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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을 계기로 최근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1920년대 만주에서 밀정으로 활동할 당시의 배정자. 50대 나이 치고는 젊고 세련된 모습이다.
1949년 2월초 반민특위 강명규(姜明珪) 조사관 일행이 성북동 언덕길을 급히 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한 양옥집 앞에 다다른 강 조사관 일행은 백발의 한 노파를 끌어내 수갑을 채우고는 그 길로 남대문로 반민특위 사무실로 연행하였다. 당시 그 노파의 나이 79세.

겉으로 보기엔 여느 노인네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가 반민특위로 잡혀오자 특위 요원들이 이 노파의 얼굴을 보려고 강 조사관 주위로 모여들었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길래 그 나이에 수갑에 채워져 끌려왔으며, 또 그를 보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왜인가? 과연 이 노파는 누구인가?

배정자(裵貞子. 1870∼1952년). 흔히 이름 앞에 '요화(妖花)'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배정자가 바로 그 노파였다. 정사(正史)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한국근대사의 이면사(裏面史)에 '일제의 앞잡이'로 기록돼 있다.

조선의 마타하리, 대표적 여성친일파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배정자급(級)에 드는 친일파는 몇 안된다. 그는 구한말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협조하였고, '한일병합'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조선인 항일세력 탄압에 앞장섰었다. 그는 실로 친일파 가운데 우두머리급에 드는 친일파였다. 해방 후 반민법 위반으로 반민특위에 잡혀온 여성피의자는 총 6명. 그들 가운데 첫번째로 잡혀온 사람이 바로 배정자였다.

흔히 '여자 스파이'의 대명사로 '마타 하리'를 든다. 고급창녀 출신의 마타 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1917년 프랑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배정자를 바로 이 '마타 하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배정자는 1870년 김해 고을에서 아전노릇을 하던 배지홍(裵祉洪)의 딸로 태어났다. 아명은 분남(粉男). 그의 부친은 1873년 대원군 실각 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서 처형되었다. 모친은 이 충격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그가 세 살 때의 일이었으니 그의 초년인생은 순탄치 못했다.

이후 그는 모친과 함께 유랑생활을 하다가 밀양에서 관기(官妓)로 팔렸으나 도중에 뛰쳐나와 양산 통도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우담(藕潭)이란 승명(僧名)으로 목탁을 두들기던 그는 2년 만에 다시 절을 뛰쳐나와 배회하다가 밀양관청에 체포되었는데 여기서 우연히 은인을 만났다.

당시 밀양 부사 정병하(鄭秉夏)는 그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일본으로 가서 살도록 주선해주었다. 1885년 15세 되던 해 그는 일본인 밀정 마쓰오(松尾彦之助)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에게 뜻밖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등박문의 꼭두각시로 매국·배족 선봉에

한편 일본으로 건너간 배정자는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 안*수(安*壽)를 만나게 되었고, 다시 그를 통해 김옥균(金玉均)과도 알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물굽이를 틀어준 사람은 바로 이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 이토(伊藤博文)에게 그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의 빼어난 미모에 끌린 이토는 그를 하녀 겸 양녀로 자기 집안에 들여앉히고는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라는 일본 이름을 지어주었다. 배정자의 '정자'는 여기서 생겨났다.

한편 이토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를 장차 고급 밀정(스파이)으로 키울 요량으로 수영·승마·사격술·변장술 등을 가르쳤다. 요샛말로 소위 '밀봉교육'을 시킨 셈이다.

1894년 그는 도일 9년 만에 조선땅에 발을 디뎠다. 공식적으로는 신임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하야시(林權助)의 통역이었으나 본분은 일제의 밀정. 첫 임무는 당시 조선황실 내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공사관에 머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엄비(嚴妃. 고종의 계비)의 친인척을 통해 황실과 선을 댔다. 고종(高宗)은 미모에다 출중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그를 총애하였다.

당시 한 신하가 고종에게 "비기(秘記)에 가로되, 갓 쓴 여자가 갓 쓴 문(門)으로 출입하면 국운이 쇠한다 하였습니다, 통촉하옵소서"라고 상주한 바 있다. 양장(洋裝)에 모자(갓)를 쓴 그가 대안문(大安門. 덕수궁의 정문으로 현재명칭은 '大漢門'임)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

러일전쟁 직전 친러파는 고종의 신변안전을 위해 ▲평양 천도(遷都) 혹은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비밀이 누설돼 일본측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고종으로부터 이 정보를 빼내 일본공사관에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배정자였다.

▲ 한국침략의 원흉으로 배정자를 양녀 겸 애첩으로 데리고 놀았던 이토 히로부미(마차 왼쪽에 앉은 사람). 사진은 그가 '을사조약' 체결 직후인 1905년 11월 29일 일본정부의 칙사로 경성역(현 서울역)에 도착해 마차에 오른 모습이다. 그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당시 한국주재 일본군사령관(육군대장)으로 나중에 제2대 조선총독을 지냈다.

출중한 미모와 일본어 실력으로 고종 총애받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3월 이토가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자 배정자는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오빠 배국태(裵國泰)는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 동생은 경무감독관(현 경찰청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토를 등에 업은 그는 밀정이자 막후 권력자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일제와 함께 고종에게 퇴위(退位)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한편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기세는 1909년 이토가 통감자리에서 물러나고(6월) 다시 4개월 뒤 하얼삔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됨(10월 26일)으로써 한 풀 꺾이고 말았다. 이토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그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한 사람은 '한일병합' 후 부임한 조선주둔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 밀정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그는 일본군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서는 이 지역에서 수년간 군사첩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봉천(奉天. 현 瀋陽)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만주지역 거주 조선인들의 동향을 정탐, 귀순공작을 담당했다.

1920년 일제는 옛 일진회(一進會)의 잔당들을 규합, 만주지역 최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를 창설하는데 그는 배후인물로 활동하였으며 나중에 이 단체의 고문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를 위해 조직한 무장 첩보단체로 초대회장 최정규(崔晶圭)는 구한국 시절 참위(소위) 출신이었다. 매국노 이용구(李容九)의 한일합방 청원을 지지했던 최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70 노구로 '군인위문대' 조직

한편 만주지역에서의 맹활약(?)으로 독립투사 진영에서 배정자를 처단대상자로 지목하자 1922년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가 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가 경무국 촉탁으로 다시 고용하였다. 나중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6백여 평의 토지를 증여받기도 했는데 은퇴한 뒤에도 총독부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민간업자의 부탁을 받고 일본군 위안부 송출업무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70 노구에도 불구하고 조선 여성 1백여 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가 업자로부터 금품을 챙긴 것은 불문가지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취재차 형무소를 찾은 한 기자에게 그는 "따끈한 장국밥을 한 그릇 먹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고 애걸하였다. 한 시대를 풍비했던 '배정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한낱 늙은 죄수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제 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고 가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을 통해 뒤늦게 자신의 죄과를 후회했다. 종로구청에 보관돼 있는 호적에 따르면 그는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2월 27일 서울 성북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묘하게도 그가 죽은 날짜는 그의 출생일과 같은 날이었다.

어릴 때 조정(朝廷)에 대한 증오 때문에 조국을 배반, 매국녀(賣國女)가 된 배정자는 해방 후 조국에서 8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57세로 밀정생활 은퇴 후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
연령·민족을 불문한 배정자의 '남성편력'

배정자는 빼어난 미모와 화려한 경력에다 연령·민족을 불문한 '남성편력'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첫 남자'는 전재식(田在植). 한때 관기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田道後)의 아들 전재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의 도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면서 재회, 결혼을 하였다.

이 사이에서 전유화(田有和)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재학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

두번째 남편은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현영운(玄暎運). 1895년 당시 외부(外部) 번역관(주임관 6등)이던 현영운은 배정자의 도움으로 10년 만에 육군 참장(종2품. 현 준장)임(任)농공상부 협판(차관)에 올랐다.

한편 배정자는 현영운과 1년 가량 살다가 이혼하였다. 그리고는 현영운의 후배인 박영철(朴榮喆. 일본육사 15기 졸업. 함북도지사. 중추원참의 역임)과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또 이혼하였다.

이후 배정자는 일본인 오하시(大橋), 은행원 최(崔)모, 전라도 갑부 조(趙)모, 대구 부호의 2세 정(鄭)모 등과도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한 적도 있다. 1924년 57세로 밀정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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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