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03 19:31최종 업데이트 22.12.03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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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선교사로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다. ⓒ 위키피디아

 
1860년대는 커피 역사에서 큰 전환기였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산업혁명으로 도시화가 급속히 이루어졌고, 농토를 잃은 많은 농민들의 삶은 궁핍해졌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중남미, 특히 브라질, 쿠바, 과테말라 등으로 이주하였다. 커피의 대중화에 따른 가격의 폭등, 중남미 커피 농장의 확대, 노예무역 폐지에 따른 커피 노동자 부족이 불러온 인구 이동이었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등으로부터의 이주자가 많았다.

자바를 비롯한 동인도와 쿠바가 이끄는 서인도가 양분하고 있던 커피 생산 시장에 브라질이라는 거인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미국과 브라질에 철도가 개설됨으로써 커피의 이동이 한결 쉽고 빨라진 것도 이즈음이었다.


조선의 천주교 제4대 주교 베르뇌 신부가 홍콩에 커피 40리브르(파운드)를 주문한 것이 1860년 3월 6일이었다. 조선 최초의 커피 주문이었다. 베르뇌 신부가 주문한 커피는 다른 물품들과 함께 주문 다음 해인 철종 12년(1861년) 4월 초 백령도 북방에 있는 무인도 월내도를 통해 입국한 랑드르, 조안노, 리델, 칼레 등 네 명의 신임 신부들 편에 한양에 있던 베르뇌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커피가 포함된 물품 꾸러미를 들고 네 명의 신부가 한양에 도착한 것이 1861년 4월 7일 새벽 5시경이었다. 구입을 요청한 지 정확하게 '1년 1개월 1일' 만이었다. 아마도 세계 커피 역사에서 주문 후 배달까지 걸린 최장 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베르뇌 주교가 1861년 8월 22일에 파리외방전교회 프랑클레 신부에게 보낸 답글에서 새로 부임하는 네 명의 신부들이 "짐 꾸러미 60개를 가지고 아무 사고 없이 입국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같은 해 9월 4일 알부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들 4명의 신부들이 보름간 한양의 베르뇌 주교 집에서 머문 후 리델 신부는 베론의 신학교로, 조안노 신부와 칼레 신부는 손골(현재의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로 떠났고, 랑드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 곁에 남았다고 기록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보름간 한양에 함께 머물렀던 4명의 신부들과 기다리고 기다리던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셔본 초기 조선인들

당시 커피가 전달되었던 베르뇌 주교의 남대문 밖 자암이란 곳은 염천교 동쪽 지역으로 마을에 자색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동네 이름이었다. 지금은 순화문화공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자암 마을에서 베르뇌 주교와 함께 기거하거나 자주 드나들었던 조선인 신자 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집을 자신의 이름으로 구입하여 주교가 살도록 한 홍봉주 부부, 주변에 거주하며 주교를 도왔던 정의배와 피가타리나 부부, 원윤철, 이선이, 김성실, 이바르바라, 김입돌, 피바오로 등이다. 이들이 베르뇌 주교와 함께 홍콩에서 들어온 커피를 마셔본 초기 조선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61년 9월 30일에도 베르뇌 주교는 커피 50리브르를 주문하였다. 이런 요청은 2년 후인 1863년 11월 24일에 커피 50카티스(상자), 그리고 1865년 12월 4일에 커피 100리브르를 요청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베르뇌 주교가 구입 요청을 하였던 커피 50리브르(22.7킬로그램)나 100리브르(45.4킬로그램), 혹은 50카티스는 적은 양이 아니었다. 베르뇌 주교는 물품 구입을 요청하는 서신에서 구입을 의뢰하는 물품의 종류나 양이 많아짐으로써 반입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표현을 자주 할 정도였다.

요청 물품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미사용 제복과 초, 촛대, 미사주, 십자가, 상본, 교리서 등 신앙생활이나 종교의식에 필요한 물품이었는데, 이런 가운데 커피를 40, 50, 혹은 100리브르씩 주문하였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베르뇌 주교의 서신을 읽어보면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개인적 기호품을 무리하게 요청하였을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주변의 조선인들 중 선교사들로부터 커피를 받아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커피가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당시 조선인 중 베르뇌 주교의 권유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조선인 신자들이 꺼려하는 음료를 무리하게 반입해 마셨을 리는 없어 보인다.

'우유 넣은 커피' 부탁도
 

튀르키예(터키)식 커피 ⓒ pxhere


19세기 중반 유럽인들이 마시는 커피는 대부분 튀르키예(터키)식으로 만들었다. 커피가루 소량을 설탕과 함께 주전자에 넣고 끓인 후 찌꺼기를 걸러내고 잔에 따라서 마시는 방식이다. 당시 커피 한 잔에 사용되는 커피 가루의 양은 요즘 마시는 드립커피나 에스프레소 제조에 사용되는 커피가루 양보다는 매우 적었다.

커피 마니아였던 베토벤이 커피를 만들 때 사용했다는 60알의 커피콩 무게가 7그램 내외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일반인들은 커피 한 잔을 위해 그보다 적은 4~5그램 정도를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북전쟁 시기였던 1860년대 미국에서 북군 1명이 하루에 공급받았던 원두 43그램으로 10잔의 커피를 내려 마셨다는 것을 고려하면 당시에는 많아야 원두 4~5그램으로 한잔의 커피를 내렸다.

커피 생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커피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까지 커피는 세계 어디에서나 귀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연한 커피에 우유와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이 보통이었다. 베르뇌 신부의 편지에도 이런 모습이 보인다.

그가 서신 속에서 커피 이야기를 처음으로 한 것은 1858년이었다. 만주의 베롤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뇌 신부는 조선에 종교의 자유가 생기고, 자기가 만주를 방문하게 되면 조선의 선교 자유를 축하하는 의미로 "우유를 넣은 커피"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보면 1860년대 초 베르뇌 신부가 주문했던 22.7~45.4킬로그램 정도의 커피 원두로 끓였을 커피는 적어도 5천 잔에서 1만 잔, 조금 묽게 마셨을 경우에는 그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하루에 적게는 15잔, 많게는 30잔씩 1년 동안 매일 마실 양이다. 서양 물품의 구입 요청과 반입은 1866년 2월 하순 시작된 병인박해 때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순교로 끝났다.

기독교 전파에 커피 활용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 가능한 한국에서 최초의 커피 음용 주인공은 베르뇌 주교, 그에게 커피를 전달한 랑드르, 조안노, 리델, 칼레 신부, 그들을 위해 커피를 끓였을 조선인 신자 중 한 명이었고, 그날은 1861년 4월 7일이었다. 4월 7일은 우리나라에 커피가 전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의미 있는 날이다.

한국에 커피를 처음으로 전한 베르뇌 신부는 대원군의 출국 권유를 물리치고 머물다가 1866년 병인년 2월 23일에 한양에서 체포되어 3월 7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를 밀고한 것은 커피를 끓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자 이선이였다.

이렇게 시작된 병인박해 속에 리델, 페롱, 칼레 세 명의 신부만이 중국으로 피신했다. 병인양요가 발발하는 배경이 되었다.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들이 다시 조선을 찾기 시작한 것은 10년 후인 1876년 개항과 함께였다. 블랑 신부가 1876년, 리델 신부가 1877년에 입국하였고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함으로써 이들에 의해 커피는 적지 않게 반입되고 주변에 소개되었을 것이다.

훗날 유길준이 <서유견문>(1889년에 집필을 마치고, 1895년 간행)에서 조선에 커피가 들어온 것은 중국을 통해서였다고 서술한 것이 사실에서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천주교가 경유한 곳도, 그리고 천주교 신부들이 밀입국을 하거나 물품을 반입하는 데 이용한 통로도 모두 중국 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최초의 커피 전래는 미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중국을 통해서였다.

기독교의 전파 과정에서 커피가 활용되었던 것은 영국에 의한 동남아시아와 중국 남부 지역 선교 역사 속에서도 발견된다. 조선의 천주교 선교 초기 역사에서도 커피는 의미 있는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유튜브채널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2018). 베르뇌주교서한집 상,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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