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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8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긴급조치 9호 피해자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 관련 전원합의체 선고에 입장해 자리에 앉아 있다. 2022.8.30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8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긴급조치 9호 피해자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 관련 전원합의체 선고에 입장해 자리에 앉아 있다. 2022.8.30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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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5일 오후 2시 15분]

긴급조치 9호 국가배상 책임을 둘러싼 대법원의 오판을 7년 만에 대법원이 바로잡으면서 남은 피해자에 대한 국가 보상의 길이 다시 열리게 됐다. 그러나 그동안 피해자 상당수의 패소가 확정됐고, 판결의 특성상 이를 다시 되돌릴 방법은 없는 상황이다. 피해자 사이에서 '사법부가 자기 잘못에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나아가 피해자들은 당대 판사의 '불법 재판'에 대한 책임은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인정되지 않았다고도 평가했다. 판사가 권력 견제라는 헌법적 책임을 무시하고 긴급조치 9호를 정당화하면서 스스로 부역했음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지난 8월 30일 긴급조치 9호 피해자 71명이 국가를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소송에서 "긴급조치 9호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은 전체적으로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해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해 위법하다"면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이같은 기본권 침해 사안엔 "전체적으로 객관적 주의의무 위반이 인정되면 충분하다"며 국가 책임성을 인정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이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국민 전체에 정치적 책임을 질 뿐(2015년 선고)"이라거나, "당시 긴급조치 9호가 위헌임이 선언되지 않았던 이상,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로 보기 어렵다(2014년 선고)"는 7년여 전 판례를 뒤집었다.

7년 간 193명 패소 확정... 국회 특별법 제정 목소리도

피해자단체 '긴급조치사람들'에 따르면 국가 손해 배상 소송을 낸 422명 중 지난 7년 간 패소가 확정된 이는 194명에 달한다. 승소는 50명, 나머지 178명은 재판 계류 중이다. 실제 피해자 규모는 1500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판결이 확정된 이상 사법부의 테두리 내에서 피해를 구제받을 방법은 없다.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은 선고 이후부터 적용되기 때문에 패소가 확정된 이들이 다시 소송을 내더라도 구제받기 어렵다. 결국 최종 패소한 이들과 나머지 피해자 간에 형평의 문제가 남게 되는 것.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해 피해 회복 형평의 문제를 해소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0년 11월 '유신헌법 긴급조치로 인한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됐지만 소관위 심사 단계에만 머물러 2년 째 상정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2012년에도 하태경 당시 새누리당 의원과 정청래 당시 민주통합당 의원이  각각 같은 취지로 특별법을 발의했으나 회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김명식 긴급조치사람들 사무처장은 지난 2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2014년, 2015년 대법원 소부가 이상한 판결을 내면서 줄줄이 잘못된 패소 판결이 이어졌다. 우리 입장에선 대법원이 가해자"라며 "이번 판결이 반가운 한편, 자신들이 일을 저질렀으면 결자해지도 스스로 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김 사무처장은 "피해자들 사이에서 특별재심절차 등의 요구가 나왔지만, 법조인들은 사법부가 확정 판결의 재심을 받아주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며 "판결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부분에 대해 통렬한 반성이라던가,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고민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기본권 침해 묵살한 법원 판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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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대리한 김형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고 했다. 패소 확정된 판결을 헌법재판소로 가져간 게 그 예다. 고 백기완 전 통일문제연구소장을 포함한 수십 명의 피해자들이 2015년 8월 해당 재판이 헌법상 권리를 침해한 위헌이며, 법원 재판을 헌법소원 대상에서 제외한 헌법재판소법(68조 1항)도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함께 냈다.

2018년 8월 모두 각하됐지만, 소수 의견이 남았다. 7대 2로 합헌을 결정한 헌법재판소는 "법원 재판은 헌재가 위헌으로 결정한 법령을 적용해 국민 기본권을 침해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헌법소원 대상이 된다"고 판단했다. 문제 대법원 판결은 '헌재가 위헌으로 결정한 법령을 적용'한 경우가 아니라는 취지다.

다만 김선수·안창호 당시 재판관은 반대의견으로 "관련 대법원 판결은 헌재 위헌 결정에 반해 청구인 기본권을 침해하므로 취소돼야 한다"고 봤다. 헌재는 2013년 긴급조치 1호·9호에 대해 "위헌성이 명백하고 대통령이 애초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기 위한 분명한 의도로 발령한 데서 비롯됐다(2010헌바132)"고 확인했다. 두 재판관은 이를 강조하며, 국민 기본권이 심각히 침해된 사안에 한해 재판 소원을 허용하는 예외를 넓히는 시도를 한 것.

2019년에도 이석태·김기영 재판관이 유사한 시도를 남겼다. 헌재는 같은 내용의 헌법소원에 6대 2로 또 각하 결정을 냈다. 그러나 반대 의견을 낸 두 재판관은 "국가가 권력을 남용해 국민의 권리를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침해하는 총체적 불법행위를 자행한 사안에 대해서도 법원이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부인함으로써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부정의한 결과가 발생한 경우"를 말하며 "이에 대해서까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부인하는 재판에 관한 부분도 재판소원 금지의 예외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사법부의 반성은?... 피해자들 "통렬한 반성 없다"
 
박정희 유신시대 긴급조치 발령의 불법성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이 지난 8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의실에서 열린 가운데, 피해자단체인 사단법인 긴급조치사람들 유영표 이사장과 회원들이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박정희 시절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며,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가 배상책임을 진다고 판단했다.
 박정희 유신시대 긴급조치 발령의 불법성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이 지난 8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의실에서 열린 가운데, 피해자단체인 사단법인 긴급조치사람들 유영표 이사장과 회원들이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박정희 시절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며,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가 배상책임을 진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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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 위헌에 눈감은 판사에 대한 판단도 피해자들에겐 아쉬운 대목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긴급조치 9호의 기본권 침해는 법관의 재판 및 유죄 선고를 통해 현실화됐다"고 하면서도 판사의 개별 책임에 대해선 따로 판단하지 않았다.

이 입장에 선 대법관들은 사법부 독립, 법적 안정성 등을 보호하기 위해 판사의 고의·과실에 따른 손해 배상 인정은 엄격히 제한하는 판례를 이유로 들었다. 또 당대 유신헌법을 위헌이라고 판단해 재판하는 것도 기대하기 어렵고, 당시 대법원에서 긴급조치 9호를 합헌이라 판단하거나 위헌제청신청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나온 사정도 강조했다. 주심 김재형 대법관은 "긴급조치 위헌성을 제대로 판단하지 않았다고 해서 평균적 법관으로서 주의 의무를 게을리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선수·오경미 대법관은 소수의견을 내 "긴급조치 9호 위헌성은 자유민주주의 질서 근간을 해치는 것으로 묵과할 수 없는 정도로 중대하고 명백해 일반 법령의 위헌성 차원과는 다른 특수성이 있다"며 "이 사건 재판행위는 헌법상 영장주의에 위배해 피고인 신체 자유를 직접적이고 종국적으로 침해해 헌법과 법률이 법관에게 요구하는 기준을 현저히 위반했다"고 밝혔다.

두 대법관은 또 "법관은 (사법권) 독립을 바탕으로 대통령 긴급조치 집행 행위의 위헌·위법성을 심사해 행정부를 견제하고 국민 기본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헌법적 명령 아래 놓인다"며 이는 "평균적 법관의 규범적 주의의무로, '이상적 법관상'을 전제로 법관에게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주의 의무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고도 밝혔다.

두 대법관은 "법관은 통치권자 등이 위헌·위법한 국가권력 행사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도구로 전락돼선 결코 안 되고, 헌법에 의해 부여받은 권한과 책임을 다해 국가권력 행사를 견제해야 한다"며 "긴급조치에 관한 법관의 직무 행위에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뼈를 깎는 고통과 반성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피해자측 김형태 변호사는 대법관들 모두 법리적으로 법관의 구체적인 고의·과실을 판단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김 변호사는 "고의·과실은 '위법성을 얼마나 인지했느냐'가 아니라 결과에 대한 인식으로, 재판으로 피해자가 복역한다는 결과를 알았으면 그 자체로 고의는 성립한다"며 "'판사가 인식 못했거나 과실이 없다'는 식으로 다 (판결을) 해놨는데, 틀린 소리다. 법리적으로 향후 과제로 남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관련 기사]
"박정희 악법도 법" 면죄부 준 양승태 대법원 판결 '폐기' http://omn.kr/20i5f

태그:#대법원 전원합의체, #긴급조치 9호, #법관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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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영 기자입니다. 제보 young@ohmynews.com / 카카오톡 rockyrkd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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