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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성화장실 입구에 스토킹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여성역무원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성이 행복한 서울, 여행(女幸) 화장실’ 안내판에 ‘거짓말’ ‘대한민국에 존재하긴 하는가?’ 등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메모가 붙어 있다.
 9월 20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성화장실 입구에 스토킹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여성역무원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성이 행복한 서울, 여행(女幸) 화장실’ 안내판에 ‘거짓말’ ‘대한민국에 존재하긴 하는가?’ 등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메모가 붙어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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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난 몇 년간 보지 못했던 지인 A와 우연찮게 마주쳤다. A는 같이 일하던 동료 남성으로부터 한 달여간 스토킹 피해를 당한 끝에 불안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이었다. 마주쳤을 때는 경황이 없어 길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는 최근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고 했다.

만남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직장 동료에게 장기간 스토킹을 당하던 여성이 두 차례에 걸쳐 고소까지 했음에도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앙심을 품은 가해자에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스토킹 피해자라는 공통점을 보며, 지인 A가 떠올랐다.

그 지인 한 명뿐만이 아니다. 내 주변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같은 피해를 호소해 온 여성들이 있다(아마 당신 주변에도 있을 것이다). 신당역 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며, 구호가 아닌 실제로 '여성이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연대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는 이유다.

그런데 신당역 살인사건이 알려진 지 3주가 지난 10월 6일, 윤석열 정부는 여성가족부(여가부)를 폐지하고 보건복지부 산하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를 신설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했다. 대선후보일 때부터 여가부 폐지를 거론한 것이 공표된 것이다.

신당역 참사를 통렬히 반성하고 정부가 성범죄 예방·여성 안전을 증진시키는 국가 기능을 강화해도 모자를 판에 고용평등·피해자 지원 사업 등 핵심적인 정책을 집행해 오던 부처를 일시에 폐지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 이런 계획을 발표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우리와 같은 시대에 같은 감각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맞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루머로 오염된 여가부라는 '상식'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6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국가보훈부 신설, 재외동포청 신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부조직 개편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정부서울청사내 여성가족부 사무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6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국가보훈부 신설, 재외동포청 신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부조직 개편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정부서울청사내 여성가족부 사무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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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는 여가부와 관련한 잘못된 루머(소문)가 많다. 먼저 일각의 주장과는 달리, 여가부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비상식적인' 부처가 전혀 아니다.

일례로 2021년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성평등 추진체계의 국내외 현황과 과제)에 따르면 영국의 '성평등부', 독일의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프랑스의 '성평등·다양성·기회균등부', 스웨덴의 '성평등·주거부', 캐나다의 '여성과 성평등부' 그리고 노르웨이의 '문화·평등부' 등 세계 주요국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성평등 전담부처를 운용하고 있다. 2020년 기준 세계 194개국에 성평등 정책 전담기구가 설치돼 있고, 그중 독립부처 형태가 160개국에 이른다. 

위 기구들은 국가의 성평등정책을 담당하는 정부기구로서 성차별 관련 감시‧구제 등 성평등관련 정책을 통합적으로 추진 및 시행하고 있다. 이들은 1995년 UN에서 채택된 '베이징 선언 및 행동강령'에 근거해 성평등·젠더 관점에서 여성정책을 집행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한국의 여가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베이징 선언 이후 16년이 지난 2021년에도, UN 여성지위위원회는 각국의 성평등 전담기구를 강화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이다.

여가부 폐지론을 지지하는 '잘못된 루머'는 이뿐만이 아니다. 여가부가 '한 해 35조 원에 달하는 성인지 예산을 운용'하는 비대한 기구라는 루머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성인지 예산은 별도로 책정된 예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배정돼 있는 정부 전체의 예산이 얼마나 성평등하게 집행되었는지를 평가해서 붙이는 '이름표'에 불과하다.

실제 여가부의 한 해 예산은 약 1.5조 원이며, 이는 전체 정부 예산의 0.24%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서울 영등포구의 2022년 예산이 7500억 원임을 감안해 생각해보면, 대한민국 전체 여성과 노인, 청소년을 담당하는 중앙정부 부처가 겨우 기초자치단체 두세 군데 규모의 예산밖에는 사용하지 못 했던 것이다.

이마저도 세부 내역을 따져보면 성범죄 대응 및 경력단절여성 지원 등 성평등 정책에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는 예산은 여가부 전체 예산의 17.9%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가족 정책 및 청소년 정책에 투여된다. 여가부 폐지론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은, 하나 같이 이런 잘못된 상식에 기반하고 있다(관련 기사: "여가부 홈페이지 관리에만 180억 쓴다" 주장 '거짓').

없앨 게 아니라 더 포괄적인 성평등 기구로의 확대가 필요하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7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전날 발표된 정부조직 개편방안 중 '여성가족부 폐지' 관련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7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전날 발표된 정부조직 개편방안 중 "여성가족부 폐지" 관련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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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여가부를 반드시 그대로 둬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여가부를 적극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그러나 그 개편의 올바른 방향은, 지금 윤 정부의 결정처럼 타 부처 산하기구로의 격하가 아니라 포괄적 성평등 기구로의 '격상'이다.

0.24%의 예산마저 타 부처들에 흩어버리는 게 아니라, 각 정부 부처에 흩어진 성평등 예산을 여가부에 일임하고, 통합적으로 관리하게 하는 방식으로의 확대개편이 이뤄져야 한다. 성범죄 대응을 비롯해 성평등 정책에 투여되는 예산 역시 증액돼야 함은 물론이고, 성평등 정책 수립과 집행에 대하여 독립적인 관할권과 책임을 확실히 부여해야 한다. 현재 사실상 공백 상태인 '성차별 시정정책'을 시행할 권한도 필요하다.

또한 일각에서 논의돼 온, 부처 명칭을 '성평등부'와 같은 형태로 개칭하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개정의 이유는 혐오세력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여가부의 '페미니즘' 색채를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논바이너리(Non-binary·남녀라는 이분법적 성별에서 벗어난 성 정체성을 지닌 사람) 정체성 등 성소수자 인권 의제를 포괄하는 종합적 성평등 부처로 거듭나기 위함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윤석열 정부가 이번에 내세운 '양성평등'본부라는 낡은 젠더 이분법에 기반한 명칭을 가진 기구는 더더욱 수용하기가 어렵다.
  
오래된 루머와 혐오선동에 기반한 여가부 폐지론이 정치권에서 대놓고 거론되는 현 상황은, 지난 수십 년간 성평등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워온 사회운동·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거대한 반작용이며 위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한 '백래시'이며, 우리는 이 백래시에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 더불어 단순히 수동적으로 방어하는 역할에만 머물게 아니라, 역으로 이를 기회로 삼아 여가부의 확대개편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의 장을 열어가야 한다. 지금의 백래시를 성평등 사회를 향한 더 큰 변화의 물결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창인씨는 정의당 남양주갑지역위원장이며, 청년정의당 대표 후보입니다.


태그:#여성가족부, #윤석열,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 #김창인,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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