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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민의 시대다. 대선 출구조사가 발표되고 시시각각 보도되는 개표방송을 지켜보면서 가슴 속 깊이 울리던 말이다. 더 이상 조작되고 이용 당하던 국민은 없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체적인 시민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은 최근의 촛불행사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대하면서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망령이 시민들의 힘으로 걷혀가는 걸 보면서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도 광화문에 출동을 나간다. 월드컵의 광장 광화문. 지난 여름 작열하는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열기 속에서 피곤한 줄 모르고 우리 경찰은 서 있었다. 그리고 똑같은 장소에서 두 여중생을 추모하면서 민족의 자존과 자주를 외치는 촛불시위에 우리 기동대원들은 여느 겨울과는 달리 곤혹스럽게 보내고 있다.

그러나 오늘 광화문으로 향하는 마음은 무겁지 않다. 진짜 시민들의 촛불을 느낄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일부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촛불시위에 대한 경찰의 대처는 사실과 다르다. 촛불행사 자체를 막거나 진압하지 않는다. 촛불시위에 대한 최초의 제안자인 앙마님이 우려하는 진압은 없다.

"경찰에게 이 자리를 빌어 한마디 하고 싶다. 경찰은 시위대의 보호자가 돼야 한다. 진압하지 말라. 우리는 순수한 평화 시위를 열 것이다. 반만이라도 광화문 공간을 열어달라. 범대위에는 범대위 홈페이지의 인터넷 게시판을 검열, 글을 삭제한 것에 대해 항의하고 싶다."(오마이뉴스 인터뷰 중에서)

지난 31일 촛불행사를 앞두고 열린 경찰의 대책회의에서는 광화문에 차량 바리케이드를 치는 문제를 두고 일선 중대장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범대위 등 일부 단체의 과격성과 폭력성을 감안하더라도 차량으로 열린 공간을 막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고 경찰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결정이 고육지책이지만 정확한 판단이었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12월 7일, 대규모 촛불시위가 시작될 때 경찰이 내린 결정은 근무복과 교통복으로 혼잡질서 경비 차원에서 배치하는 것이었다. 지난 월드컵때처럼 모이는 인파에 따라 축차적으로 폴리스라인을 넓혀 추모행사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 12월 7일 촛불행사, 질서유지 차원에서 근무복으로 배치된 기동대원
ⓒ 이동환
그 결정을 내린 고위간부에게 되돌아온 것은 비난과 책임추궁이었다. 근무복만을 입고 폴리스 라인을 들고 있던 기동대원들은 여지없이 시위대에게 쫓겨나고 미대사관 등 집회시위에관한법률상 금지된 장소까지 침범이 되어버린 것이다.

뒤에 따라다니는 시민과 네티즌들은 '비폭력 평화행진'을 외치며 영문도 모른 채 탈법자가 되어버렸다. 경찰관이 유령이 아닌 이상 폴리스라인을 그냥 지나쳐 올 수는 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언론은 비폭력적인 평화시위였다고 보도하였다.

12월 14일은 시청광장에서 대규모 촛불시위가 열리던 날이다. 경찰은 오후 이른 시간부터 시청앞 광장에 교통경찰관과 여경으로 폴리스라인을 이용하여 늘어나는 인파에 따라 행사 공간을 확보하여 주었다. 지난 여름 덕수궁 앞의 촛불시위때처럼 순수한 추모행사로 보고 집시법상 신고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범대위측은 "미대사관을 포위하자"면서 세종로를 점거하면서 행진을 강행하였다. 시위대가 표현한 경찰저지선이란 것은 없었다. 폴리스라인(경찰통제선)이 시청앞 광장 집결시부터 점점 넓혀진 것뿐이었다. 그날 촛불행사에 참가했던 분들은 광화문 사거리까지 큰 저항없이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적으로 보도되던 사진 한 장이 찍혀졌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경찰통제선 앞이었다.

나는 이순신 동상 앞에 서 있었다. 시청에서부터 행진해오는 촛불의 일렁임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 촛불 속에는 내 아내, 그리고 아들과 딸도 있었다. 지난 월드컵때도 경찰관인 가장을 믿고 광화문사거리에 왔었다. 그때 그마음으로 그날 참가한 것이다.

뒤에 있는 우리 대원들은 행진대열이 가까워오자 잔뜩 긴장하는 것 같았다. 행진대열은 아주 느리고 평화롭게 내가 서 있는 폴리스라인을 1-2미터 앞두고 다가와서는 멈추어 섰다. 몸싸움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제서야 우리 대원들도 긴장을 푸는 것 같았다.

촛불대열 속에는 시끄러운 확성기도 없었고 욕설과 위협도 없었다. 육성으로 두 여중생을 추모하고 불평등한 소파규정을 개정하라는 외침이 있었을 뿐이다. 시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런 아름답지만 강력한 시위는 깃발이 몰려오고 방송차량이 선두로 나오면서 짙은 긴장감으로 돌변하였다. 깃발과 방송차량이 시민과 네티즌을 뒤로 밀어내기 전까지 그 공간은 이웃과 이웃, 그리고 시위대와 경찰관 사이의 커뮤니티 공간이었다.

깃발이 보이기 시작하자 시민과 네티즌 사이에서 "내려라 내려라"하는 구호가 외쳐졌다. 경찰버스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이자 "내려와라 내려와라"하는 구호도 들렸다.

사람들이 서 있는 공간을 비집고 모정당의 연설차량이 들어왔다. 10톤은 넘어보이는 거대한 차량이 사람들을 아슬아슬하게 밀어내며 폴리스라인에 바짝 다가왔다. 기동대원들은 또 다시 긴장하였다. 그러나 그 차량을 시민들이 가로막고 섰다. "나가라 나가라" 시민의 힘이었다. 그 거대한 차량은 맨꼭대기에 탄 어느 스님의 목탁소리를 남기며 위태위태하게 후진하여 나갔다.

그러더니 곧바로 깃발을 올린 젊은 사람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우리 앞에 서 있던 시민들은 밀려서 뒤로 들어갔다. 그 젊은 사람들은 곧바로 경찰관에게 몸을 붙였다. 그리고 밀기 시작하였다. "평화롭게 행진하는데 왜 경찰이 막아서느냐"고 어느 여자가 외쳤다. "미국경찰 XX" "폭력경찰 물러가라"

▲ 12월 14일 세종문화회관쪽, 대원들이 시위대 속으로 끌려가고 있다
ⓒ 이동환
앞에 선 여자가 몸이 눌려 질식 직전인데도 뒤에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확성기로 그 사실을 알리면서 조금 뒤로 물러설 것을 설득했으나 젊은 학생 하나가 확성기를 밑으로 확 잡아 끌었다. 무전기를 나꿔채려는 시위대도 있었다. 밀리지 않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춘 대원들의 철모끈을 잡고 흔드는 사람, 방패에 발길질하는 사람, 대원들을 뜯어내 시위대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 그날 곳곳에서 부상당한 경찰관은 중상 1명을 포함하여 27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보았다. 그렇게 몸싸움을 시도하는 대열은 불과 5-6줄에 불과하였다. 그 뒤로 공간을 두고 시민들이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범대위만의 집회시위에서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나는 여중생사건 이전부터 범대위 시위에 많이 동원되었다. 물론 그때는 범대위도 다른 단체이름이었지만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달라진 것이 없다.

나름대로 이 사회를 위하여 외로운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고 거친 시위현장에서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행동과 언행에 대해서는 많은 실망을 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주최측을 따르는 시위대를 속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경이다. 종묘공원에서 종로2가 젊음의 거리 입구까지 행진신고를 하고 정말 평화롭게 행진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확성기를 통해서 "우리가 정당하게 명동성당까지 행진을 하려는데 경찰이 가로 막고 서 있다. 폭력경찰 물러나라"고 외치면서 여경 폴리스 라인을 마스크를 한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밀어붙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충돌이었다. 양측에 부상자가 발생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 12월 14일 경찰버스 위에서 깃발로 공격하는 시위대
ⓒ 이동환
뒤에서 따르던 사람들은 주최측의 일방적인 선동선전에 같이 흥분하여 도로를 점거하기 시작하였다. 넓은 시위현장에서 상황을 전파할 시간도 없이 집회시위는 '불법 폭력시위와 경찰의 폭력 진압'이란 이미지로 단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난 이번 촛불시위가 범대위 등 몇몇 단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고 본다. 바로 한 네티즌의 제안이 '공감'을 형성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았다. 주도되지 않고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시민의 힘을. 더 이상 조작당하지도 끌려다니지도 않는 시민의 자각을.

12월 21일, 24일, 28일 촛불행사가 이어지면서 인터넷상에는 행사 주최측에 대한 우려와 충고의 소리가 그 당시에는 '마이너리티 리포터' 형태로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보수나 진보. 그 어느쪽도 시민의 작은 목소리를 무시하는 쪽은 이제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12월 31일, 범대위는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작은 목소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인터넷 보도를 보니까 세종로 이순신 동상앞에서 진행하려고 집회신고를 냈는데 경찰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썼다. 사실과 다르다. 촛불추모행사는 집시법상 신고대상에서 아예 제외되어 있다. 그것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미대사관쪽으로 행진하거나 불필요하고 과도하게 도로를 점거하려할 때 집시법이 적용되는 것이다.

▲ 12월 31일 물리적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한 경찰의 로드 브로킹
진실은 이렇다. 아침부터 경찰과 범대위측과 신경전을 벌였다. 추모행사로 간주하였기에 교보문고 옆에서 진행되는 촛불행사에 대해서는 혼잡경비 차원에서 경찰이 교통 경찰관을 배치하여 보호해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인파가 얼마 되는지도 모르므로 범대위측에 처음부터 광화문 사거리에 고정된 특설무대를 설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통보하였다.

행사장소인 교보문고 옆길은 제야의 종 타종행사와 맞물려 어차피 도로가 통제되므로 그곳에 차량을 이용하여 무대를 설치하고 촛불행사를 진행토록 하였다.

실제 범대위측은 대형트럭 두 대로 도로를 가로질러 무대를 설치하였다. 오후 3시 반경에는 충돌이 있었다. 범대위 행사 준비 차량에서 신나 60리터를 경찰이 압수한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의 인화물질은 위험성이 크므로 압수한 것이다. 그것을 두고 범대위측에서 경찰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경찰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니까 오늘 고생을 시키겠다라고 공언했다는 첩보가 무전기를 통해서 전달되어서 경찰은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공언은 현실로 드러났다. 미대사관으로 진출하여 인간띠잇기를 하자고 선동하고 어린 여중생까지 몸싸움 대열에 밀어넣으며 비각쪽으로 밀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몸싸움을 받아주더라도 노약자나 부녀자들이 있으면 곤혹스러워한다는 점을 범대위측은 일찍부터 이용하여 왔었다.

"경찰을 하나하나씩 뜯어내어 시위대 뒤쪽으로 보내라"는 확성기 소리도 들렸다. 12월 14일에 쓴 방법으로 촛불시위대의 일부가 미대사관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비폭력 평화행진(?)' 방법이었다. 그러나 31일에는 더 이상 옆에 있던 시민들의 힘을 모으지 못하였다.

일부 젊은 사람들이 경찰의 차량 바리케이트를 넘어서 이순신 동상쪽으로 왔으나 '폴리스 라인'을 침범한 위법사실을 알리면서 설득하자 대부분 사람들은 다시 나갔다. 범대위측에서 선정했다는 질서요원 표식을 가슴과 등에 단 사람이 차량 위로 올라가려다 제지되었다.

버스를 넘어뜨리려고 차량을 밀 것을 선동하는 것도 목격되었다. 실제로 버스는 전복되기 직전에 뒤에서 기동대원들이 겨우 지탱하였다. 현대해상쪽에는 주최측의 한 명망가가 경찰지프차 위에 올라가 차량을 파손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버스 위에서 내려지자 대원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행사한 30대(오마이뉴스 기사 중 사진이 게재되어 있더군요)는 폭력혐의로 체포되어 청진파출소에 인계되었는데, 가족이 전화로 정신과 치료 전력이 있음을 이유로 훈방을 호소하여 훈방되었다.

위험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신문지에 불을 붙여서 버스 밑으로 던져넣는 것도 발견되어 급히 소화기로 끄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결국 경찰대처의 품위를 걱정하면서 버스 바리케이트 설치를 반대하던 나로서는 할 말이 없게 되었다. 31일 그런 완충지대가 없었다면 물리적 충돌은 보다 광범위하게 일어났을 것이고, 불상사에 어두운 마음으로 제야의 종소리를 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경찰과 사회. 이 양 공간만 생각한다면 늘 상대방이 상대방을 도와주는 꼴을 많이 봐왔다. 과격 진압이 문제가 되어 정권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고 또 과격 폭력시위가 사회를 얼어붙게 한 적도 있었다.

월드컵 축제처럼 촛불 추모행사를 보호해주자던 경찰 내 비둘기 목소리는 이제 입지가 거의 없다. 하지만 오늘 촛불행사의 변화에 따라 그 입지가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가 촛불의 일렁임을 타고 세계로 전달되도록 하자는 순수한 촛불행사. 증오의 목소리가 걸려진 진정한 평화의 목소리가 서울역 광장이든, 여의도 광장이든, 강남의 로데오 거리이든 울러퍼지길 빌어본다. 시끄러운 확성기의 소음 속에 눈살을 찌푸리고 지나가는 시민이 아닌 낮은 목소리로 서로 교감하는 모습에 미소를 보내며 지나가는 시민이 많은 그런 촛불 시위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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