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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한국에는 시원한 물냉면이 있듯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도 국시가 있다. 러시아어로 'Кукси(국시)'라 불리는데, 고려인 강제 이주 당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곳곳으로 퍼진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함께 내려오는 러시아계 한인 고유의 음식이다. 고기, 계란, 오이 등의 고명과 흰색의 국수는 우리의 잔치국수와 닮았으나 뜨겁지 않는 미지근한 또는 찬 육수에 말아 먹는다.

국수의 면발은 길고 가늘지만 쉽게 끊어지지 않는 모양새가 130년 전 유라시아로 강제이주 당함에도 그곳에서 뿌리내려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역사와 닮았다. 러시아 타타르스탄에서 맞이하는 여름, 겨울의 카자흐스탄에서 먹었던 국시가 생각나는 날씨, 국시에 대한 기억을 기록해 본다.
 
에어 아스타나를 타고 이스탄불에서 경유지인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가는 길
▲ 알마티로 가는 길 에어 아스타나를 타고 이스탄불에서 경유지인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가는 길
ⓒ 강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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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서 밤 10시가 넘어 탄 비행기는 지구의 공전 방향을 가로질러 4시간때 유라시아 대륙 위를 날고 있다. 밝은 이미 구름 너머로 날카로운 태양빛이 두 눈을 찌르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흰색의 대리색보다 더 흰 구름의 끊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로 듬성 듬성 눈 쌓인 천산 산맥이 펼쳐있다. 1000년 전의 대륙의 여행자와 대상들은 말과 낙타로 유라시아를 넘나들었다면 1000년 이후의 나는 비행기로 동서양을 향해간다.
 
에어 아스타나를 타고 이스탄불에서 경유지인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가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천산 산맥
▲ 창 밖으로 보이는 천산 산맥 에어 아스타나를 타고 이스탄불에서 경유지인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가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천산 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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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야 호슈 켈디니즈"(카자흐어로 '어서오십시오')

알마티의 도착을 알리는 기내 방송과 함께 동서양의 끝이라 불리는 이스탄불에서 떠난지 6시간 만에 중앙아시아 중심인 알마티에 늦은 오후가 다 돼 도착했다.

수중에는 여행객들이 항상 들고 다닌다는 수학의 정석같은 여행도서도 없었고, 이스탄불→알마티, 알마티→서울행 티켓 두 장만이 있었을 뿐. 불교에서는 모든 시간이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호기심이 어쩌면 지금의 나를 이어주고 있던 것은 아닐까. 서울의 겨울 바람이 여러 산맥을 거쳐 매서움이 사라진 찬 바람이라면, 오후 4시가 넘어 밤의 소리가 들려오는 천산 산맥 넘어가는 해를 등진 알마티의 바람은 살을 베이는 기분이 들 정도로 날카롭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 알마티 국제공항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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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에 출발하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이 계획도 없이 오로지 신선함을 쫓아 도착한 이 도시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어야 할지 멍하게 앉아있던 찰라 보인 택시 광고를 따라 시내 중심지로 갔다.

알마티 중심지인 LG거리에서 보이는 천산산맥을 보니 유라시아 어딘가에 도착한 것이 실감난다. 지금부터는 또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을 두 발에 맞긴채 무작정 걸어본다.

회색의 도시는 반짝였고, 신비로웠으며 내 자신이 마치 고대의 여행자가 된 것 마냥 들뜨기 시작했다. 눈녹은 물과 미쳐 녹지 못한 눈 그리고 신발이 마찰할 때 들이는 소리 조차도 귀가에 설레임을 불어 넣는다. 지금 나는 마르코폴로의 동방 견문록의 어느 한 페이지의 등장인물이고, 회색의 뿌연 도시를 걷는 영화 속 장면의 주인공이다.
 
LG거리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시내 중심에 위치한다.
▲ Sulpark 술파크 (LG 거리) LG거리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시내 중심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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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쓰으윽' 칼바람을 피하고자 건너편 초록색의 건물 안으로 무작정 뛰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네. 정체를 알 수없는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분식집에나 가면 나는 고소한 깨기름 냄세가 코끝을 할퀴고 있는것으로 보아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은 알겠다, 시장이다. 
 
"카레야(러시아어로 한국을 지칭)에서 왔소? "
"우리는 '원동(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식 표현)'에서들 왔소, 원동에서들 왔지."
"요와서 이거 한 번 먹어보소."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시장(바자르 Bazaart)내 고려인 반찬 & 김밥 가게
▲ 고려인 반찬 & 김밥 가게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시장(바자르 Bazaart)내 고려인 반찬 & 김밥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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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들리는 익숙한 말투에 뒤를 돌아보니 초록색 앞치마를 두른 여러 명의 아주머니와 할머니께서 계속해서 지나가던 나의 발걸음을 잡는다. 깨기름 냄새가 어디서 올라오나 했더니 여기다! 참깨 기름 듬뿍 발라 당근, 계란, 오이 그리고 각기 다른 참치와 맛살 등을 넣어 만 김밥 여러개가 피라미드처럼 쌓여있고, 그 옆에는 당근으로 담근 당근 김치와 오이지까지. 어릴적 살던 경상남도 산청의 시골 장에 가면 보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았다.

얼마만의 김밥인가 싶어 맛살 김밥, 햄김밥, 오이김밥까지 정신없이 샀다. 한국의 분식집에서 먹던 김밥에 비해 김밥 속의 종류가 적기 때문에 두껍지 않는 편이였으나 손에 쥐고 치아로 쓱쓱 긁어 뜯어 먹기에는 좋은 테이크아웃에 특화된 김밥이다.

커다란 둥근 타원 형태의 돔 모양 천장 아래 여러 반찬가게와 식료품점이 모여있는 실내 시장의 모습을 띈 이 곳은 '바자르'라 불리는 현지 시장이다. 종류 별로 비슷한 식품까지 상점이 모여있는데 까레이스키(한국) 상점은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카자흐스탄 알마티내 시장 (바자르 Bazaar)에서 먹은 고려인 당근 김밥
▲ 고려인 당근 김밥 카자흐스탄 알마티내 시장 (바자르 Bazaar)에서 먹은 고려인 당근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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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김밥이 든 비닐 봉지를 손목에 끼고, 다른 한손에는 김밥을 들고 어그작 어그작 씹어 먹고 있는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돔 형태의 건물 양 가를 두르는 형태로 2층이 올려있는 구조였다. 신기하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2층 계단을 올랐다. 2층에는 사무실 내지 창고가 모여 있는데 그 사이에 식당이 하나 있었다. 간판도 국시, 상점 입구에도 국시 사진을 프린트 해 놓은 이미지가 크게 붙어있는 곳이었는데, 김밥과 먹으면 맛있을 것 같아서 일단 들어가봤다. 
 
"어서오시소, 카레아에서 왔소?

주인으로 보이는 직접 음식을 조리하시는 할머니께서는 쪼글쪼글한 눈주름이 울퉁불퉁해질 정도로 웃으시며 반기셨다. 테이블 4개 정도 놓여 있은 작은 평수의 국시집에 고명 냄새가 풍겨 온다.

냉면 그릇만한 크기에 담겨있는 국시 면과 그 위에 언쳐있는 계란, 오이, 고기, 등 오색의 고명들이 한국에서 먹던 국기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국시의 국물은 차갑다라는 것인데, 차가우면서도 고기 육수와 고명맛이 어울어져 음식과 국물의 깊이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먹는 고려인 국시. 계란, 오이, 고기 고명과 흰색 국수가 한국의 잔치국수와 흡사하다. 단, 국시는 뜨겁지 않는 고기 육수를 담아 먹는다.
▲ 고려인 국시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먹는 고려인 국시. 계란, 오이, 고기 고명과 흰색 국수가 한국의 잔치국수와 흡사하다. 단, 국시는 뜨겁지 않는 고기 육수를 담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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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시 한 그릇을 앞에 두고 건너편에 앉아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 날 바라보는 할머니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어릴적 나를 바라보시던 눈빛과 닮았다. 꼬마인 내가 내 만한 아빠숫가락(어른용 숫가락)으로 밥을 먹을때면 외할머니께서는 건너편에 앉아서 천천히 먹으라며 따스한 말과 반찬은 번갈아 주셨다.

국시의 국물까지 모두 먹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고려말'로 몇 마디 해 주신 이야기들은 모르고 있던 한국 근현대사의 한 부분이었다. 심장 어느 한 곳이 뜨거워졌고, 뜨거운 열기에 올라 눈 가에 숨어있던 눈물이 땀처럼 맺혔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시장(바자르 Bazaar)에는 고려인 김밥, 반찬, 김치, 국시 등 많은 고려인 가게와 식료품 가게가 많다.
▲ 고려인 음식 가게가 많은 알마티 시장(바자르 Bazaar)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시장(바자르 Bazaar)에는 고려인 김밥, 반찬, 김치, 국시 등 많은 고려인 가게와 식료품 가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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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부터 1937년까지 진행된 스탈린치하의 고려인 강제이주는 원동(블라디보스토크) 지방의 대부분 고려인이 시베리아횡단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사건으로 약 20만 명이 이주, 약 2만5000명이 사망했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Ushtobe)와 우즈벡키스탄 타슈켄트(Tashkent)에 강제이주됐고, 이후 키르키즈스탄, 카직키스탄, 우크라이나 그리고 러시아 곳곳으로 재정착을 위해 이주했다.

조선인을 일본의 첩자로 오해한 스탈린은 강제이주를 통해 조선의 정신을 꺾으려 했지만, 스탈린은 실패했다. 이주한 한인들은 유라시아 곳곳에서 다시 한국전통의 부락을 만들고 겨울이면 함께 김장을 담그고, 마을의 잔치가 있을때면 국시를 만들어 먹었다. 

러시아에서 러시아와 터키-투르크지역의 언어와 이문화간 커뮤니케이션 석사 졸업반인 나에게 중앙사이아 고려인의 언어와 문화는 연구의 대상이자 기억하고 기록해야할 역사책의 한 부분이다. 알마티에서의 짦은 시간은 나의 학문의 세계를 넓혀주었다. 

참깨 냄새가 진동하던 김밥을 먹으러 그리고 국시를 먹으며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러 올해는 알마티를 경유하는 서울행 티켓을 구매해야 겠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위치한 시장내 고려인 식당에서 먹는 국시 한 그릇
▲ 카자흐스탄 고려인 국시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위치한 시장내 고려인 식당에서 먹는 국시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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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알마티, #카자흐스탄, #고려인, #고려인음식, #유라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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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연방대학교 문화간 의사소통에서의 튀르크어족으로 문헌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현재는 동대학의 국제관계대학 박사과정에서 투르크민족과 언어관계, 러시아-튀르키예 국제관계를 연구하며 KBS 글로벌 통신원, 문화뉴스 칼럼니스트로 활동합니다. 틈틈이 튀르키예의 동물권리에 대해 기록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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