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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하야성명이 있던 1960년 4월 26일에 파고다공원에 있던 이승만 동상이 무너졌다. 이 모습을 담은 사진은 여럿 있으나, 여기에 소개된 것은 <사상계> 1960년 6월호에 보도된 자료이다.
1960년 4월 26일에 촬영된 한 장의 사진으로 40여 년 전, 그때의 환희와 감격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마침내 그날 오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있었고, 이내 파고다 공원에 있던 절대권력자의 동상은 그렇게 길바닥을 나뒹굴었다.

딱히 파고다 공원에다 동상을 세워야 했던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이곳에 느닷없이 '살아 있는', 그것도 '현직' 대통령의 동상이 들어선 것은 1956년의 일이었다. 그 시절의 신문자료를 뒤져보니, "그해 3월 31일에 준공된 이 동상은 2미터 40센티의 높이에다 기단까지 합쳐 모두 6미터에 달하는 크기였고, 대한소년화랑단이 건립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던 것이 겨우 4년의 세월을 넘길 즈음에 4·19의 함성 속에 여지없이 넘어지고 말았으니, 어째 동상치고는 참으로 딱한(?) 처지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런데 애당초 주인을 잘못 만난 탓에 얄궂은 운명에 처해야 했던 동상은 하나 더 있었다. 절대권력자의 위세는 파고다 공원에만 자신의 분신을 남기는 것에 그쳤던 게 아니라 남산(南山)의 중턱에도 또 하나의 거대한 동상을 만들어 놓았다.

남산의 동상이 파고다 공원의 것보다는 약간 뒤늦게 완공되긴 했지만, 그 크기만은 서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달랐다. 조각가 윤효중(尹孝重)의 작품인 이 동상은 본체만 7미터의 높이에다, 기단까지 합치면 무려 25미터에 달하는 초대형이었던 것이다.

▲ 파고다공원에 세워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준공식을 알리는 <경향신문> 1956년 4월 2일자이다. 여기에서는 이 동상이 대한소년화랑단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원래 '이 대통령 제80회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만들어진 이 동상의 준공식은 1956년 8월 15일이었고, 때마침 이날은 제3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던 날이기도 했다. <경향신문> 1956년 8월 17일자에는 이때의 풍경을 이렇게 적었다.

"지난 15일 오후 4시부터 시내 남산공원에서는 김 대법원장, 이 민의원 의장을 비롯한 3부 요로와 8·15 광복절 및 제3, 4대 정부통령 취임을 경축하기 위해 내한 중인 각국의 외교사절, 그밖에 내외 귀빈 및 일반시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이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육군군악대의 주악으로 시작된 동 제막식은 김 대법원장, 이 민의원의장, 함 전부통령, 이 내무장관의 동상 제막에 이어 동 건립위원회 의장 이(李起鵬)씨의 식사, 김 대법원장의 송축사, 작가 윤(尹孝重)씨 및 전국극장연합회에 대한 표창과 조(趙炳玉) 민의원 부의장 선창의 만세삼창으로 동 45분 식을 마치었다.

이 대통령 제80회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건립된 동(同) 동상은 작년 10월 3일 기공 이래 10여 개월에 걸쳐 7만여 명의 인원과 총 공사비 2억 6백만 환이 소요된 것이며, 높이 81척에 건립부지 3천여 평을 차지하고 있다."


건립비용이 상당했던 만큼 동상의 규모도 장대했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니까 남산에 세워진 동상은 군중의 힘으로 손쉽게 무너진 파고다 공원의 동상과는 달리 그렇게 쉽사리 넘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4·19의 함성 속에도 불구하고 남산의 동상이 여러 달이나 굳건히(?) 제 모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토록 거대한 덩치 때문이었다.

▲ 1956년 8월 15일에 준공된 남산 중턱의 이승만 대통령 동상으로 그 높이가 기단부를 포함하여 모두 25미터에 달하는 초대형이었다. 이 동상은 원래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신을 경축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졌다.
이곳의 동상은 그해 7월 23일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철거결정이 내려졌고, 거기에다 또 한달을 넘겨 8월 19일 중장비를 동원한 끝에 동상의 해체작업에 착수하는 과정을 거쳤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졌던 두 구의 이승만 동상은 천년만년 갈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거의 고물 신세가 되어 그렇게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이승만의 동상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70년 3월의 일이었다. 그 시절 <코리아 라이프>라는 잡지에는 '95회 생일을 쓸쓸히 맞는 노정객 고 이승만 박사의 퇴락한 잔영'이라는 제목의 글 하나가 수록된 적이 있었다.

여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의당 폐품처리가 되어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승만 동상의 행방이 소개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동상이 발견된 곳은 좀 엉뚱하지만 서울 명륜동 1가의 주택가였다. <코리아 라이프>에는 동상이 이곳까지 흘러온 연유를 이렇게 전해준다.

"4·19 직후 이박사 동상은 어느 고철상인에 의해 용산에 있는 모 철공소에 인계되었었다. 홍윤성씨가 철공소로부터 이박사 동상을 구입할 때는 이미 동상 하체는 완전분해된 후였다. 그나마 남은 부분을 철공소 주인을 달래어서 운반비조로 20만원을 지불한 홍씨는 20여명의 인부를 동원,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은 것이란다."

그 이후 자유당 시절 대한노총 최고위원을 지냈던 김주홍(金周洪)씨가 1965년 무렵에 이 집으로 이사를 온 후 더욱 정성껏 모셔왔다는 것이었다. 다만 남산공원에 세워졌던 거대 동상은 이미 대부분이 해체되어 사라졌고, 오직 머리 부분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원체 그 규모가 컸던 탓인지 머리만 남아 있는 상태인데도 여전히 높이가 160센티미터 정도나 된다. 파고다 공원에 세워졌다가 4·19 때 길바닥을 나뒹굴었던 동상 역시 125센티미터 정도의 상반신만 남은 채 이 집에 남겨졌다.

▲ <코리아 라이프> 1970년 3월호에 보도된 서울 명륜동 1가에 남겨진 이승만 동상의 잔영들이다. 머리부분만 남아 있는 왼쪽의 동상은 남산에 세워졌던 것이고, 상반신만 남은 오른쪽의 동상은 파고다공원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3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지금 그 동상들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확인해 보았더니, 그 사이에 집주인은 바뀌었으나 그때의 동상은 명륜동 1가의 주택가에 용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때나마 위풍당당하게 저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굽어보았을 기념물은 한낫 구경거리에나 쓰일 몰골로 버려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기에 권력자의 동상은 그렇게 함부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닌게 아니라 애당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권력자의 동상은 처음부터 세상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고려대의 김성식(金成植) 교수는 <사조(思潮)> 1958년 9월호에 '동상사태(銅像沙汰)'라는 제목의 글로 이러한 세태를 꼬집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에는 동상사태가 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줄 수 있으리만치 적지 않은 동상이 세워지고 있다. 다른 나라에도 동상이 물론 안 세워진다는 것은 아니나, 특히 우리 나라의 동상건립에 있어서 특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선진외국에서 별로 볼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생존한 인물의 동상을 세우고 있는 것, 둘째로 생존한 외국인의 동상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중략)…그래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동상은 과거의 애국자에서부터 세우기 시작하자는 것, 또 어떠한 인물이든지 사후(死後)에 국민의 정확한 판단을 기다려서 후손의 손에 의하여 세워져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 처칠의 초상화 한 폭이 사후 10년이 지나고서야 하원의사당 벽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천자유공원에 '살아 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건립된 것이 1957년 9월 15일이었고, 권력에 빌붙은 사람들의 손으로 '살아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둘씩이나 만들어 세운 것 역시 1956년의 일이었으니, 그는 이 모두를 싸잡아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모든 권력자는 동상을 꿈꾼다는 얘기가 있긴 한데, 그렇더라도 동상건립만큼은 결코 자신 또는 자기 시대의 몫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머리부분만 남은 이승만 동상 그 자체가 역설적으로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도 싶다. 섣불리 만들어지는 권력자의 동상, 그것은 시쳇말로 그를 자칫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사실상 '외상'인 남산의 이승만 동상
동상건립기금이 부도 난 웃지 못할 사연

서울 명륜동 1가의 주택가에 쓸쓸하게 남겨진 지금의 처지가 잘 말해주듯이 애당초 주인을 잘못 만한 이승만 동상에는 뒤틀린 현대사의 그림자가 잔뜩 들어 있었다.

앞서 소개한 <경향신문> 1956년 8월 17일자 '남산의 이승만 동상 준공' 보도에 "작가 윤(尹孝重) 씨 및 전국극장연합회에 대한 표창 운운"하는 대목이 들어 있어, 이것이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거기에도 웃지 못할 또 하나의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전국극장연합회는 자유당 시절 흔히 '연예계의 대통령'으로 부르던 정치깡패 임화수(林和秀)가 부회장으로 있던 단체였고, 이 연합회가 이승만 동상의 건립기금모금을 주관했던 탓에 준공식장에서 표창장이 주어졌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흥은행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조흥 백년 숨은 이야기>(1997)라는 책자에는 남산공원의 이승만 동상건립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를 담고 있었다.

말인즉슨 이승만 동상은 처음부터 '외상'으로 만들어진 기념물이었고, 그 돈은 전국극장연합회가 극장관람객들에게 조금씩 부과하여 충당하려고 계획했던 모양인데, 뜻밖에 4·19를 겪는 바람에 그 돈은 결국 권력의 몰락과 더불어 부도 처리 되고 말았다는 사연이었다.

<조흥 백년 숨은 이야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임하고 있던 1956년 봄 국무원 사무국에서는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안건을 하나 의결하였다. 그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제 80회 탄신을 경축하기 위하여 경축 중앙위원회를 창설하고 위원장에 이기붕 씨를 추대한 것이었다.

이 경축 중앙위원회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을 경축하는 경축금 3억환을 상납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전국 극장연합회를 조직하고 각 극장 입장객으로부터 10환 내지 20환을 더 거두어 경축금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입장권이 2백 환 미만이면 10환을 더 걷고, 200백 환 이상이면 20환을 더 걷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경축금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당장 현금이 필요했고 이 금액을 다 거둘 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우선 우리은행을 비롯한 4개 은행에서 먼저 대출을 받아 충당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시내 4개 은행이 모두 이 대출에 참여했던 관계로 불가피하게 이 대출을 취급하게 된 우리 은행(즉 조흥은행)은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이기붕 위원장을 채무자로 하고 극장연합회 간부 임화수를 비롯한 4명을 보증인으로 입보케 한 후 다른 은행과 함께 3억 환을 대출해 주었던 것이다.

그 후 1959년 4월까지는 전국 각 극장에서 거둔 수입금으로 원금과 이자를 갚아 나갔으나 1960년 4·19가 일어났고, 4월 26일 이 대통령의 사임에 이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자 원금 및 이자 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1960년 11월 24일에는 우리 은행을 비롯한 4개 은행이 652만 5944환의 연체 대출금을 안게 되었다.

이에 우리 은행은 연체대출금 상환을 각 극장에 요구하였으나 전국의 각 극장은 이에 응하지를 않았고 결국 임화수를 비롯한 4명의 보증인에게 대출금 상환 청구소송을 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3억 환의 용도는 1959년 7월25일 전국 극장연합회가 이기붕위원장에 보낸 경축금염출 종료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었는데, 이 보고서에 이승만 대통령 동상건립 기금으로 이 돈을 모았다고 적혀 있었다. 우리 은행은 이 소송에서 일부 승소하였으나, 임화수는 물론 백운성도 압류할 만한 재산이 없어서 실익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순우

덧붙이는 글 | 필자가 서울 명륜동 1가에 소재한 이승만 동상의 흔적을 찾아 이곳을 탐방한 것은 올해 1월 8일과 1월 30일 두 차례이다. 이를 통해 파손된 두 구의 동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으나, 그 모습이 <코리아 라이프> 1970년 3월호에 수록된 상태와 하등 다를 바 없고 또한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이와 관련된 사진자료를 공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따로 적어둔다. 그나저나 앞으로 이 동상은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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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