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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일 까미노 5일차
El Real de la Jara -> Monesterio 20.1Km 6시간 30여 분 소요


동이 트기 전 출발하면 덥지 않아서 걷기에도 좋고, 일출 때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 미처 준비가 끝나지 않은 친구에게는 중간에 카페나 혹시 쉴 곳이 있으면 거기서 보자고 말하고 7시 20분쯤 출발했다. 출발할 땐 깜깜했다.

돼지를 방목하다니? 
 
기원과 기능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세시대에 지어졌다는 성
▲ 성 기원과 기능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세시대에 지어졌다는 성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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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시작한 지 20여 분쯤 지났을 때, 오른편에 검은 실루엣의 탑이 고즈넉하게 서 있다. 까미노 길옆에 있어 가까이 가서 볼 수가 있었다. 스페인어와 영어로 씌어 있는 설명문을 번역기를 돌려서 읽어 본다. 이 성의 정확한 쓰임새는 알 수 없지만, 중세 후기에 지어진 요새이며 몇 개의 벽과 3개의 원형 탑이 남아 있다고 한다. La Vibora 시내, Monesterio, El Real de la Jara를 연결하는 경로가 안달루시아의 경계선과 가까운 독특한 위치에 있다.
 
커다란 도토리 나무 아래 방목되고 있는 돼지들이 지나가는 순례객들을 쳐다보고 있다. 돼지털에 윤이 난다.
▲ 도토리나무 아래 돼지들 커다란 도토리 나무 아래 방목되고 있는 돼지들이 지나가는 순례객들을 쳐다보고 있다. 돼지털에 윤이 난다.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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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동이 떠오르는 초원에 도토리나무가 펼쳐져 있다. 그 아래 여유롭게 풀을 뜯는 돼지들이 행복해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TV 여행 프로그램에서 소나 양을 방목하는 장면은 종종 봤지만, 돼지를 방목하는 풍경은 처음 본다.

이게 진정한 이베리코 돼지인가 보다. 도토리를 먹고 자란 이베리코 돼지는 한국에서도 유명하여 식당에서 비싸게 파는 것을 보았다. 스페인에선 도토리가 얼마나 많기에 그 많은 돼지에게 먹일 수 있다는 거지? 진짜로 도토리를 먹이는 게 맞아? 사료에다 도토리를 조금 섞어 먹이는 정도 아냐?라며 믿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보는 이 풍경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돼지의 영양상태도 좋은 건가? 아침 햇살이 비쳐 돼지 등에 난 털들이 반짝거린다. 사랑스럽다. 좁은 축사에 갇혀 있는 한국 돼지들의 모습이 익숙했던 나로서는 신기한 모습이었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낯선 내가 신기했는지 돼지도 같이 나를 쳐다본다. "얘들아 안녕? 한국의 돼지에 비하면 너네는 축복이야. 이렇게 넓은 땅에서 맛있는 먹거리를 풍족하게 먹고 자라니까. 그럼, 잘 있어!" 말을 건네고 발길을 돌린다.

알고 보니 도토리는 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식품 중의 하나라고 한다. 떡갈나무나 코르크나무에서도 도토리 비슷한 열매가 열리고 도토리나무는 스페인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방목된 돼지들은 도토리를 먹으면서 하루 14km 정도 돌아다니고, 그 과정에서 도토리뿐만 아니라 야생 딸기나 뿌리 버섯, 허브 식물 등의 자연 식품들도 섭취할 수 있다고 한다.

스페인의 대표 식품 중 하나가 스페인산 하몽인데, 최상급에 해당하는 이베리코 베요타 등급은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켜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스페인 정부와 지자체가 내건 조건이 흑돼지의 혈통이 순수한지, 건강 상태가 좋은 지 등은 물론 마리당 3000평 이상의 방목 활동 공간과 300그루의 참나무를 확보해야 하고 도토리 외엔 다른 어떤 사료고 먹이면 안 되는 등 아주 까다롭다고 한다. 일반 돼지는 6개월만 사육하면 되지만 이베리코 베요타 등급은 18~30개월 이상 기른 돼지로 만든다고 한다.
 
돼지 목장옆 소들이 방목되는 목장. 송아지들도 풀뜯다 말고 순례객이 신기한지 쳐다본다.
▲ 송아지 돼지 목장옆 소들이 방목되는 목장. 송아지들도 풀뜯다 말고 순례객이 신기한지 쳐다본다.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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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무리 옆에는 소들도 풀을 뜯고 있다. 털이 복슬복슬한 송아지는 또 얼마나 귀여운지... 얘네도 내가 신기한가보다. 풀을 뜯다 말고 울타리로 몰려와서 다 같이 한 줄로 서서 나를 쳐다본다. 서로 눈을 바라보았다. 얘네는 내가 멀리서 온 동양인인 걸 알까?

연초록색의 풀이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고 덩치 큰 나무 그림자가 넓게 풀밭에 드리워지는 풍경이 사랑스럽다. 햇살이 내 속에 들어와 에너지가 된 것처럼 가슴 속에서 희열이 차오른다. 걸어가다 보면 나무숲도 있지만 아름드리나무가 홀로 서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넓은 초원을 아침에 걸어볼 기회가 평생에 얼마나 있을까?
 
초원에 비치는 햇살이 기분을 좋게 한다.
▲ 아침햇살 초원에 비치는 햇살이 기분을 좋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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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 다른 나무 없이 홀로 앙상하게 서있는 나무
▲ 나홀로나무 초원에 다른 나무 없이 홀로 앙상하게 서있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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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사이 한기가 느껴진다. 늘 해가 뜰 무렵엔 추운 것 같은데 오늘 아침엔 전에 불지 않던 바람마저 불어서 더 춥다. 추울 때는 열심히 걸어야 한다. 걷다 보면 몸이 더워진다. 세 시간쯤을 걸어 목장 사이로 난 흙길이 끝날 무렵 'Ermita San Isidro'라는 소박하고 작은 건물이 보인다. 에르미타는 중세에 수도사 또는 은둔자가 거처하며 기도를 드리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규모도 작다고 한다.
 
에르미타는 중세에 수도사 또는 은둔자가 거처하며 기도를 드리던 곳이었다고 한다
▲ 에르미타 San Isidor 에르미타는 중세에 수도사 또는 은둔자가 거처하며 기도를 드리던 곳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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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을에 도착했다

이어서 큰 도로가 나타나고 옆에 주유소가 있었다. 그 옆에 휴게소가 보여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좀 쉴 겸 해서 갔다. 그리고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나 자동차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 중에는 대형버스에서 줄줄이 내리는 학생들도 보였다. 이제 코로나가 조금씩 풀리는가 보다. 학생들이 버스를 타고 단체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감동스럽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모임이나 만남을 자제하며 살았던가!

커피 주문도 잊고 사람들을 구경하는 사이 10여 분이 훌쩍 지났다. 친구는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아직 스페인 유심을 사용하지 않아 데이터가 없다.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젊고, 지도도 잘 보고, 걸음도 빠르니, 잘 오고 있겠지!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워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출발 후 10여km까지는 큰 오르막 없이 가는데 고속도로 휴게소 이후로 남은 10km 구간은 오르막길이다. 450미터에서 시작해 서서히 올라간다. 길에는 작은 자갈들이 있긴 하지만 걷기에 나쁘진 않았다.

휴게소를 벗어나자 오솔길이 보이고 길가 키 큰 나무들 사이로는 노란 꽃이 핀 초목이 보인다. 빗자루처럼 삐죽삐죽하고 가느다란 가지에 줄줄이 핀 것이 콩꽃과 비슷하다. 짙은 노란색이다. 우리나라의 개나리와 꽃의 생김새는 다르지만 개나리꽃처럼 흔하게 피어 있어 봄을 마치 봄을 알리는 꽃 같다.
 
자연을 보며 벌판을 혼자서 걸어가는 길
▲ 길 자연을 보며 벌판을 혼자서 걸어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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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 지나서 이어지는 길
▲ 오솔길 휴게소 지나서 이어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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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쯤 되어 드디어 마을에 도착했다. 숙소가 6곳이나 되는데 작은 마을 규모에 비해선 많은 편이다. 그중 마을 초입에 있어 덜 걸어도 되는 'Albergue Paroquial'로 갔다. 문은 열려 있었고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갔다. 2인실에 10유로였다.

일반적으로 공립 알베르게는 자원봉사자가 관리하는 경우가 많고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 같은데 이곳 봉사자는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해주었다. 우리 방 앞엔 작지만, 테라스가 있고 마을도 바라다 볼 수 있다. 주방에는 차도 준비되어 있고 먹거리도 여러 가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일단 숙소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친구도 내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숙소에 들어왔다.
 
유럽식 육회
▲ 타르타르스테이크 유럽식 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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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가 많이 들어있어서 고소하고 엄청 부드럽다
▲ 치즈케이크 치즈가 많이 들어있어서 고소하고 엄청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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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Honky Tonk Taberna Extremena'라는 바(Bar)로 갔다. 새로운 음식 먹어보기를 좋아하는 나는 타르타르스테이크, 치즈케이크와 맥주를 주문했다. 사실 타르타르가 무슨 음식인지도 모르고 오로지 스테이크라는 단어에 꽂혀 익힌 고기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숙주나물을 얹은 작은 패티 모양의 소고기 덩어리와 그릴에 구운 뼈다귀 반 조각과 샐러드가 곁들여 나왔다.

소고기 색깔이 붉은색이 아닌 약간 어두운 색이어서 생고기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뼈다귀 속에는 부드러운 골수가 있어 포크로 파먹었다. 이어서 패티 모양의 고기를 한 입 먹어봤더니 생고기였다. 타르타르(Tartar)는 유럽식 육회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고기는 부드러웠지만, 특별히 기억날 만한 맛도 아니고 그저 그런 맛이다. 심심한 고기 씹는 맛이었다. 우리나라 육회처럼 참기름 맛이 나는 고소한 육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레스토랑이 아닌 바라서 그런지 대부분 메뉴가 술안주 같았다. 치즈케이크는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맛이었다. 식감은 씹을 것도 없이 입에서 녹아서 사라지는 마치 연두부 같은 느낌이었다.
 
매우 만족했던 숙소. 친절하고 저렴하고 먹을거리 많이 준비되어 있고 작지만 테라스뷰도 좋음.
▲ Albergue Paroquial 매우 만족했던 숙소. 친절하고 저렴하고 먹을거리 많이 준비되어 있고 작지만 테라스뷰도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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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 숙소 근처를 한 바퀴 돌았다. 모네스테리오는 해발 고도가 약 760여 미터에 위치한 고산 도시다. 인구는 4000여 명이 조금 넘는 소도시이며 깨끗하고 아름답고 날씨가 좋지만 춥다.

5일차가 되어 이제 몸이 익숙해질 법하건만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낀다. 일찍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을 때 밖에 나갔던 친구가 돌아오더니 내일 묵을 숙소를 의논하자고 한다. 내일 숙소는 3곳이 있는데 다 비싸다며 그중에서 어디로 가는 게 좋겠냐고 묻는다.

그래서 제일 첫 번째 숙소로 가서 방이 괜찮으면 그곳에서 묵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숙소로 이동하기로 하고, 친구한테 항생제를 얻어서 먹고 일찍 잠을 청했다.

오늘 쓴 돈은 알베르게 10유로, 타르타르스테이크 12유로, 맥주 2병 4유로, 치즈케이크 4유로, 자리 차지 0.3 생수 0.3유로 총 30.6유로.

태그:#산티아고순례길, #은의길, #이베리코, #하몽, #타르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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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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