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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가 수도로 정해지기 전에는 메이지 정부에서 상당히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일본 역사상 수도를 동쪽 멀리 옮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라, 시가(滋賀), 오사카, 교토 등 킹키(近畿) 지역이 중심이었다. 여기서 '킹키(近畿)'란, 지명으로 '서울 근처'의 의미가 있으니, 우리의 '경기(京畿)'라는 지명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천년의 고도인 교토는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장으로 지금도 교토 가는 것을 '올라간다' 하고 도쿄쪽으로 가는 것을 '내려간다'라 표현 한다. 우리가 서울을 기준으로 '올라간다'하고 남이나 북으로 가는 것을 '내려간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메이지 초 새 수도 후보지로는 세 곳이 경합을 벌였었다. 천년의 일본 수도였던 교토는 물론 상업 도시로 성장해 온 오사카, 그리고 토쿠가와 막부가 있었던 에도(도쿄) 중 한 곳을 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과정에는 많은 격론이 있었고 하여튼 천년의 수도 교토인들에게는 유쾌하지 못한 수도 이전 논란이었다.

수도 이전 방법으로 교토와 에도 양쪽에 신·구 수도를 두자는 의견과 세 도시를 전부 수도로 정해서 적당히 세 곳을 옮겨 가면서 천황이 거주하게끔 하자는 제안까지 있었다. 교토는 상징적인 전통 수도요, 도쿄는 새로운 수도로 적임지이며, 오사카는 상업 수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농담 삼아 일본인들이 '일본삼도(日本三都)'라 말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교토는 천년의 일본 수도였던 명실상부한 마음의 수도요, 도쿄는 신수도이고 오사카는 상업적 수도라는 유행어이다. 특히 일본인들에게 있어, 도쿄 이북의 동북 지역은 아이누 민족과의 전쟁과 복속의 과정에서 볼 때 별로 달갑지 않은 기피 지역이었다. 동북 지역은 불교에서 말하는 귀문(鬼門)으로 통하는 곳이다.

중국인이 만주 등 동북 지역에 대하여 '귀문'이라든가, 유주(幽州)라 불렀는데, 여기서 '유(幽)'는 '유택' 즉 묘지를 뜻한다. 기마 민족인 선비, 흉노는 물론 고조선, 고구려 발해 민족과의 싸움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돌아가지 못하고 원귀가 된 지역이다. 수나라 당나라의 수십만 군대가 고구려와의 싸움으로 불귀의 객이 된 지역이 바로 '유주'라는 동북 지역이다. 이처럼 킹키의 나라, 교토, 오사카 지역 기득권층의 반발이 심했던 것이다. 이들이 느끼는 동북 지역은 미개지이자, 미개척지이자, 터부의 땅이다. 고대 아이누 민족과의 싸움에서 야마토 민족이 수도 없이 죽은 유택지로서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도쿄로의 이전에 대하여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의 유력자인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가 오사카로의 수도 이전을 적극 추천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그의 주장은 천황이 오사카에 살면서 자주 행차를 한다면,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용기를 줄 수 있다는, 이른바 '상업 도시 키우기'라는 논리였다. 이는 카고시마와 야마구치 등 지방 무사 출신들에 의해 이루어진 메이지 유신 정부로서는 재정적 문제가 가장 컸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토 귀족층들은 오사카의 상인 기풍을 소름끼치듯 싫어해 오오쿠보가 제안한 오사카 수도 제안을 강력 반발하여 저지시켰다. 오사카는 도시와 도로가 좁고 교통편이 나쁘다는 것을 이유로 들며 맹 반대했다. 그러나 그 속내는 교토인들의 오사카인들에 대한 전통적 차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토 귀족들은 그 대안으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에도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오사카로 수도를 옮기기에는 너무 품위가 떨어지고 멀리 떨어진 에도라면 그나마 봐 줄 수 있다는 자격지심의 발로였다. 결국 교토 귀족들의 오사카 지역에 대한 비하와 차별 의식이 재정적인 이유로 오사카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토시미치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결국 귀족들의 이러한 반대가 에도로 수도를 옮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교토인들의 오사카인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러서도 별반 바뀐 게 없다 할 것이다.

하여튼 새로운 수도는 에도로 정해졌는데, 신정부는 이외에도 여러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에도로 수도를 정함으로써 쿠테타를 막으려는 계획이었다. 혹시라도 모를 칸토오(關東) 이북 지역에서의 막부 잔당을 도쿄 지역에 수도를 둠으로서 막아보려 했던 것이다. 메이지 초까지도 신정부는 약체 정부로서 막부를 지지하는 세력이 동북 지역에 있을까 봐 매우 우려했던 것이다. 둘째로 경제적 이유에서이다. 시골 무사들이 주축이 된 메이지 정부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신정부로서 구정권인 막부의 건물과 토지를 무상으로 접수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큰 매력임에 틀림없었다. 때문에 신수도는 에도로 결정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도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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