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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부산)강서노인종합복지관에서 펴낸 강서그림책 '예쁜 할매할배 이야기'에 실린 총 네 편의 이야기 중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출판 등록 되지 않은 비매품으로 소량 발간된 책자입니다. 저는 사회복지 분야에서 20년 넘게 일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치매에 들더라도 사회에서 격리되지 않고 다함께 살아가는 마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기자말]
아래 동화 내용은 KBS 다큐인사이트 <조용한 혁명> 사례를 참고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 편집자말

저는 요양병원의 치매전문 병동에서 일하는 10년차 간호사입니다. 지금은 적응이 되었지만 일반 병원에 있다가 요양병원 근무를 시작했을 때 들었던 묘한 느낌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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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실의 풍경은 시간이 멈춘 듯, 정지 화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일과는 거의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가끔 돌출 행동으로 존재를 확인시켜주시는 환자가 계시긴 하지요. 보통은 매뉴얼 대로 하면 이내 과잉행동은 해결됩니다. 가급적 사용을 자제하지만 환자의 안전을 위해 가끔 억제대를 사용하고요. 그래도 안 되면 증상을 억제하는 약을 처방 받아 씁니다. 그러니 다들 누워만 지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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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마 전 뭔가 작은 기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일어난 것 같다'는 표현을 쓴 건 지금 생각해도 어리둥절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가 정말 가능했었나? 왜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치매환자 돌봄 10년간 내가 알고 있던 답이 정답이 아닐 수 있고 전혀 새로운 해답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체험을 나누고 싶어 최근에 겪었던 기적같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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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가명) 할아버지는 우리 요양병원에서 소문난 사람입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하의 악동으로 통합니다. 가까이 가서 말을 걸면 욕부터 뱉으시죠. 어깨를 잡을라치면 깡마른 주먹이 먼저 날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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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는 날은 직원들에겐 침으로 세례 받는 날입니다. 새로 오는 간호사나 간병사에겐 할아버지를 포함한 주요 블랙리스트와 다루는 요령을 알려줘야 봉변을 피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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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저희 병원에 행사가 있었어요. 한 외국인 강사를 초빙해서 치매환자를 돌보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는 행사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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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도중에 외국인 강사가 물었습니다. "병동에서 제일 다루기 힘든 환자가 누구인가요?" 미리 짠 것도 아닌데 한 목소리로 터져 나왔죠. " 김기동 할아버지요~!" 이윽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참았습니다. "큭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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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강사는 망설임도 없이 말합니다. "네 그분께 안내해 주시겠어요?" 저는 순간 직감했습니다. "이 강사... 믿는 구석이 뭔지는 몰라도 망신당할 게 뻔한데... 과연 뭐라고 둘러댈까?" 한 목소리로 김기동 할아버지를 지목했던 동료들 역시 눈빛으로 이신전심을 주고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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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방문 앞에 다다를 즈음 무거워진 발 때문인지 입을 겨우 뗐습니다.

"강사님, 문... 열까요?"

강사님은 의외로, "NO, NO~" 하시더니 노크를 하셨습니다. "똑똑똑." 노크 소리를 듣고 문을 열려는데 강사님은 또 한 번 저를 말렸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간격을 두고 한 번 더 똑똑똑~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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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야 문을 스케이트 밀듯 부드럽게 열었습니다. 김기동 할아버지는 낯선 얼굴의 방문에 눈을 치켜떴습니다. 강사는 할아버지의 미세하게 떨리는 눈과 나란히 맞추면서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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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곤 할아버지의 팔꿈치를 슬로우비디오처럼 밑에서 감쌌습니다. 평소의 할아버지 매뉴얼로는... 이 외국인 강사, 당연히 할아버지의 깡마르고 매운 손맛을 봤어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백태 낀 눈알만 굴리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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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이 외국인 강사! 절대 할아버지에게 하면 안 될 두 번째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앗! 김기동 할아버지를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거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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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모시기 위해 둘, 셋이서 잡아끌어도 땅에 박힌 돌덩이마냥 꿈쩍도 하지 않던 할아버지. 대신 뾰족한 발 날만 표창처럼 휘두르시던 할아버지가 신기하게도 순순히 일어서는 겁니다. 그리고 천천히 이 외국인의 도움으로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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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껏 이 할아버지는 못 걷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긴 걷는 모습을 본 적도, 걷도록 시도해 본 적도 없으니 안 걷는지 못 걷는지 몰랐다고 해야 정확하겠네요. 저는 이날 평생에 가장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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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똑같은 환자복을 입고 똑같은 침상에서, 똑같이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똑같은 치매로만 이 분들을 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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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는 오늘 치매에 걸린, 많은 환자 중 유별나게 고약한 노인이 아닌 김·기·동 할아버지를 발견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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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환자 역시 고혈압, 당뇨처럼 그냥 하나의 질환을 가진 사람인데, 치매로만 퉁 쳐서 똑같이 대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당뇨에 걸렸다고 해서 어머니가 아닌 당뇨환자로 돌변하는 게 아닌데, 치매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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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인생을 살았다면 팔십년 동안 켜켜히 쌓인 그 분만의 고유한 희망과 꿈, 욕망
그리고 좌절들이 다 다르고,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 역시 모두 다 다른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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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무슨 병에 들든, 어떤 상태에 있든, 저마다 다른 빛깔의 다이아몬드를 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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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주위 사람들이 나를 "넌 원래 이래" 하며 편견으로 대한다면 내 안의 찬란한 빛을 스스로 영원히 가둘 수도 있을 겁니다. 치매라고 왜 예외로 두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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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환자는 원래 못 걸어. 저 환자는 원래 말 못해. 저기 환자는 원래 공격적이야" 하면서 왜 편견의 대못을 박았을까요? 영원히 묻힐 뻔 했던 할아버지만의 빛나는 광채가 그제야 탈출하고 있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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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김기동 할아버지는 또 한 번 저희를 놀라게 했습니다. 혼자 지팡이로 걷는 모습을 기념하기 위해 할아버지 동영상을 찍고 있는데.... 세상에, 웃으시며 '말씀'을 다 하셨어요. 요양병원에 계시면서 욕설 외엔 말씀을 한 번도 안 하셨던 분이었거든요. "잘 찍어~ 우리 아들, 이거 보고 깜짝 놀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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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할아버지는 복도 끝, 창으로 들이치는 눈부신 햇살을 향해 느리지만 힘차게 걸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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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노인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앞에서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한 농부의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요. 가족과 간병인을 괴롭히는 치매 주변증상들을 극복해가는 어머니와 농부 아들의 이야기 이야기였죠. 저는 사실 책 <똥꽃>을 읽고 난 후, 이런 의심이 들었습니다.

치매어머니의 이러한 감동 회복사례가 이 농부와 어머니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이야기가 아닐까? 그저 어쩌다 일어난 특수사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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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다른 책 <치매노인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와 KBS의 <다큐인사이트>를 통해 알려진 '휴머니튜드'라는 치매돌봄접근이 만들어 내는 기적이야기를 보면서 <똥꽃>의 사례가 특별한 것이 아님을 확신했습니다. 먼저 책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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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치매노인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는 '오이 겐'이라는 일본 의사가 쓴 책입니다.
이 책에서 치매의 주증상과 주변증상(행동심리증상)이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보통 이 구분을 모르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 뉴스에서 나오는 대로 치매를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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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의 핵심 주증상이라고 알고 있던 망상, 폭언, 폭행들은 사실은 겪지 않아도 되는 주변증상이라는 것, 그리고 주변증상의 대소유무는 관계성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 책 역시 주변증상이 없는 예쁜 치매를 만들어 내는 힘은 바로 '관계'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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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치매노인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이 질문은 우리에게 매우 낯섭니다. 치매노인은 정신이 없는 상태인데 무엇을 바라보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싶거든요. 바로 이 책은 이러한 편견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치매노인을, 치매에 걸린 동일한 대상으로 취급합니다. 개별적인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치매노인의 개별화를 이야기합니다. 비록 치매라는 질병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한 분 한 분 노인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치매노인이라고 퉁쳐서 일반화 해선 절대로 그 분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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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각각의 치매노인은 각각 다른 것을 보고 있고, 다 다르게 반응하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치매노인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내가 돌보는 각각 다른, 그 노인의 눈과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치매는 이러저러 하니 이렇다 저렇다는 식의 모범답안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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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치매노인이라면 80 인생에 걸쳐 형성된 사람됨은 모두 개별적이고 특별합니다. <똥꽃>의 저자 농부 전희식이 치매와 상관없이 어머니를 어머니로서 공경했을 때, 어머니는 폭언, 망상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망상과 폭언이라는 과격한 대응 없이도 자신은 안전한 환경과 관계 속에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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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치매에 걸리면 바보가 되고, 본능만 살아 있는, 전혀 다른 제3의 존재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편견을 넘어선 완전 거짓입니다. 어떤 상태에 놓여있든, 인간의 욕구, 즉 안전과 인정과 존중에 대한 욕구는 본능적이라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지요.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다'라는 말은 인간은 관계 안에서만 존재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특성은 우리 뇌에 본능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실제 인간관계의 핵심인 감정과 정서를 지배하는 뇌의 변연계는 가장 오랫동안 정상을 유지되는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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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깨닫고 새로운 치매돌봄기법으로 나온 것이 '휴머니튜드'라는 인간존중돌봄 이죠. KBS <다큐인사이트>에서 혁명의 치매돌봄기법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방에 들어갈 때는 꼭 세 번 노크를 하고, 가까이서 눈을 맞추고 부드럽게 터치한 후에 일으켜 세워드리는 아주 간단하게 보이는 돌봄이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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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멘터리 '조용한 혁명'에 나온, 전혀 걷지 못하고 폭력과 욕설을 일삼던 치매노인이 젠틀맨이 되고 일어서 걷게 되는 장면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여기에서 소개된 휴머니튜드는 단순한 스킬(skill)을 넘어, '인간존중'이란 반석에 굳건히 뿌리내린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야기는 여기 네 편에서 끝납니다. 하지만 다섯, 여섯, 일곱... 그리고 무수한 우리들 관계 속의 기적은 곳곳에서 계속되었으면 합니다. 소개된 강서그림책 '예쁜할매할배이야기' 와 관련된 문의는 (부산)강서노인종합복지관(051-972-4851) '치매노인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마을만들기 담당자'에게 하시면 됩니다.


치매 노인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 말기 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임상 보고와 그 너머의 이야기

오이 겐 지음, 안상현 옮김, 윤출판(2013)


태그:#휴머니튜드, #치매주변증상, #행동심리증상, #치매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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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동물, 식물 모두의 하나의 건강을 구합니다. 글과 그림으로 미력 이나마 지구에 세 들어 사는 모든 식구들의 건강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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