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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은 10월 27일 늦은 오후 경남공익지원활동센터 ‘목마름 채움 강좌’에서 “김명시 장군은 왜 잊혀졌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은 10월 27일 늦은 오후 경남공익지원활동센터 ‘목마름 채움 강좌’에서 “김명시 장군은 왜 잊혀졌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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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시 장군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고, 틀림없는 독립운동가‧혁명가였다."

'백마탄 여장군' 또는 '조선의 잔다르크'로 불리었던 김명시(金命時 1907~1949) 선생이 올해 광복절 때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는데 앞장섰던 김영만(78)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이 한 말이다.

27일 오후 김영만 고문은 경남공익지원활동센터 '목마름 채움 강좌'에서 "김명시 장군은 왜 잊혀졌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며 그의 삶과 정신을 더듬었다.

마산 출신 김명시 선생은 어머니(김인석), 오빠(김형선), 동생(김형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직후 서울에서 활동하다 해방공간에서 극력한 이념 갈등으로 인해 부평경찰서에서 사망했다.

김영만 고문은 "서훈을 받기까지 김명시 장군의 흔적을 찾으면서 여러 차례 놀랬다"며 "2000년대 이전까지는 누구한테도 김명시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고, 그만큼 마산 사람들한테서도 잊혀졌던 인물이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사회주의 독립운동'이라 알려내는데 소극적이었다. 그러다가 영화 <밀정>과 <암살>이 나오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며 "우리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김명시 선생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국가보훈처 서훈 신청을 떠올렸다. 이후 언론에서 보도하면서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고 열린사회희망연대가 세 차례 신청(재심)한 뒤에야 김명시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양한 항일투쟁을 한 독립투사"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은 10월 27일 늦은 오후 경남공익지원활동센터 ‘목마름 채움 강좌’에서 “김명시 장군은 왜 잊혀졌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은 10월 27일 늦은 오후 경남공익지원활동센터 ‘목마름 채움 강좌’에서 “김명시 장군은 왜 잊혀졌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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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문은 "처음에 국가보훈처가 '해방 후 행적 불분명'이라는 이유를 붙여 심사 탈락시켰는데, 그것이 오히려 우리가 자료를 더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며 "그때 보훈처에 전화를 걸어 '해방 후 행적은 인터넷 검색을 하면 다 나온다'며 항의했던 일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보훈처에서 '김명시'라는 이름만 보고, 우리가 보낸 소명자료도 제대로 보지 않고 제외시켰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며 "보훈처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성명도 내고 언론에도 나오고 했다. 그 뒤에 보훈처 직원이 2021년 11월, 창원까지 와서 우리와 함께 친인척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가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김명시 장군의 항일을 설명한 그는 "약력에 보면 '천진, 제남, 북경, 태원 등 항일전선 활동'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때 그곳은 바로 일본군 점령지다. 적군 속에 들어가서 항일투쟁을 했던 것"이라며 "의용군을 모집하기 위해 일본군대 바로 앞까지 가서 활동했다. 매일 목숨을 내놓고 활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김명시 장군처럼 다양한 항일투쟁을 한 독립투사가 없을 것이다. 조직부터, 적지에 가서 활동하고, 심리전도 벌였다. 그때는 양철로 원 형태로 만들어 입에 대고 외쳤는데, 확성기가 없으니까 사람들 가까이 가야 하기에, 일본군대 50미터 앞까지 가서 활동했다."

김 고문은 "김명시 장군은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까지 잘했다. 아주 대단한 능력을 가졌고, 일본경찰의 고문도 잘 견뎠다고 한다"고 했다.

해방 이후 김명시 장군을 소개한 언론 자료가 많다. 1945년 11월 28일자와 12월 22일자 <중앙신문>에는 "연안의 항일투사, 김명시 7장군", "독립동맹의 여장군 김명시"라 소개되어 있고, 194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는 "조선의 짠타크(잔다르크) 현대의 부랑인 연안서 온 김명시 여장군 담"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또 노천명 시인은 잡지 <신천지>(1946년 3월 1일)에 "팔로군에 종군했던 김명시 장군의 반생기"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이를 언급한 김영만 고문은 "친일했던 노천명이 김명시 장군의 독립항쟁을 극찬하는 글을 썼다"고 했다.

김 고문은 "해방 이후 김명시 장군이 서울에 오자 많은 언론들이 소개했다. 강연회, 집회에 많이 나가 연설을 했는데, 그때 많은 인사들이 했지만, 언론들은 김명시 장군의 연설을 중심으로 다루었다"고 했다.

김 고문은 "1945년 12월 26일 서울에서 군대 조직을 위한 대표자회의가 열렸다. 그 때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참석해 연설했다. 김구 선생 등 여러 인사들도 연설을 했는데, 김명시 선생의 연설 주요 내용이 신문에 실려 있을 정도였다"며 "한 대목을 소개하면 '앞으로 조선의 오빠, 동지들이 적의 총탄에 맞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혁명은 피 없이는 안 되고 타협은 없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자'고 했다"고 소개했다.

오동동 '학교길' 벽화-글 문제 제기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성호초등학교 사이 오동서1길 돌담 골목길에 조성된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 관련 벽화.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성호초등학교 사이 오동서1길 돌담 골목길에 조성된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 관련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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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김영만 고문은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거리에 조성되어 있는 '김명시 장군 학교길'의 벽화와 글의 내용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 '학교길 벽화'는 2020년 10월, 창원시가 도시재생‧여성친화사업으로 진행해 놓은 것이다.

김 고문은 벽화 가운데 김명시 장군이 경찰복장을 하고 있는 그림을 특히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김 고문은 "김명시 장군을 선양한다고 해서 벽화를 그려 놓았는데, 김명시 장군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유관순처럼 잘 알려져 있다면 이렇게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런데 두만강 넘어 독립군 잡으러 가는 일본경찰을 연상하는 경찰 복장은 아니라고 본다"며 "그냥 알려진 대로 말을 타고 가는 모습 정도면 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벽화 안내판에 적혀 있는 글에 대해, 김 고문은 "왜 하필 '공산당'만 써 놓았느냐"고 했다. 다음은 벽화 글 일부다.
 
"... 1927년 중국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상해한인지부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1932년 1월까지 중국공산당 본부에서 활동하였다. 동년 3월 서울로 돌아와 '코뮤니스트' 등 선전물을 인쇄, 배포하다 체포되어 6년의 옥고를 치렀다. ... 김명시 장군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일제강점기에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팔로군에 종군하였고, 조선의용군에 합류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서 '백마탄 여장군' '조선의 잔다르크로 칭송받았다는 일설이 전해지고 있다."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 옆에 있는 김명시 장군 생가터 표지판.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 옆에 있는 김명시 장군 생가터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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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열린사회희망연대가 오동동문화광장 옆 생가터에 새워 놓은 안내판의 글과 비교된다. 다음은 생가터 안내판 글 전문이다.
 
"마산합포구 동성동 189번지.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린 김명시(金命時 1907~1949)는 중국대륙에서 대일항전에 참전해 총을 들고 싸운 독립운동가이며 혁명가이다. 어머니 김인석, 오빠 김형선, 동생 김형윤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마산공립보통학교(성호초등)를 졸업하고 1925년, 18세에 모스크바 유학을 떠났다. 25세 때 중국에서 국내로 잠입하여 노동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직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활동하다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극렬한 이념갈등으로 인하여 1949년 10월 부평경찰서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정부가 올해 광복절에 김명시 장군한테 독립유공자 서훈하면서 밝힌 공적개요는 "정부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신 김명시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애국장을 포상하기로 결정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김영만 고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벽화 글)은 아니라고 본다. 학자들은 일제 때 독립운동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였다는 걸 안다. 그러나 학생과 시민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며 "벽화 글대로 해놓으니까 공산주의자한테 왜 훈장을 주느냐는 소리가 나오고, 벽화를 훼손(이후 복원)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 고문은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 구호'를 소개했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완전 타도, 조선의 완전 독립'과 '8시간 노동제 실시와 최저임금제 제정', '실업자 구제와 사회보장제 실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식민지 노예제도 박멸'이다.

김영만 고문은 "일제 타도는 당연한 것이고, '8시간제'와 '최저임금'도 당연한 것이며, 실업자 구제와 사회보장제는 지금도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지 않느냐.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도 현대의 중요한 사회 가치다"며 "굳이 '공산당'을 언급해야 한다면, 그때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했다는 소개를 해놓아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지 않고 '공산당'만 써 놓으니 왜 공산주의자한테 서훈을 주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김 고문은 "벽화 그림과 글이 우리 지역 정서에 맞게 다시 수정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태그:#김명시, #독립유공자, #김영만, #백마탄 여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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