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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왜 안 트는가

자린고비는 천장에 굴비를 매달아 두고 밥을 먹는다. 아들이 굴비를 두 번 쳐다보자 닳는다고 성을 낸다. 지나친 궁상을 비꼰 농담 정도로 받아들일 법한 이야기지만, 우리 집은 마냥 웃을 수 없다. 거실과 안방 천장에 시스템 에어컨이 달려 있다. 하지만 폭염 경보와 폭염 주의보가 뜬 날에 두 시간씩 돌린 것을 제외하고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 최신식 굴비나 다름없다.

단순히 전기세를 아끼자고 자린고비형 절약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에어컨의 전기료는 실외기가 얼마나 강하게, 오래 돌아가느냐에 비례한다. 비교적 최근에 출시된 인버터형 에어컨은 알아서 실외기 운영을 최소화한다. 항상 풀파워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실내 온도에 따라 강약이 조절된다. 과거처럼 전기요금 폭탄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럼 우리 집은 왜 안 트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소비를 줄이고, 자원을 적게 써야 만족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마 쉽게 납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전기를 아끼는 게 윤리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옳아! 이런 강박적인 뉘앙스가 아니다. 

오늘도 지구에 해를 덜 끼쳤으니까 마음이 한결 편하네, 잠깐 덥고 말지 냉방병보다는 차라리 괜찮아. 이 정도 느낌에 가깝다. 내 기분을 이성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하여 에어컨을 끄는 것이다. 여름은 원래 덥다. 여름을 가을처럼 바꿔보려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욕심이다. 이런 생각만 해도 더위가 조금 버틸 만해진다. 

누군가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 부부가 더위를 전혀 안 타는 체질이거나, 인도 고행승처럼 육체적 인내를 즐기는 취향은 결코 아니다. 아내는 더위를 덜 타는 체질이지만, 나는 날이 뜨거우면 진이 빠진다. 당연히 서늘한 공기로 가득 찬 카페에서 멜론 빙수를 떠먹으면 쾌적함을 느낀다. 우리도 보통의 온도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우리 집에서는 최신형 시스템 에어컨보다 십 년 된 선풍기가 훨씬 바쁘다
 우리 집에서는 최신형 시스템 에어컨보다 십 년 된 선풍기가 훨씬 바쁘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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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2014년 결혼 이후 수년간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공부와 실천을 해왔다. 그러다 보니 지구 단위로 사고를 확장하는 훈련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사용하는 것들이 얼마나 지구 환경에 유해한가를 가늠해 보는 것이다.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아이들 교육용 '핑크퐁 잉글리시 타이거+펜' 세트를 중고나라에서 구하는 건 괜찮은 선택이다. 반면 신발은 새 제품으로 구입하고, 너무 피곤한 날은 플라스틱 포장재가 무진장 쏟아지는 배달음식을 먹기도 한다. 

우리는 커피 원두를 사다가 집에서 내려 마신다. 얼마 전 선호하는 '케냐 AA' 품종의 원두를 검색하다가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케냐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일대에 수년간 가뭄이 지속되었다. 그 결과 국민의 80퍼센트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케냐는 심각한 기아 문제를 겪고 있었다. 

염소를 키우며 살아가는 어떤 부족이 소개되었다. 무더위와 먹이 부족으로 염소들이 모두 폐사하자, 뼈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은 한 줌의 나무 열매에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나는 차마 '케냐 AA'를 구입할 수 없었다. 동아프리카에 가뭄이 끊이지 않는 배경에는 대한민국 같은 소위 산업 선진국이 있기 때문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은 대표적인 '기후변화 무임승차국'이다. 1인당 탄소배출량과 플라스틱 사용량은 탑 텐을 놓치지 않으면서, 역설적으로 기후변화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다. 먹을 것이 없어 열매로 연명하는 케냐인을 보고 있으면 에어컨을 켜고 싶은 마음이 확 감소한다. 

그럼 야간에도 삼십 도를 육박하는 열대야에는 어떻게 대처할까? 앞서 밝혔다시피 폭염 주의보와 폭염 경보가 뜬 날에는 두 시간가량 에어컨을 가동한다. 인버터형 에어컨은 자주 껐다 켜는 것보다, 희망온도를 설정한 후 쭉 틀어 놓는 편이 경제적이다. 

두 시간 후 전원을 꺼도 냉기는 한 시간가량 더 유지된다. 열대야가 아닌 한, 밤에는 대개 바깥 기온이 떨어지므로 불을 켜서 요리를 하는 저녁 시간대만 잘 넘겨도 충분히 더위를 넘길 수 있다. 앞뒤로 창문을 열어 맞바람이 드나들게 하고, 생활 동선에 선풍기를 배치하면 꽤 시원하다. 

착용하는 의류 차이도 크다. 통기성이 좋고, 접촉 시 냉감을 주며 땀이 금방 마르는 소재의 의류는 체감 더위를 대폭 낮춰준다. 민소매 상의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샤워에도 요령이 있다. 냉수로 몸을 씻으면 당장은 짜릿하지만 오히려 숙면을 방해한다. 지나치게 차가운 물은 혈관과 근육을 수축시켜 내부의 열이 발산되는 것을 막는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이 더 낫다. 

더위 대응 기본 원칙을 세워 에어컨 가동을 줄이면 자연스레 전기 요금도 적게 나온다. 4인 가구인 우리 집은 전용 면적 96제곱미터의 아파트이다. 동일 면적 평균보다 약 20% 정도 사용량이 적다. 아파트 관리비 사이트에서 통계를 확인해 보니 지난 6개월간 전기 사용량이 다른 집보다 확연히 적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집돌이, 집순이 라이프 스타일을 감안하면 꾸준히 선방하고 있다.

에어컨이 '최첨단 굴비'가 될 지라도
 
동일 면적 대비 전기 사용량이 적다
 동일 면적 대비 전기 사용량이 적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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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00여 년 전에는 한반도에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며 여름을 났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에어컨 한두 대로도 만족을 못 해서, 창문형 에어컨이니 해서 모든 방마다 개별 냉방을 시도한다. 

그뿐인가, 현대 건축물에 사용되는 단열재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효율이 좋다. 제법 괜찮은 선풍기라도 다른 가전제품에 비해 큰돈을 들이지 않고 장만할 수 있다. 여름용 기능성 의류와 침구도 저렴한 제품이 수없이 존재한다.

심지어 대형 마트, 미술관, 박물관 등 기본적으로 냉방 기능을 갖추어 놓은 공간도 주변에 널려있다. 이백 년 만에 인간의 DNA 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 것은 아닐 테니 더위를 참지 못하는 건 우리의 참을성이 부족해진 탓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열대야 경보가 울리지 않는 한 에어컨을 켜지 않으려 한다. 매일 산책을 하고, 팔 굽혀 펴기를 하듯 더위 극복 매뉴얼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약간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고, 차가운 소재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 메밀 막국수와 파인애플처럼 찬 성질을 가진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는 매달 그린피스에 후원하는 아내와 함께 월간 환경 리포트 같은 자료를 찾아본다. 

평범한 한국인의 삶이 지구 단위에서는 극상위에 속하며,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해야지만 유지 가능하다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날 밤은 선풍기로도 네 식구가 꿀잠을 잘 수 있다. 가끔 딸아이가 묻는다. 우리는 에어컨이 있는데 왜 안 켜냐고.

"여름은 더운 계절이잖아. 건강을 해치는 날씨가 되면 다시 켤 거야."

아직은 폭염 주의보가 발생해서 에어컨을 빵빵 트는 날에 환호하는 딸이다. 나도 오래간만에 냉풍을 뒤집어쓰니 그렇게 편하고 나른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두 시간 뒤에 리모컨 버튼을 꾹 눌러 껐다. 아이는 못내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다만 이 아이에게 지속 가능한 지구를 내가 실천할 수 있는 몫만큼이라도 물려주고 싶을 뿐이다. 시스템 에어컨이 최첨단 굴비가 될 지라도 말이다.    

태그:#에어컨, #선풍기, #전기세, #블랙아웃,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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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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