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회 EBS 국제다큐영화제가 8월 22일부터 28일까지 열립니다. '다큐의 푸른 꿈을 찾아서'라는 슬로건으로 찾아온 이번 영화제에서는 총 24개국 63개의 작품이 소개됩니다. [편집자말]
* 주의!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자화상> 스틸컷

다큐멘터리 <자화상>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01.
움푹 파인 눈매. 앙상하게 도드라진 팔과 다리의 뼈. 노르웨이 출생의 사진작가 레네 마리 포센(Lene Marie Fossen)을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각인되는 그녀의 모습이다. 레네는 평생 심각한 거식증을 앓아왔다. 실제로 몇 번이나 죽을 뻔하기도 했고 처음에는 그 죽음도 자연스럽게 맞이하려고 했다.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일이 싫어졌다. 살아가는 동안 하고 싶은 사진 작업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레네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사진 속에 담기 위해 스스로 카메라 앞에 선다.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영감과 용기를 얻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마그레트 올린(Margreth Olin) 감독의 다큐멘터리 <자화상>은 지난 2019년 세상을 떠난 사진작가 레네 마리 포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섭식을 중단하고 그리스 키오스에 있는 버려진 레프라 병원에서 앙상함이 드러난 자신의 모습으로 세상과 소통했던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레네 마리 포센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 이 작품이 세상에 소개된 것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달 후인 2020년이었다고 한다. 동일한 작품이 이번 EIDF 2022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셈이다.

02.
거식증. 일종의 섭식 장애이며 정신적 문제로까지 받아들여지는 이 문제를 레네는 아주 어릴 때부터 겪어왔다. 그녀가 열 살이 되던 해 봄 무렵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그녀는 당시를 떠올리며 어른이 되길 두려워하고 아이로 영원히 남고 싶어 그랬던 것 같다고 스스로 회상한다. 처음에는 본인 몫의 음식을 조금씩 줄이는가 싶더니 급기야 그 어린 나이에 식사를 중단하게 되었다. 그녀의 부모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고쳐주기 위해 온갖 병원을 전전했고, 아동 병동에 일곱 번이나 입원을 시켰지만 오히려 심리적인 역효과만 일으켰을 뿐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지역 신문에 도움을 요청하는 기사까지 낼 정도였으니 그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레네의 말에 따르면,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자신을 항상 싫어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같은 맥락으로 먹는 것을 줄이기 시작했더니 그 불안과 슬픔, 내면의 모든 고통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단다. 그녀의 병은 그렇게 찾아왔다. 처음에는 그냥 그렇게 천천히 죽어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훗날 그녀의 사진 작업 전반에 영향을 끼친 키오스를 찾기 전까지 말이다. 레프라 병원 공터를 처음 찾았을 때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한다. 남은 생이 있다면 환자로 사는 것 말고도 다른 무언가를 해내야 했고, 또 처음으로 해내고 싶어 졌으니 말이다.
 
 다큐멘터리 <자화상> 스틸컷

다큐멘터리 <자화상>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03.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재능과 작품 세계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노르웨이의 최고 사진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모르텐 크로그볼(Morten Krogvold)는 레네의 작품을 보고 이 정도 재능은 만나기 쉽지 않다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더 나아가 '노르딕 라이트'라는 세계적인 사진전에 그녀의 작품이 전시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나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픈 사람이라서 더 많은 호의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레네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달라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이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받은 셈이었다.

"아픈 사람이라서 칭찬해 준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군요.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라면 레네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겠죠.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녀를 향한 작가의 말이다.

본격적인 사진 작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오랜 기간 충분한 영양 섭취를 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반강제적인 입원 생활로 인해 병원 가까이는 발걸음을 하지 않은지도 오래되었고, 영양 보충용 음료만 마시며 오랜 세월 생을 이어왔다. 28살이 넘는 나이에도 2차 성징과 사춘기가 찾아오지 않은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시력도 손상되기 시작했고, 몸 곳곳이 쇠약해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점차 몸이 약해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의사로부터 확정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몸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함께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는 문턱에서 그동안 자신이 기피해왔던 문제를 직면하게 된 셈이다.

04.
그녀의 재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작가 모르텐 크로그볼의 도움으로 노르딕 라이트는 결국 그녀의 사진을 전시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계기로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강렬하고 힘 있는 그녀의 사진에 관객들은 감동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가진 무언가로 처음 타인의 호의를 받고 인정을 받으면서 레네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오히려 아픈 곳이 생길까 걱정을 하고 예민해질 정도로 말이다. 이후 레네는 역시 키오스 섬에서 만난 난민 위기의 희생자들의 초상화를 촬영하며 초창기 작품인 '자화상 시리즈'와 더불어 구도와 색, 빛을 활용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네는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한 채 2019년 10월 22일 가족의 품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사인은 오랜 기간에 걸친 영양실조로 인한 심부전이었다고 한다. 이제 막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 시점에서 평생을 어려워했던 자신의 병을 결국 이겨내지 못한 셈이다.

"사진에 있는 저는 제가 아니에요. 예술로 표출된 고통이죠. 고통 속에 있는 아름다움이에요."
 
 다큐멘터리 <자화상> 스틸컷

다큐멘터리 <자화상>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05.
다큐멘터리 작품에는 여러 가지 순기능이 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과 그 이야기를 시청자와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은 그중 하나다. EIDF를 통해서도 매해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이 소개된 바 있다.

2020년에 출품된 얀 망누손 감독의 <매들린, 런웨이의 다운증후군 소녀>를 통해서는 다운증후군 모델 매들린 스튜어트의 이야기가 전해졌고, 작년인 2021년에는 나이스 바하이 감독의 <아이스다이버 키키>라는 작품을 통해 전문 아이스 프리다이버인 키키 보쉬의 모습이 알려졌다. 이 작품 <자화상>이 레네 마리 포센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모두가 영감을 얻고 삶에 대한 소중함과 의욕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은 처음 레네가 스스로 사진기 앞에 서게 된 마음과도 다름이 없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투영하고 있는 예술에 대한 갈망과 에너지, 예술 본연의 힘 아래에 놓인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 심각한 거식증을 앓고 있는 이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또 사회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이미 정신이 해이해서 걸리는 병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에 거식증을 앓고 있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 사람들은 이 병이 그냥 먹기 시작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이 이 병의 가장 잔인한 점이라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레네의 어린 시절 모습이 찍힌 영상과 사진 자료들이 작품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 지긋지긋한 병이 시작된 때이자,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삶의 문제가 시작된 순간. 어쩌면 레네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담긴 '자화상'들을 보면서 언제나 그때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자화상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고 싶다던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타고난 창작의 재능보다 오랜 시간 홀로 감내해야 했을 그 고달픈 삶에 마음이 조금 서글퍼진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그녀의 생(生)이 몇 번의 계절만 더 누리고 졌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더욱 말이다. 누군가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게 된다면, 아마 한 번쯤은 꼭 그녀의 작품을 찾아보게 될 것이다.
EIDF 다큐멘터리 자화상 EBS국제다큐영화제 넘버링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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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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