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한국 대중가요를 선곡해 들려주는 라디오 음악방송 작가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은 잠든 서정성을 깨워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에 맞춤한 음악과 사연을 통해 하루치의 서정을 깨워드리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5월이 짙어질수록, 계절이 그 꽉 찬 얼굴을 드러낼수록 존재감을 더해가는 꽃이 있으니 이는 두말할 것 없이 장미다. 내겐 사랑스런 장미를 원 없이 조용하게 혼자 즐길 수 있는 비밀 포인트가 있다. 매일 저녁 어스름, 운동을 위해 집을 나서 익숙한 골목길을 돌아 나지막한 봉우리를 가진 산 아래 자리한 아주 소담한 초등학교 초입에 다다른다. 거기에 눈길을 사로잡는 붉은 장미의 군락이 있어 시시때때로 도시탐험자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코스 외에도 소위 '무슨 무슨 길'이라 불리는 핫플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나, 좁지만 나름 예쁜 물길을 지닌 '신천둔치'를 따라 걷는 것도 좋아한다. 동네를 휘휘 둘러보면서 어제와 같은 듯 다른 오늘의 풍경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나의 소소한 행복이다. 

하지만 5월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처음에 언급한 이 길로만 내내 발걸음을 옮겼다. 이유는 오로지 하나, 역시 장미 때문이었다. 초록색의 철제 담장을 휘감으며 보색의 붉은 자태를 집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미를 외면할 재간이 내게는 없다. '오늘은 다른 길로 좀 걸어봐야지' 굳은 마음을 먹어도 무엇에 홀린 듯 다시 그 담장 앞에 서서 장미향을 '킁, 킁' 소리까지 내가며 맡는 나를 누가 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장미'라는 꽃에 어울리는 수사는 많고 많지만 내게 누군가 한 마디로 장미를 정의하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고혹이라는 단어를 붙여줄 것 같다.

'장미'라는 꽃에 어울리는 수사는 많고 많지만 내게 누군가 한 마디로 장미를 정의하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고혹이라는 단어를 붙여줄 것 같다. ⓒ pixabay

 
'장미'라는 꽃에 어울리는 수사는 많고 많지만 내게 누군가 한 마디로 장미를 정의하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고혹이라는 단어를 붙여줄 것 같다. 매혹의 조금 더 너머에 있으면서 도도하기가 이를 데 없는 장미의 본성에 전혀 아깝지 않은 수식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우리 가요에도 '장미'를 주요 소재로 삼은 노래가 부지 지수다. 주로 연인을 묘사할 때 이 '장미'의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 혹은 뒤에 숨은 가시 돋친 성정을 빌려와 표현하고는 했다.

그 숱한 노래들 중 내가 단연 아끼며 즐겨 듣고 손꼽는 노래는 세 곡인데, 사랑과 평화의 '장미 한 송이', 민해경의 '그대 모습은 장미' 그리고 사월과 오월의 '장미'이다. 세 노래가 다 '장미'와 그를 닮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앞의 두곡이 이별의 선물, 헤어짐 이런 것들이 '장미'의 결에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면 사월과 오월 4기 멤버의 노래로 완성된 '장미'는 그야말로 '장미'를 추앙하는 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장미를 닮은 그 누군가를 흠모하여 노래하는 것일 수도.

한국 포크락의 영역에서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이정선이 곡을 쓰고, 김미선이 가사를 붙였다. 특히나 발매와 동시에 당시 권위 있던 TBC 동양방송 가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잦은 멤버 변화와 음악의 지향성으로 인한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그룹 '4월과 5월'의 명성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 고마운 노래이기도 하다. 

밝고 경쾌한 멜로디 라인과 그보다 더 여리하고 순정한 가사가 온전히 그것을 입증한다. 이런 이유때문인지 많은 후배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고 신해철이 이 노래를 보사노바 풍으로 재해석해 불렀다는 게 매우 흥미로웠다.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               
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   
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가시처럼           
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   
당신의 모습이 장미꽃 같아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을 부를 때  
장미라고 할래요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     
잠 못 이룬 나를 재우고 가네요   
어여쁜 꽃송이 가슴에 꽂으면              
동화 속 왕자가 부럽지 않아요  
당신의 모습이 장미꽃 같아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을 부를 때      
장미라고 할래요  / 사월과 오월 '장미' 가사


가사는 한 없이 단순하고, 명료하다. 당신에게선 꽃 향기가 나고 푸른 데다, 싱그럽기까지 해 그로 이해 장미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당신을 장미라고 부르겠다며 다소 오글거릴 수도 있는 찬사를 덧붙인다. 그냥 아무런 사이도 아닌 관계라면 부끄러움에 구석으로 도망가거나 치를 떨게 할 수도 있는 이 가사들이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하고픈 사람'으로 옮겨오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장미에 얽힌 고운 추억
 
 '사월과 오월'이 발매한 앨범. 대표곡 '장미'는 가요차트 1위를 차지하기는 등 인기를 끌었다.

'사월과 오월'이 발매한 앨범. 대표곡 '장미'는 가요차트 1위를 차지하기는 등 인기를 끌었다. ⓒ 사월과 오월

 
내게도 장미와 관련된 고운 추억이 하나 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것이 사랑이었던 것 같다. 그 어떤 연인보다 애틋한 감정을 주고받았는데 당시는 어렸던 탓인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서툴렀던 탓인지 온통 눈길만(가끔은 마음도) 주고받다가 고백 한 번 제대로 하지도 듣지도 못한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마도 내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음악과 시를 좋아한다는 공통분모는 물론이고 생각의 결과 생의 지향점이 엇비슷했다.  

간혹 삶의 거센 파도가 몰아칠 때 달려가기라도 하면 구구절절 늘어놓는 하소연에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경청하는 사람이었으며,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신이 나서 열거했을 때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선물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 살 아래인 나를 정말 친동생 이상으로 아끼고 보듬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잦은 만남을 갖진 못했지만 혹여라도 만남을 갖게 되는 날이면 꼭 장미 한 송이를 들고 나보다 더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내가 앉을 자리에 놓아두고는 했었다. 그는 이 하나만으로도 실로 낭만의 전형이었다. 그때 아마도 그 장미 한 송이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의 침묵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흔하게 꽃을 살 수 있던 때도 아니었는데, 그 장미 한 송이를 구하기 위해 애쓴 그의 노력과 장미 한 송이에 압축된 수만 수천의 언어를 완벽하게 읽어내고 이해하기엔 나도, 그도 너무 미숙했었다. 

"오빠야, 왜 맨날 비싼 장미를 사 오고 그라노! 오빠야 부자가?"
"어, 내 부자다, 마음 부자. 그라고 니 웃을 때, 장미 닮았다 아니가"  


지금이라면 다 알아차렸을 이런 대화 중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그때는 차마 다 몰랐었다. 혹시나 뭔가를 시작하기가 두려워 외면했을 수도. 사랑을 시작하기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 멈칫거리거나 뒤로 물러섰던 시간들이 아쉬움이나 상처가 아니라, 장미향만큼 아련하고 진한 잔향으로 남아있어서 어쩌면 다행이다 싶다. 

그렇기에 장미는 사랑이라는 나라의 모국어로, 사랑을 표현하고 구가하는 다른 어떤 언어보다 훨씬 큰 위력을 발휘한다. 장미 앞에선 모든 말, 모든 행동이 무력해지므로.

사월과 오월의 '장미'가 세상에 나온 지도 벌써 40년을 훌쩍 넘겼다. 그새 다사다난한 역사로 이어지던 그룹은 활동을 멈추었고, 노래도 세간에서 점점 희미해져 간다. 하지만 장미가 황홀하게 피어나 세상의 모든 악취를 덮어버리는 5월이 돌아오면, 누군가의 추억과 함께 이 노래는 다시 기억을 재생하며 살아나곤 한다. 장미를 소재로 한 노래들도 끊임없이 시대를 표상하며 새롭게 만들어지고 또한 불릴 것이다.

노래의 즐거운 릴레이는 이렇게 계절을 안고 끊임없이 이어지다. 우리 곁에 한 줄기 바람처럼 머물기도 하며, 어느 날엔 따스한 손길을 슬며시 건넬지도 모를 일이니 오늘도 뜨겁게 사랑하고 내내 살아 있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ggotdul 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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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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