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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대(鎭營隊) 해산의 주역, 최지환

최지환(崔志煥, 창씨명 富士山隆盛, 1882)은 1906년 진주서 순검(巡檢), 경남도회의원,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진주지역의 유명한 친일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그는 진영대(鎭營隊)의 해산에 직접 개입하여 유명세를 떨쳐 출세가도를 달렸다.

1907년 최지환은 진주경무서(晋州警務署, 현 경찰서)의 권임(權任:순사부장)으로 일본군이나 관찰사도 감히 두려워 엄두도 내지 못하는 진영대 해산을 스스로 자청하고 영문으로 혼자 들어갔다. 결국 그는 진영대 중대장이었던 경 중위를 일본군 주둔지로 유인해 감금함으로써 남은 병사의 무장봉기를 봉쇄했다.

당시 진영대 해산 과정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연 마산에서 약 1개소대의 병력을 인솔한 중위가 진영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지금의 금정(평안동)소학교 교장사택인 당시의 일본인 소학교에 진을 치고 관찰사를 비롯, 한일 양국의 간부가 모여 일본군의 요구대로 진영대장 인도에 관한 협의를 했으나 누구 한 사람도 응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그 대임이 명하여져 곧바로 이를 수락하고" 바로 "혼자의 몸으로 병영에 들어가 한국군 진영대장 경 중위와 만나 별실 회담을 요구해 만났다"라고 했다.

이날 최지환은 "일본 군인의 내방에 대하여 귀하가 주둔 군인으로서 예의상 마중 나오지 않은 것은 한국 군인의 체면에 관한 문제이고 더욱이 면접을 피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비방을 면치 못할 것이니 면회상 용무를 수락하든지 혹은 거부하든지… 한국군인의 체면유지의 소치"라고 진영대장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이날 진영대장 경 중위는 눈물을 흘리면서 조선인 최지환에 의해 무장해제 당해야 했다. 특히 최지환은 경 중위에 대해 매우 악감정을 지니고 있었고, 진영대 해산 당시에도 자청해 나섰던 것도 서로간의 좋지 못한 감정도 한 몫 했다고 하겠다.

▲ 최지환은 진영대 해산에 공을세우면서 본격적으로 친일파로 변신한다.
바로 진주의 군대해산을 손쉽게 이루어내도록 유도한 장본인이 조선인 최지환이었다. 해방 후 <반민자 죄상기>에는 "왜놈이 자랑하던 부사산(富士山)을 그대로 창씨하고, 이름을 정한론(征韓論)으로 알려진 서향륭성(西鄕隆盛)의 이름을 따서 '부사산륭성(富士山隆盛)'이라고 일본놈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황국 광신자며 합병 당시 진영대 중위라는 사람을 기생을 시켜 매수하여 무기고의 열쇠를 훔치어 한병(韓兵)의 무장을 해제함으로써 인민의 봉기를 억압한 반역자"라고 비판하였다.

그 외 1908년 목포경찰서 경부로 재직하였고, 1910년 총독부 경부로 당진·삼랑진·동래·진주서 근무하였다. 또 1916년 한국인에게 허락된 최고의 직급인 경시까지 지냈다. 1923년 충청 음성군수를 지내고 전직하였다.

기생조합을 다시 설립한 친일 매판자본가, 최지환

최지환은 기생조합을 회생시키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1915년 기생조합의 해산에 아쉬워한 진주경찰서 경무주임 전전 승(前田 昇)은 진주경찰서의 경부로 있던 최지환(崔志煥)에게 재조직을 은밀하게 하명했다.

▲ 그는 진주 예기권번 주식회사를 만들어 기생사업을 시작했다. 악독한 매판자본의 전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진주대관(晋州大觀, 1940)에는 "금향(錦香) 이하의 노기들이 일어나서 여자뿐인 진주 기생조합을 만들어내고, 그 회계 정리를 감독하여 얼마 안되어 부채를 갚고 건실한 권번으로 발전시켰으나 시대의 변천으로 재차 조합은 남자들의 손으로 경영되었다 이때부터 기생조합의 회계와 영업감독이 남자들 손으로 넘겨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는 1938년 12월 27일 전두옥(全斗玉), 박규석(朴奎錫), 김동식(金東式), 정태범(鄭台範), 허억(許憶), 강주수(姜周秀)씨 등과 함께 권번 경영 허가를 받아 주식조직을 만들었다.

다음해 11월 2일 주식회사 진주예기권번 창립대회를 마치고 최지환은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회사는 자본금 5만원에 불입금은 1회에 4분의 1로 하고, 전기 8명이 평등하게 출자해서 전형적인 '기생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전통적 진주기생의 기능을 과시하고 품위와 옛날의 그림자를 조금씩 되찾을 무렵 극력(極力)으로 가르쳐 갱생계획을 세워 경영에 임했다"라고 말했다.

▲ 최지환은 매판자본가에서 정치인으로 진출한다. 초대 진주부 의원이자 부의장을 지냈다. 사진은 <부산일보> 1940. 4. 2.
1938년 친일매판 자본가로 변신한 그는 무역업 협성상회(協成商會) 사장으로 비료, 명태어염, 석유 등을 취급하면서 자본력도 겸비하게 된다.

그는 진영대 해산도 모자라 친일경찰로 투신하면서 일본인의 도움으로 기생사업까지 손대며 친일매판자본가의 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그는 일본에 협조적인 인물로 부각되어 진주지역내 명망받는(?) 친일파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대 부회의원에서 진주신사의 총대로

진주시는 1939년 10월 1일 진주부로 승격되었다. 이에 최지환은 부윤과 함께 진주부 현판식에 참석하고 진주신사를 찾아가 참배했다. 또한 그는 1939년 11월 20일 초대 부회의원 선거에서 초대 부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12월 2일 제1회 진주부회 부의장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41년 5월 10일 진주부 선거구에 출마하여 이영부(李英夫, 창씨명 大山英夫)와 마지막까지 접전을 벌여 경남도회의원에 당선되었다.

▲ 진주신사 씨자총대로 활동한 최지환.
그는 1940년 진주신사(晉州神社)의 씨자(氏子) 총대직을 맡아 일했다. 신사에서는 1937년부터 출정군인의 보고제와 무운장구(武運長久) 기원제를 비롯해 진주 각급 학교 및 종교단체의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등이 매일같이 개최됐다.

당시 일제의 정신을 대변한 신사에서 최지환은 총대직 맡아 맹활약하며 단순히 총대직을 넘어 신사에 기부금까지 주었던 것이다.

그는 조선민중을 억압하고 고문하던 경찰을 그만두고 정계로 진출하였고, 한국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인 중추원 참의까지 오르게 되었다. 또 1932년 평북, 1935년 충남 참여관까지 오르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 그는 기생사업과 무역사업까지 손을 대면서 급성장하게 된다. 사진은 협성상회 모습.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1941년 8월 14일 진주조주상조합 결성식에서 조합장으로 선출되어 "배급의 만전을 기하고 원활한 공급하며 밀주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자"라고 말했다. 또 1942년 5월 21일 식량대책좌담회에 참여한 최지환은 "진주 부민들이 배불리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시체제하에서 아껴 먹고 많이 생산하여 보국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라고 말했다.

1944년 1월 15일 오후 1시 진주극장에서 국민총력연맹 진주부연맹, 대일본부인회 공동 주최로 최지환 등이 참석하여 '학병장행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최지환은 진주부윤을 대신해 축하하는 자리에서 "반도 학병들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며 황국반도(皇國半島)에서 출진(出陣)하는 학병들의 헌충보국(憲忠報國) 하기를 바란다"라고 역설했다.

1944년 2월 27일 진주상업사봉대(晋州商業仕奉隊) 후생부장으로 선출되었고, 다음달 3월 10일 진주 신사에서 진주 지역의 상인들이 모인 가운데 결성식을 가지면서 사봉대의 임무를 "대동아전쟁에 적극 협력하여 쌀과 물자 등을 총력 동원해 지원"하는 것이라며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 경남도협의회 의원에 당선된 최지환. 부산일보 1941. 6. 21.
ⓒ 전갑생
또한 1944년 3월 4일 그는 진주부민들의 비행헌납운동을 적극 홍보하고, 중견 인물로 앞장서 '부민호(府民號)'를 헌납시키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해방을 1년 앞두고 최지환은 '황국신민'으로써 충실한 친일파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매일 동남아시아로 징병되어 가는 조선인 학생들을 위해 '잘 죽어라' 라는 메시지를 전달했으니 '광분한 친일파' 그 자체였음을 보여준다.

반민특위에 검거되다!

▲ 태평양 전쟁 당시, 최지환은 전쟁물자, 비행기 보내기 등을 펼쳤다. 사진은 부산일보 1944. 3. 4
광란의 친일파 전성기가 끝난 1945년 8월 15일.

전 민중들이 염원하던 친일파 청산은 미군정을 실시하면서 요원해지는 듯하다가,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설치되면서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여기에 최지환은 1949년 2월 21일 반민특위 경남지부에 체포되어 서울 소재 특별검사부로 송치되었다. 그러나 최지환은 49년 7월 보석으로 풀려나면서 속죄하지 않고 자유의 몸으로 돌아갔다. 그 수많은 친일행적을 단죄하지 못한 채 반민특위도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지환 같은 친일파들은 속으로 얼마나 '쾌재(快哉)' 라고 소리치며 웃었을까.

당시 한 신문은 친일파 청산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 1942년 5월 21일 전시체제하에서 식량대책을 강구하는 좌담회에 참여한 최지환.
"오늘이 8월 31일이다. 오늘로써 말썽 많고 파란 많던 반민족행위처벌법도 그 공소시효기간이 만료되고 따라서 반민족행위자들은 이제는 대체로 안심할 수도 있게 되었다… 반민족 행위를 한 자들의 이름만 한번 들어보아도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자들은 일제시대의 왜놈들에게 아첨하여서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지위는 날이 갈수록 튼튼해질 따름이고 따라서 처음에 반민자의 처단을 바라던 국민들도 이제는 지쳐버려서 더 말할 기운조차 없게 되려하였다. 그러나 반민법을 제정하고 정작 일을 시작하여 보니 걸리는 자는 지금까지 사회에서 또는 심지어는 관청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없지 않게 되었다.

요컨대 한 말로 말하면 반민자의 처단은 실패에 돌아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국민 일반의 기대를 저버린 바 자못 크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최지환 같은 친일파들을 오래 동안 살아 남게 했다. 최지환의 삶은 청년시절부터 '일본놈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황국 광신자'였다. 그의 굴욕적인 친일행각은 진영대 해산의 주역으로, 기생조합 재설립자로, 친일 정치인으로, 중추원 참의까지 이어졌다. 그는 지금도 진주지역의 유명한 친일파로 청산해야 할 역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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