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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답사 가이드를 자청했다. 수업에 상담에 야간자율학습 감독까지, 주중 내내 밤늦도록 아이들과 부대끼느라 주말에 쉬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그래도 버선발로 나섰다. 대구에서 시민들이 5.18 민주화운동 사적지를 부러 찾아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어서다.

북한 다음으로 오기 힘든 광주라니? 
 
오전엔 5.18 묘역에서, 오후엔 금남로에서 답사가 진행되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5.18 기록물이 전시된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앞 답사 모습.
 오전엔 5.18 묘역에서, 오후엔 금남로에서 답사가 진행되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5.18 기록물이 전시된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앞 답사 모습.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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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관련 단체가 주관하는 추념식이 대대적으로 열리는 5월이 아닌 때에 외지인들이 5.18 사적지를 찾는 경우는 드물다. 5월이 지나면 5.18 사적지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진보 성향의 시민단체나 노조원, 현대사를 전공하는 대학생 정도가 이따금 찾아올 뿐이다.

지역적인 편차도 크다. 5.18 기념재단 관계자의 전언에 따르면, 5.18 사적지 방문객과 해설 신청자의 거주지가 대개 호남과 수도권, 그리고 부산과 경남 지역에 치중돼 있다. 강원과 충청 지역, 그리고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찾아오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그 수가 바다를 건너와야 하는 제주도보다 더 적다는 거다.

5.18과 6월 민주항쟁, 부마 민주항쟁과 제주 4.3항쟁 등 현대사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곳이어서라는 해석이 많지만, 선뜻 동의하긴 어렵다. 특정 지역에 한정된 사건도 아닐뿐더러 초중고 교과서에 모두 다루고 있어 아이들에게조차 익숙하다. 난 '후천적인 요인' 탓이라 생각한다. 

외지인들을 모시고 5.18 사적지를 함께 걷다 보면, 십중팔구는 "이런 줄 전혀 몰랐다"라며 미안해한다. 50대 이상의 중년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20~30대 청년 세대조차 충격을 금치 못한다. 희생자의 무덤 앞에 앉아 묘비를 쓰다듬으며 꺼이꺼이 우시는 분들도 여럿 만났다. 

사통팔달 교통이 발달해 아무리 멀어도 네다섯 시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지만, 평생 광주에 처음 와봤다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지구 반대편 미국과 유럽은 쉽게 가도, 유독 광주는 너무 멀게 느껴지더라는 거다. 세계에서 북한 다음으로 오기 힘든 곳이 광주였다는 한 어르신의 우스갯소리에 적이 난감했다. 

어느 광고의 카피를 빗대어 단언하건대, 광주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이는 있어도 한 번만 오는 이는 없다. 광주에 직접 찾아와 눈으로 본 5.18은 책으로 접한 그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역사의 교훈은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두 발로 깨우치는 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물론, 오가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하루에 둘러볼 수 있는 사적지는 몇 곳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대개 외곽의 5.18 묘역과 도심 금남로 주변의 사적지가 전부다. 2022년 현재까지 지정된 5.18 사적지 31곳 중 1/3가량이 인접해 있어 걸어서 둘러볼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표지석이 세워진 곳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실상 광주 시내 전역이 5.18 사적지다. 

어쩌면 5.18 묘역 하나만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5.18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조차도 묘역 입구에서 추모탑을 향해 걷는 동안 들려오는 '임을 위한 행진곡'에 하나같이 옷깃을 여민다. 그 노래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계엄군의 구타로 숨진 청각 장애인, 부모님이 생일선물로 사준 신발이 벗겨져 주우러 가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11살 초등학생, 친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미안한 마음에 도청에 들어갔다가 주검으로 발견된 고등학생, 다친 시민들을 위해 헌혈한 뒤 병원에서 나오다 총에 맞아 숨진 여학생, 그리고 광주학살을 증언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학생과 시민들.

사람들은 그 죽음의 사연들을 차마 다 읽지 못한다. 언젠가 민주주의란 결코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어느 분의 소감에 해설하다 말고 순간 울컥한 적도 있다. 그는 친구와 이웃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고,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함께 어깨 겯고 맞선 행동이 곧 민주주의 아니겠냐고 말했다. 

광주 향한 정서적 거리감 극복하는 법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해설을 듣는 모습.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해설을 듣는 모습.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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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묘역에서는 마이크를 켜는 게 외람되기도 하지만, 굳이 해설도 필요하지 않다. 참배한 뒤 묘역 주변을 거닐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만 허락하면 된다. 그 많은 이들이 왜 이곳에 잠들어있는지 자문자답하다 보면, 교훈이 저절로 가슴에 아로새겨지게 될 것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광주에 와보길 정말 잘했다며 스스로 뿌듯해하는 분들이 여럿 계셨다. 몇몇 어르신들은 자신의 어릴 적 경험담을 쏟아내며 5.18과 광주에 대한 오랜 편견을 지워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자식과 손자들까지 함께 데려오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에 가면 해코지당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옛날에 아버지가 직장 문제로 전라도에 가서 잠시 살았는데, 경상도 차량 번호판을 달았다는 이유로 주유소에서 기름도 넣어주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경상도 출신 학생들이 전라도에 있는 대학에 가면, 교수들이 학점을 의도적으로 짜게 준다는 소문이 지금도 돌고 있습니다."
"5.18 당시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죽이러 왔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면서요?"


하나같이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주장들이다. 그런데, 어른이고 아이고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에 수긍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모두가 억측이라고 무질렀더니, 한 어르신은 당신이 직접 경험했다면서 조금 과장되었을지언정 아예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짐짓 두둔하기도 했다.

전라도에서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는데 사고 처리가 지연된 데다 직원이 매우 불친절했다는 내용이었다. 수많은 다른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 인식에 사건을 끼워 맞춘, 누가 봐도 전형적인 성급한 일반화다. 하지만 명백한 오류도 의심 없이 공유될 때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나마 대부분은 직접 겪은 게 아닌, 주위로부터 전해 들은 것들이다. 하도 어이없어 대체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건지 여쭈면, 대뜸 주변에서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며 눙치기 일쑤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또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를 물려 전해진 경우도 태반이다. 

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의 진원지가 어디인지는 그들도 모두 알고 있다. 위정자들과 지역의 토호들이 수십 년간 지역감정을 부추기며 제 잇속을 챙겨왔다고 선선히 말한다. 그런데도 마치 DNA처럼 굳어진 편견을 끊어내지 못한 채 여전히 부화뇌동하고 있는 셈이다. 

십수 년 동안 5.18 사적지에서 외지인들을 만나온 경험으로 미루어, 지역감정에 포획된 그들을 탓하는 건 어리석다. 이제 그들의 완고했던 편견도 서서히 금이 가고 있다. 진실을 접할 기회와 자극이 주어진다면, 광주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을 극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앞으로 더 많은 대구시민이 광주를 찾아야 하며, 더 많은 광주시민이 대구에 찾아가야 한다. 위정자들과 토호들이 부추긴 지역감정과 역사 왜곡을 혁파하는 건 시민들의 몫이다. 수십 년간 세월의 더께처럼 쌓인 편견의 벽을 허물려면 활발하고 지속적인 교류, 그 길뿐이다. 

옛 전남도청 답사를 끝으로 대구로 돌아가는 그분들에게 해설사 자격으로 숙제를 내주었다. 오늘 함께하지 못한 가족과 주변 지인들에게 5.18을 주제로 한 광주 여행을 권유하는 것. 만약 해설사가 필요하다면, 오늘처럼 만사 제쳐놓고 버선발로 뛰어나올 거라고 약속했다. 헤어지는 길 그들과 손 맞잡으며 이렇게 외쳤다.

"가자, 광주로! 오라, 대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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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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