 연주 기술이 습득돼야만 하는, 굉장히 어려운 연주법으로 알려져 있다.

가야금 경연대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천새빛의 화려한 연주는 청중들의 눈을 꼼작 못하게 붙들어 두는 매력이 있다. 마치 전자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의 전성기를 보는 듯하다. 두 대의 가야금을 휘젓는 열손가락은 신비로움을 느낄 정도이다.

연주가 끝나고 천익창, 천새빛 부자의 인터뷰를 했다. 먼저 천익창과의 인터뷰이다.

- 국악은 어떻게 하게 됐나?
"어렸을 때 안동에서 살았는데 시골이어서 국악은 몰랐고 피아노, 바이올린 등 서양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그때 바람이 일었던 발명을 한다고 잠시 산속 암자에서 지내던 일이 있었습니다. 밤에 꿈을 꾸었는데 어디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분명 바이올린 소리가 아니라며 소리를 지르다가 깨었습니다.

▲ 개량가야금을 연주하는 천새빛 1
ⓒ 김영조
이때부터 그 소리를 찾아 헤매었는데 안동에 온 가설극장에서 비슷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뛰어 들어가서 연주자에게 물었더니 '아쟁'이란 것과 "서울에 가면 배울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뒤 서울 동대문 근처의 학원에서 처음 가야금부터 배우게 되었지요.“

- 험난한 개량 가야금의 세계에 빠지게 된 계기는?
“얼마 뒤 허리우드극장 근처의 국악 녹음실에 들렀다가 미8군 밴드 연주자를 구하러 온 사람들에게 스카우트되었습니다. 그 뒤 미8군에서 연주를 하는 중에 가수들이 민요를 부르면 가야금으로 반주를 하곤 했는데 이때 가야금은 음량이 작고, 높이가 낮아서 서양 악기와의 조화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를 조화시키기 위해 즉 연주의 필요에 의해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전자 장치를 달아 음량을 늘리고, 명주실 대신 금속줄을 사용하기도 하고, 스탠드를 달기도 하는 과정을 꾸준히 해 왔습니다.”

- 가야금을 개량하고 연주하면서 어려웠던 것들은?
“1987년 세종문화회관에서 KBS의 주최로 '한국 최초의 국악과 양악의 만남'이란 제목을 달고 한 연주회에서 협연했고 서양악단과의 협연, 서양 음악을 가야금으로 연주하곤 했습니다. 아마 본격적으로 국악기와 서양 악기를 동시에 연주하는 최초의 연주자였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연주와 악기 개량을 국악계에서는 변종으로 보고 외면하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 아들을 통해서 겨우 인정받아 가는 데 이에 대한 생각은?
“나와 내 아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솔직히 전통 음악은 아니기 때문에 경연대회에 나가서 평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좀 두렵고 손해가 되는 듯한 생각을 가진 것이 사실입니다. 나의 뜻은 아니었지만 아들이 중학생일 때 학교에서 권장하여 경연대회에 참가하고 상을 받은 이후로 좀 안심이 되었습니다. 특히 작년 가야금경연대회에서 창작부가 처음 생기고 여기서 대상을 받았던 것은 나를 뿌듯하게 했습니다.”

- 국악계에 하실 말씀은?
“이번 가야금경연대회에서는 작년까지 모처럼 초중고등 창작부를 별도로 두었는데 올해는 배우는 과정에는 문제가 있다면서 없애 버렸습니다. 창작은 오히려 창조적 활동이 활발한 청소년기가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데 없앴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제발 창작 음악과 개량 악기를 열린 마음으로 보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개량가야금을 연주하는 천새빛 2
ⓒ 김영조
인터뷰 내내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듯했다. 한번 시작하면 끝없이 이어지는 그의 말에 어떤 한이 서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아들에게 들려 주고 싶지 않은 내용도 있다며 인터뷰 중에 한사코 아들을 내보냈다. 그리고는 가야금계 원로 3분의 추천서를 받지 못해 대학 강단에 서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곁들인다. 한참의 인터뷰가 끝난 다음 아들 새빛을 부른다. 젊은 고등학생과의 풋풋한 인터뷰를 시작한다.

- 왜 어려운 개량 가야금을 하게 되었나?
“처음엔 아버지가 국악이 어려운 길이라고 피아노만 가르치셨는데 저는 오히려 가야금이 더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자꾸 가야금을 가지고 놀았는데 7살이 되니깐 아버지가 어쩔 수 없으셨는지 가야금을 가르쳐 주셨어요.”

- 친구들은 뭐라고 하나?
“초등학교 땐 말을 안 해서 아무도 모르고, 중학교 땐 가까운 친구들만 알고,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반 아이들이 모두 아는데 별로 관심없어 해요. 그래서 저도 아이들에게 가야금 얘기는 하지 않아요.”

- 개량 가야금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데 지금의 생각은?
“연주를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참 보람을 느껴요. 보통 가야금은 3손가락으로 연주하는데 저는 이 개량 가야금을 열손가락으로 연주를 합니다. 이 좋은 악기에 사람들이 관심을 더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친구들도 제 연주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새빛은 이름처럼 해맑았다. 아버지와는 달리 전혀 그늘이 없다. 앞으로 우리의 창작 국악계를 이끌어나갈 인재답게 활기차 보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연습할 시간이 부족하여 답답하다는 말을 하는 새빛에게 밝은 미래가 열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천익창의 여정은 끝이 없다. 더 좋게 개량해야 하고, 더 좋은 음악도 작곡해야 하며, 더 많이 알려야 하고, 새빛에게 확실한 전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야금은 목숨처럼 보인다. 이제라도 천익창의 여정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그의 작업에 후한 평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가야금을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는 고독한 천재, 천익창 그에게 이제라도 밝음이 함께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 다정한 천익창, 천새빛 부자
ⓒ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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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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