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 숫자에 가려진 다양한 목소리 드러내기

이 연극은 숫자로부터 시작한다. "2080", "122713"이란 연극의 첫 대사는, 2021년 산업재해(로 인정된) 사망자와 재해자 수이다. 이러한 숫자는 나름의 힘이 있다. 2,080과 122,713은 우리 사회에서 산업재해가 얼마나 많이,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숫자가 보여줄 수 있는 세계에는 한계가 있다. 숫자로 나타나려면 집계하고 모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누군가가 이를 실제로 모아야 한다. 집계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경험들, 집계할 수 있어도 모이지 않는 경험들은 숫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숫자 뒤에 있는 경험들은 이야기로 드러나야 한다. 요새는 뉴스나 인터넷을 통해서 산업재해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 뉴스를 통해 산업재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발생했고 누가 얼마나 다치고 죽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짧은 단신보도를 통해서는, 산업재해가 산재 피해자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는 사건인지까지는 알기 어렵다. 뉴스도 시청자도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산업재해는 누군가의 생명과 건강을 빼앗는 파괴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일순간의 파괴적인 사건으로만 끝나는 경험은 아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길고 어둡고 놀랍고 뜨거운 이야기"는 아직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산업재해를 통해 나와 주변의 노동환경에 대해 돌아보고, 용기를 내서 친구의 죽음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낸다. 누군가는 산업재해를 통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자리에 서서 함께 목소리를 낸다. 누군가는 산업재해를 통해 건강을 잃었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무언가를 해보기 위해 목소리를 낸다.
 
 노회찬 의원 4주기 추모 연극 <산재일기>

노회찬 의원 4주기 추모 연극 <산재일기> ⓒ 권영은

 
담담하게 풀어쓴, 산재 피해자와 주변인 15명의 이야기

내 삶을 유지하기도 힘든 현대 사회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주변인은 물론이고 피해자도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산재일기> 속 15명의 주인공은 산업재해에 대해 크든 작든 목소리를 냈다. 그 15명은 하청노동자, 산업재해로 가족을 잃었거나 친구를 떠나보낸 사람들, 재해를 경험한 사람의 싸움에 함께 한 의사, 법률인, 노동안전보건단체 활동가들이다. 등장인물들은 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내 가족, 친구, 동료가 재해를 입은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다. 15명의 주인공은 위치도 달랐고, 목소리를 내는 방식도 달랐다.

하지만 더 이상 누군가가 일터에서 죽고 아프지 않은 세상을 바라는 마음은 같았다. <산재일기>는 어느 연극보다도 산재를 경험한 피해자와 그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노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연극에 담긴 대사는 모두 인터뷰를 통해 확보한 것이고, 무대에 있는 배우들은 인터뷰한 사람들의 언어뿐 아니라 그 사람의 억양과 설명방식 등까지도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산재일기>에서는 두 명의 배우가 아니라, 일터에서 죽고 아프지 않은 세상을 바라면서 살아온 15명의 주인공을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무대 위에 쌓인 의자와 등장 인물들의 이름

무대 위에 쌓인 의자와 등장 인물들의 이름 ⓒ 노회찬재단

 
<산재일기>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그대로 담았지만, 그렇다고 어떤 기획 없이 담은 것은 아니다. 연극은 당사자의 목소리를 가능한 정돈된 톤으로 담았다. 연극 제목처럼 어떤 일이 일어난 직후 쓰는 메모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쓰는 일기처럼 말이다. 산재가 꼭 당사자와 그 주변에 어떤 큰 사건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연극에 담긴 사람들이 경험한 산재는 사망사고, 아이의 건강손상, 실명 등이니 인생에서 큰 사건이다. 그러므로 <산재일기> 속 목소리 또한 당연히 분노, 슬픔, 회한 등의 감정으로 전달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극은 담담하고 나직하게 이야기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마치 일기장을 읽는 듯한 말하기 방식 덕분에, 관객은 산재와 관련한 15명의 경험에 대해서 좀 더 차분한 자세로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산재를 직접 또는 주변에서 겪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왜 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선택을 하였는지 좀 더 생각해보고 공감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더 많은 사람에게 닿아야 할 <산재일기>

<산재일기>는 7월 초 7일간 무대에 올랐다. 짧은 기간 1회 30명이라는 관객 인원의 한계로 인해 많은 사람이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관객들에게는 산업재해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 변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 시간이었다. <한겨레 21>에는 <산재일기> 연극의 배경이 된 인터뷰가 담겨있는 '내 곁에 산재'라는 연재기고가 있다. 이 글을 읽고 <산재일기>에 관심이 생겼다면, 일단은 그 기사를 읽어보기를 권해본다. 하지만 매우 아쉽게도 기고문에는 주인공들의 생생한 목소리까지 담겨있지는 않다. 그래서 연극을 아쉽게 못 본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통해 소심한 바람을 전해본다. 언젠가 <산재일기> 연극을 다시 해서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기를, 어렵다면 적어도 <산재일기> 연극 대본이 언젠가 책으로 나오기를 말이다.

추가로, 만약 연극 대본을 책으로 낸다면 연극을 준비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았으면 한다. <산재일기> 연극에는 연극을 준비한 사람들이 전문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산재나 관련법, 상황을 이해하는 과정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산업재해에 대해서 몰랐던 관객들도 배우들을 통해 배경지식을 알아가면서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들을 수 있다. 그런 만큼 연극을 준비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고, 빠지면 섭섭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조승규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반올림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9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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