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04 11:28최종 업데이트 22.10.0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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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앞에서 임재성 변호사, 장완익 변호사,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강제동원 관련 민관협의회 피해자 지원단 및 대리인단 입장을 말하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외교부는 지난 8월 26일 일본 전범 기업 재산을 강제로 매각하는 법적 절차와 관련해 대법원 의견서를 제출했다. ⓒ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는 강제징용(강제동원) 민관협의회에 이어 지금은 공개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달 13일 외교부 당국자가 '민관협의회보다 외연이 확장된 형태의 의견수렴 과정'이라며 운을 뗀 것이 9월 하순부터 외교부 공개토론회 형태로 구체화되고 있다.

민관협의회는 국민적 호응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 측의 이탈로 인해 사실상 실패작이 됐다. 하지만 윤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실패작이 아닐 수도 있다. 민관협의회 과정을 거치면서 윤 정부는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마음을 얻었다.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해답을 갖고 오라'며 적반하장식 요구를 하던 일본 정부가 요즘은 호의적인 모양새다.


한국 시각으로 지난 9월 22일에는 뉴욕에서 한일정상회담까지 있었다. 일본 측은 회담이 아닌 '간담'이라고 낮춰 부르지만, 한일 정상이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은 기시다 내각이 윤 정부에 대해 호의적임을 보여준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한국에 관한 '악선전'을 자국민들에게 많이 했다. 강제징용 문제에 관한 한국의 부당한 요구로 인해 한일관계가 악화됐다는 쪽으로 여론을 조성했다. 그랬기 때문에 정상회담을 열어 한국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을 연출하려면, 국민들에게 설명할 명분이 있어야 했다. 윤 정부가 9월 5일까지 개최한 네 차례의 민관협의회가 그런 명분을 만드는 데 기여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일본대사는 지난 9월 15일 언론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이 대일관계 개선에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9월 1일자 <니케이 아시아>가 "윤 대통령의 단호한 태도가 대법원의 강제징용 소송 판결을 늦추는 등 영향을 미치고 있다"가 평가한 것도 국내에 보도됐다.

이 같은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한일정상회담까지 성사시켰으니, 윤 정부의 입장에서는 민관협의회가 '성공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 정부가 민관협의회 시즌 2인 공개토론회를 추진하는 것은 그런 자신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공개토론회에 대한 외교부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것이 정말로 필요한가 하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민관협의회보다 외연이 확장된 형태의 의견수렴 과정'이라지만,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점은 외교부 설명에도 나타난다.

지난 9월 29일 외교부 정례브리핑에서 임수석 대변인은 "보다 폭넓은 의견수렴을 위해 참여 폭을 좀 더 확대된 형태로 해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앞으로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보다 폭넓은 의견수렴', '좀 더 확대된 참여 형태', '다양한 의견' 등등을 공개토론회를 통해 관철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국민의 뜻은 이미 확고하게 드러나
 

지난 7월 4일 조현동 외교부 제1차관이 강제징용 문제 관련 민관협의회 제1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외교부


그런데 거의 똑같은 이야기가 민관협의회 출범 당시에도 있었다. 이에 관한 7월 4일자 보도자료는 "이번 협의회는 강제징용 판결문제 관련 해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지원단체 및 법률대리인, 학계 전문가 및 언론·경제계 등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고자 개최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민관협의회 때도 '폭넓은 의견수렴'을 지향했다. 그랬다가 불과 석 달 만에 새로운 기구의 발족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보다 폭넓은', '좀 더 확대된' 같은 수식어가 붙었을 뿐이다.

달라진 것이 하나 더 있다면, '공개' 모임을 표방했다는 점이다. 민관협의회는 비공개였지만 토론회는 공개로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공개로 열린 민관협의회 내용도 세상에 다 공개됐고, 피해자 측은 더 이상 참여할 수 없다며 탈퇴를 선언했다. 공개된 회의를 연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비공개로 열린 민관협의회 과정에서도 윤석열 정부는 자신들이 얻고자 했던 해답을 대략적으로 얻어냈다. 가해 당사자인 전범기업을 배제한 상태에서 제3자들이 기금을 모으고 법적으로 가해자와 무관한 재단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이 아닌 보상금 명목으로 금전을 지급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것이 일본 정부를 만족시켰기에, 9월 22일의 정상회담이 가능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협의 기구를 만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니, 윤 정부가 정말로 해답을 찾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윤 정부는 '좀 더 확대된 형태'로 논의를 확장해 국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듣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 국민들의 뜻이 이미 확고하게 드러났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국민들은 일본이 사과하고 배상해야 이 문제가 끝난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이런 인식은 1964년 6·3운동으로도 이미 충분히 증명됐다. 한일협정 반대투쟁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우리 국민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한일관계 해결 방식을 명확히 보여줬다. 배상금이 아닌 보상금을 지급하고 가해자가 아닌 제3자가 지급하는 방식은 6·3 정신에 어긋난다.

58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 국민들은 6·3 정신에 입각해 이 문제를 대하고 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맞선 일본의 경제보복이 있었던 2019년에도 국민들의 그 같은 의지가 충분히 표현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와 관련해 국민들의 의견을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염없이 기다려온 피해자들
 

9월 2일 박진 외교부 장관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의 광주 광산구 우산동 자택을 방문해 악수하고 있다. 박 장관은 이날 광주를 찾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만나 외교적 해법 마련을 약속했다. ⓒ 연합뉴스


사실, 논의 기구를 확대하겠다는 윤 정부의 구상은 자충수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제 식민지배 문제를 가급적 공론화하지 않는 것은 1965년 이래로 한일 정부가 유지해온 묵계 같은 것이었다.

이 문제가 공론의 장으로 나와 국민적 논의가 활성화되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 경제가 한국 경제를 지배하는 종속적 구조가 명확히 드러날 뿐 아니라 1949년에 불발됐던 친일청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재점화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양국 정부가 가급적 들추지 않으려 했던 식민지배 문제를 윤석열 정부가 공개토론회 명목으로 공론화시키게 되면, 윤 정부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갈 공산이 크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는 윤 정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시선을 싸늘하게 만드는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공개토론회를 열게 되면 시간을 더 지체시킬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윤 정부에 불리하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9월 2일 박진 외교부 장관이 방문한 강제징용 피해자 중에 이춘식 할아버지가 있다. 올해 98세인 이춘식은 2005년에 일본제철(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냈다가 2008년에 패소하고, 2009년에 2심에서도 패소한 뒤 2012년에 대법원에서 처음 이겼다.

하지만 이 승리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건은 고등법원으로 돌아갔고, 할아버지는 거기서 다시 승소했다. 하지만 불복하는 바람에 사건이 2013년에 대법원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로부터 5년 뒤에야 최종적인 승소 판결을 받았다. 양승태 사법농단이 폭로될 당시 널리 알려진 것처럼, 양승태 대법원장이 사건을 지연시켜주는 대신에 박근혜 정부로부터 이익을 얻어내려 한 정황이 있었다. 외교부가 대법원에 의견서를 보내 절차를 지연시킨 일도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2018년에 승소 판결을 받아냈지만, 그는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법원에서 처음 이긴 2012년 이후로도,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2005년 이후로도, 일제가 패망한 1945년 이후로도 그는 하염없이 기다려왔다. 그러는 사이에 100세를 바라보게 됐다.

피해자들은 이렇게 오랜 세월 기다리고 있는데, 윤석열 정부는 논의 기구를 만드는 데 주력하고, 대법원은 절차를 진행시키지 않고 있다. 오랫동안 기다리는 피해자들을 봐서라도 과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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