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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령 500여년의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학포당 전경, 이 곳은 생전에 양팽손이 기거했던 곳이다.
ⓒ 오창석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는 38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패하고 침체된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였던 신진 사림들에게는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지도자였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학자요, 정치가로서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정암은 현실정치에서 패배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다.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반복해서 돈다는 말처럼, 정도전이 개국 초기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가 정비한 이념과 제도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안정된 기틀 위에 올려놓았듯이 성리학으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지치주의(至治主義)에 기초를 둔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했던 정암의 이상은 그가 죽은 후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뿌리를 내렸다.

중망을 바탕으로 임금의 신임을 얻어 상승세를 탔을 때는 구만 리를 날아갈 기세였던 대붕은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자 날개가 꺾인 상처투성이의 새가 되어 이곳 화순 능주의 한 초막에 내려앉았다.

▲ 조광조가 한달여 동안 머물렀던 초가(적려)
ⓒ 오창석
35일간의 짧은 귀양살이 동안 그는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왕이 곧 불러 줄 것을 기대하며 앞날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밤마다 고단한 몸을 눕히며 사약을 받는 꿈에 몸서리쳤을까.

차가운 아침 초막의 뜰에 쌓인 소담스런 백설을 바라보며 인간사의 덧없음을 한탄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완전히 격절(隔切)된 상태는 아니었고,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지우(知己之友)가 있음으로써 위안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가 능주에 머문 동안 수시로 찾아와 위로가 되어준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곳에 고향을 둔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이었다. 양팽손은 일찍이 18세의 어린 나이에 경기도 용인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고 21세때에는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후 같은 해에 급제한 정암과 더불어 성균관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다.

그는 정암과 함께 경연(임금이 공부하는 자리)에도 나가 진강(進講,강의)하였는데 박세희, 최산두, 기준과 함께 기묘(己卯) 사학사(四學士)의 명성을 얻을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 죽수서원 전경. 조광조와 양팽손이 함께 배향된 서원.
ⓒ 오창석
32세때 기묘사화(1519년,중종14년)가 일어나자 소장을 올려 간하였다가 그해 12월에 파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그곳에 마침 귀양살이를 와 있는 정암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들은 매일 같이 만나 경론을 탐구하고 지내지만 그것도 잠시, 정암은 유배된 지 35일만인 12월 22일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라
- 조광조의 절명시(絶命詩)-

어두운 세상에 횃불을 밝히려 했던 위대한 지도자가 모질고 거친 풍파에 쓰러져 죽었건만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리 있는 학포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수습하여 산 속에 은닉해 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경기도 용인으로 운구하였다.

세상이 안온할 때 신념이나 용기 그리고 의리를 말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막상 자신의 몸에 해가 미칠 것을 알면서 의로운 일을 행하기란 범인으로선 어려운 일이었다. 그 뿐 아니었다.

▲ 적려유허비 옆 영정각에 봉안되어 있는 조광조의 영정.
ⓒ 오창석
학포는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신잠, 김구, 최산두 등을 방문하여 의리를 다하였고 그 후에는 정암의 시신을 숨겼던 중조산 아래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25년 동안 은거하며 경론의 탐구와 서화(書畵)에 몰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특히 그가 그린 묵죽도는 후세에 안견의 화풍을 계승한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었고, 산수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산수도에는 “고깃배야 오고 가지 마라. 행여 세상과 통할까 두렵노라’라는 오언시(五言詩)가 씌어 있는데 의롭지 못한 세상과 단절한 그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정암은 일찍이 그를 두고 “학포와 얘기하면 마치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풍기는 것 같다.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걷힌 뒤의 밝은 달이라. 세속의 욕망이 깨끗하게 없어져 버린 사람이다”고 하였다.

학포는 정암과 함께 사액서원인 전남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의 죽수서원(竹樹書院)과 경기도 용인 수지면 상현리의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는데, 그 중 심곡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정암의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가 있는 능주면 남정리는 광주에서 40분 거리이고 죽수서원, 학포당은 그곳에서 승용차로 30분 이내의 거리에 있다. 인근에는 학포당이 있는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에서 5분 거리에 쌍봉사가 있다.

학포 선생이 어려서 공부를 했다는 이 쌍봉사는 신라 경문왕 시기에 지어졌다는데 12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건축양식이 특이한 아름다운 고찰이다. 여기에는 신라 최고의 부도로 일컬어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걸작품인 쌍봉사철감선사탑(부도)과 탑비가 있다.

▲ 고요하고 아름다운 절 쌍봉사. 절 옆으로 난 대숲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철감선사 부도가 나온다.
ⓒ 오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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