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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25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행안부 경찰국 신설과 관련한 경찰 집단반발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25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행안부 경찰국 신설과 관련한 경찰 집단반발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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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 경찰국 설치를 반대하는 전국경찰서장회의를 두고 25일 이상민 행안부장관이 "하나회 12·12 쿠데타가 이런 시작에서 비롯됐다"며 과도하게 반응했다. 회의에 참여한 경찰들은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정권의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경찰 중립화에 대한 그 같은 태도를 외면한 채,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12·12 쿠데타까지 거론했던 것이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민주자유당(민자당) 정권이 과거 내무부 경찰국 설치를 시도했을 때도 이상민 장관과 같은 과도한 시각들이 표출됐다. 1991년 8월 1일의 경찰청 발족을 앞둔 민자당 내에서는 '경찰을 그냥 두면 감당하기 힘들어진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경찰을 국민에 의한 민주적 통제 하에 두고자 경찰청을 독립시키는 것인데도, 정권 자신과 경찰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국민의힘 전신 민자당, 과거에도 경찰국 설치 시도 
 
1991년 7월 3일자 동아일보 1면, '경찰청 위상 싸고 정부 내 이견- 독자 재량권과 내무부 감독권 행사 맞서' 제목의 기사.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91년 7월 3일자 동아일보 1면, "경찰청 위상 싸고 정부 내 이견- 독자 재량권과 내무부 감독권 행사 맞서" 제목의 기사.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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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당 정권은 강력해진 경찰이 여타 권력기관들을 위축시킬 가능성도 염려했다. 1991년 7월 3일자 <동아일보> 톱기사는 집권당이 경찰청 발족을 앞둔 상황에서 경찰 통제를 시도하는 동기 중 하나를 두고 "내무부장관이라는 중간 지휘 단계가 소홀해지면 경찰청장이 대통령을 직접 상대하게 됨으로써 검찰·안기부·군기무사 등 다른 정보·수사 기관의 강력한 견제 수단으로 등장하게 되는 점 등을 못마땅해한다"고 설명했다.

예전처럼 정권의 통제를 받는 경찰이 검찰·안기부·군기무사를 견제하게 됐다면 민자당이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민자당이 우려한 것은, 독립된 경찰이 여타 권력기관을 위축시켜 정권의 힘을 약화시킬 가능성이었다(관련 기사: 윤 대통령의 '시행령 통치'... 박정희가 떠오른다).

경찰청 발족은 민자당 정권 하에서 이뤄진 일이지만, 결코 민자당이 원해서 된 일은 아니었다. 죽기만큼 싫은데도 억지로 했다고 표현해야 정확하다. 그해 2월 8일 현재의 국회 의석 수가 '민자당 220석 대 평화민주당 71석'이었다. 입법부 차원에서 경찰청 발족을 무산시키는 것이 이론상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자당은 마지못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1987년 6월항쟁에서 폭발한 민주화 에너지와 이듬해부터 본격화된 일선 경찰들의 중립화 요구를 마지못해 수용한 결과였다. 1991년 1월 27일자 <한겨레> 7면 우상단 기사는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극대화되고 정권 자체가 벼랑 끝으로 몰리면서 집권 세력도 마지못해 그 필요성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렇게 마지못해 경찰 중립화를 허용하면서도 민자당은 외견상 모순되는 일을 저질렀다. 경찰법을 두 번이나 날치기 통과시킨 것이다. 흔히 날치기 통과는 법안 통과를 강력히 열망하는 쪽에서 벌이게 된다. 민자당은 경찰법을 열망하지 않았는데도, 두 번이나 날치기를 감행했던 것이다.

1991년 2월 '경찰법 날치기 처리' 민자당... "20여 초 만에 처리했다"
 
1991년 2월 7일자 한겨레 1면 기사.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91년 2월 7일자 한겨레 1면 기사.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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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 선언(1990.1.22)으로 출범한 민자당은 이듬해인 1991년 2월 6일 밤중에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경찰법 정부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다음날 발행된 <한겨레> 1면 중간 기사는 "밤 10시 40분께 질의, 축조 심의, 소위 심사, 찬반 토론, 표결 등의 절차를 일방적으로 생략한 채 정부 원안을 그대로 상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하는 데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20여 초 만에 처리했다"고 기사는 알려준다.

날치기는 5월 10일 본회의 때도 재현됐다. 11일자 <한겨레> 톱기사 '보안법·경찰법 날치기 처리'는 "민자당은 이날 오후 속개된 국회 본회의에서 국가보안법·경찰중립화법안의 수정안을 야당 의원들의 격렬한 항의 속에 제안 설명과 심사 보고, 표결 절차를 생략한 채 일괄 상정"했다고 보도했다. 이때는 2월 6일보다 시간이 더 소요됐다. "35초 만에 날치기 처리했다"고 기사는 전한다. 두 차례의 날치기에 도합 1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통과된 법안이 5월 31일 공포되고 7월 31일부터 시행돼 8월 1일 경찰청 발족을 낳았다. 경찰청과 더불어 경찰위원회(경찰행정 심의·의결 기구)를 지금의 행정안전부인 내무부 아래에 두는 법안이 이렇게 통과됐다. 이것이 오늘날의 경찰청이 탄생한 과정이다.

경찰청법 강행 처리했던 민자당, 이유는 

정리해보자. 경찰청 독립을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두려워하기까지 했던 민자당 정권이다. 그랬던 민자당이 경찰법을 통과시키고자 3개월 시차를 두고 날치기를 반복했다. 220석의 압도적 우위로 경찰청 발족을 무산시키지 않고, 두 차례 강행 처리로 법안 통과를 성사시켰다.

이런 모순된 상황이 연출된 배경은 2년 전인 1989년 11월 30일에 있었던 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3당 합당 2개월 전에 있었던 이 일은, 민자당이 원치 않는 법안을 날치기까지 해서 강행시켜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6월항쟁 이듬해 치러진 1988년 4·26 총선에서 '125석 대 174석'이라는 여소야대 정국이 출현했다. 이런 속에서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은 의석의 우위를 앞세워 경찰 중립화 개혁을 추진했다. 이 상황은 야 3당이 1989년 11월 3일 경찰법 단일안을 마련하고 11월 30일 국회에 제출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합의된 야권 단일안을 소개하는 4일자 <한겨레> 1면 우중단 기사는 "평민·민주·공화 등 세 야당은 3일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키 위해 국무총리 산하에 5인의 합의제 국가경찰위원회를 두고 그 아래 경찰청을 설치토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경찰법 단일안을 확정"했다고 보도했다.

1991년 경찰법도 그렇고 지금의 경찰법(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조직 및 운영에 관한 법률)도 그렇고, 경찰청과 국가경찰위원회를 내무부(행안부) 산하에 둔다. 치안본부를 내무부 산하에 두던 독재정권 시절 관행을 버리지 못한 결과다.

그에 반해 1989년 야권 단일안은 경찰청과 국가경찰위원회를 국무총리 산하에 뒀다. 내무부가 소관 사무인 선거·국민투표 등에 경찰력을 동원할 가능성을 그렇게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행정부 차원에서 경찰청을 통제하되 내무부를 통한 정치적 악용의 소지를 줄이기 위한 포석이었다.

야권 단일안은 국가경찰위원회 구성에서도 정권의 입김을 최대한 배제했다. "국회 교섭단체가 추천하는 4명의 위원과 국무총리가 제청하는 위원장(국무위원) 1명을 대통령이 각각 임명"하는 방식이었다고 위 기사는 말한다. 1991년 경찰법과 현행 경찰법은 국가경찰위원을 내무부장관(행안부장관)이 제청하고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규정한다. 내무부 산하에 두는 법을 떠올려볼 때, 이런 야권 단일안은 그 당시 매우 새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별다른 변수가 없었다면 1989년 야권 단일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것이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참여했던 세력이 두려워할 만한 일들이 벌어질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세력은 가만히 있지 않았고, 3당 합당 뒤에 결국 이 야권 단일안을 무산시켰다. 민정당 출신의 민정계가 중심이 된 이들은 경찰이 공룡처럼 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확산시키고 국회가 경찰위원을 추천하는 것의 위험성을 과장했다.

1991년 4월 14일자 <조선일보> 3면 등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민자당 정권은 '지금은 분단 상황이다', '국회가 경찰위원을 추천하면 정당의 입김이 개입된다' 등의 이유를 들며 선전전을 펼쳤다. 과거에 경찰을 악용해 민주주의를 억누를 때도 분단 상황을 운운했던 세력이 경찰 조직을 독립시키는 마당에도 똑같이 분단 상황을 거론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이들은 국회 추천권을 인정하면 "사사건건 대립하는 정당들의 간여를 허용"하게 된다며 국회의 간여를 위험시하기까지 했다.
 
1991년 4월 14일자 조선일보 기사. '경찰법 정치권 틈바귀 진통' '민자, 임시국회 처리 방침... 힘대결 예고' 등 제목의 기사.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91년 4월 14일자 조선일보 기사. "경찰법 정치권 틈바귀 진통" "민자, 임시국회 처리 방침... 힘대결 예고" 등 제목의 기사.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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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단일안은 6월항쟁에 나섰던 국민들은 물론이고 일선 경찰들의 요구도 상당부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단일안을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경찰 중립화 여론에 부응하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하고자, 민자당 정권은 두 건의 날치기를 강행했다.

즉 여론에 부응하는 듯하면서 경찰 중립화를 최대한 저지하고자 무리수를 뒀던 것이다. 하나회와 쿠데타까지 운운하는 이상민 행안부장관의 반응은, 그 시절 민자당 당국자들의 과도한 무리수를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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