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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  [최초공개] 5.18광주 목격한 미국인이 눈물로 쓴 '한글 수기'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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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에 머물며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는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당시 상황을 한국어로 증언했다.

<오마이뉴스>는 돌린저가 당시 연설을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작성한 연설문 수기를 입수했다. 오는 12일 <나의 이름은 임대운>(호하스)이란 제목의 5.18 회고록 발간을 앞두고 있는 돌린저는 이 수기를 전하며 "연설 장면이 녹화되지 않아 (당시 상황에 대한 증거는) 이 수기가 유일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5.18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5.18이 일어난 1980년은) 광주시민들이 억압에 저항하고 잔혹함을 거부하고 하찮은 존재로 치부되길 거부한 시점"이라며 "광주시민들이 힘을 모아 대한민국을 위해 행동한 이 사건은 모두가 기억하고 보존하고 보살펴야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1978년부터 한국에서 '평화봉사단(Peace Corps)' 자격으로 활동했던 돌린저는 이 수기를 직접 한국어로 작성했다. 1981년 작성됐다는 점에서 수기에는 '5.18민주화운동' 대신 당시로선 일반적이었던 '광주사태'란 표현이 담겨 있다. 1988년 규정 개정 이전에 쓰인 것이라 문장 마지막은 '~습니다' 대신 '~읍니다'로 끝나기도 한다.

당시 돌린저가 직접 연설을 하고 수기를 쓸 만큼 한국어에 꽤 능통했다고 하더라도, 미국인이 쓴 한국어 수기인 만큼 일부 문법이나 맞춤법, 주술관계가 어색한 부분도 눈에 띈다. 그럼에도 12쪽 분량의 이 수기는 돌린저의 감상뿐만 아니라 헬기사격 등 구체적 사건, 광주시민들과의 세세한 대화 내용이 꼼꼼히 담겨 있어 기록물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아래 수기 전문과 실물 사진이다. 수기 전문은 최대한 적혀진 그대로 옮겼으며 괄호 부분은 기자의 부연 설명이다.

[1쪽] "눈물로 준비한 연설"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 데이비드 돌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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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광주사태에 대해서 여러분께 말하고 싶습니다. 글을 쓰면서 눈물이 앞을 가려 이 연설을 준비하기 무척 힘들었읍니다.

광주사태는 한국인들이 잊지 못하는 사태이드시(이듯이) 나도 결코 잊지 못하는 사태입니다.

나는 결핵관리를 위한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천구백칠십팔년 사월 처음 한국에 도착하였읍니다. 처음 훈련을 마치고 군보건소에서 일하기 위해 전라남도 영암으로 보내졌읍니다. 내가 사귀었던 친한 친구들의 대부분은 대학생들이었고, 그들을 통해 한국의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읍니다. 나는 그들과 같이 천구백팔십년 봄이 한국인들에게 더욱 자유를 가져오기를 꿈꾸었고 기도하였읍니다. 그러한 꿈과 기도가 산산히(산산이) 부서진 것도 그들과 같이었읍니다.

[2쪽] "결혼식 다녀오다가..."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 데이비드 돌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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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친구의 결혼식에서 토요일을 보내고 (버스 환승을 위해) 광주에 도착한 것은 오월 십팔일의 일요일 아침이었읍니다. 나는 데모의 와중에 도착하였는데,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무차별하게 공격하였을 때이었읍니다.

계엄군이 가개(가게)로 사람들을 쫓아가서 노인, 어린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무차별하게 때렸읍니다.

일단 사람이 기절하거나 거의 기절할 정도로 맞은 후에 금남로 한가운데로 끌려가서 강제로 트럭에 던져진 후 끌려갔읍니다. 수 시간 동안 진행된 것 같읍니다. 군대가 결국 부상자를 데리고 금로(금남로)로 되돌아 왔읍니다. 금(남)로의 옆길에 시민들의 떼가 모였고, 긴장이 군대가 사용한 최류(최루)가스처럼 퍼졌읍니다.

시내를 겄는(걷는) 동안 우리는 한 괴로워하는 여인을 만났는데, 이 여인은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이러한 일이 외(왜) 일어났는지 알려고 하였읍니다. 거의 동시에 한 나이든 신사가, 사람들이 자유와 민주를 원한다는 것을 정부에 보여주기 위해 시민들이 항의한다고 우리에게 말하였읍니다.

[3쪽] "소통 끊겨... 걸어서 광주로"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 데이비드 돌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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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은 며칠 동안에 끝났지만 광주의 시민과 학생들에게서 긴장을 느낄 수 있었읍니다.

그날 저녁 아홉시가 통금이어서, 나는 한 친구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영암으로 돌아왔읍니다. 석가탄신일인 21일 금요일(실제론 수요일)까지 나는 광주에 돌아오지 안았(않았)읍니다. 화요일(5월 20일) 저녁, 수요일(5월 21일) 아침에는 광주와 모든 소통이 끊겼읍니다.

나는 친구들과 같이 있고, 무슨 일이 진행되었는지 알기 위해 (5월 21일) 나주에서 광주로 걸어왔는데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검은 베레(공수부대)가 도착하여 시민들의 의지를 부숴트리려(부서뜨리려) 하는 것이었읍니다.

두시 삼십분경 광주에 도착하였는데, 걷는 동안 학생과 시민을 실은 많은 트럭들이 전(두환)의 정권 획득에 저항해야 한다는 말을 나주와 목포 사람들에게 전하러 지나갔읍니다. 내가 도착했을 때 핼(헬)리콥터가 금(남)로에서 떨어져 있는 길에 모여 있는 군중들에서 총을 쏘며 시내를 날고 있었읍니다.

[4쪽] "공포 부른 헬레콥터 소리"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 데이비드 돌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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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과를 본 것은 다음날(5월 22일) 아침 광주의 병원에서 이었읍니다. 부상자는 상처가 어깨나 가슴에서 시작되어 등 아래쪽으로 나와 있었읍니다. 가슴이나 목 아래로 마비되어진 사람들도 Helicopter(헬리콥터) 때문이었읍니다. 그들은 그들의 소리로 공포를 가져왔읍니다.

(내가 광주에 갔던 5월 21일) 시내는 어른, 아이들 모두로 가득찼고 검은 베레는 도청(전남도청)으로 돌아갔읍니다. 그들은 금(남)로로부터 시민들을 분산시키려 탱크로 금(남)로를 향해 총을 쏘며 올라왔읍니다. 이때 시민들은 M-1과 Calbin을 갖게 됐으나 사용하지 않았읍니다. 그들은 피를 흘리길 원치 않았고 그들 형제들의 피를 흘리기를 원치 않았읍니다.

군대의 도청 차지가 끝나게 된 날(5월 21일) 시민들이 도시를 차지하게 되었읍니다. 그날 저녁 군대는 철수했읍니다. 시민들이 결국 자신의 도시를 차지하게 되었읍니다. 그들은 부서지기 쉬운 자유를 가지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광주는 그들의 것이었읍니다.

나는 외국 레포트에 광주가 자유를 위해 댓가(대가)를 치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날(5월 22일) 아침 병원을 방문했읍니다. 병원들은 부상자로 넘쳐 흘렀읍니다.

[5쪽] "심하게 맞아 알아볼 수 없던 사람"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 데이비드 돌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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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Berets(베레)가 "Tumbling" 총알 즉 들어가는 데는 작은 구멍을 내지만 몸 안에 들어가서는 대파괴시키는 그러한 총알을 사용한 것을 안 것은 병원에서였읍니다.

총검으로 찢겨진 사람, 매우 심하게 맞아서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을 보았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이 가해졌는가를 본 것 또한 그곳에서 였읍니다.

그러한 것들이 광주시민들이 맞은 죽음의 종류들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이해했읍니다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표현했읍니다. 그들은 검은 Beret(베레)에 의해 즉석에서 죽임을 당했고, 기다렸다가 죽임을 당할 수도 없었읍니다.

그날 오후 도청 앞에 한 대회가 있었는데, 시민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고 시민들을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희생할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하였읍니다.

그 지도자들 중의 몇몇은 나의 친구이었고 나머지들도 나의 친구가 되었읍니다.

[6쪽] "우리는 하나의 큰 가족"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 데이비드 돌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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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 사이에는 조화가 있었고, 그들이 위해서 사운(싸운) 것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었읍니다. 수요일(5월 21일)은 희망의 기운으로 끝났읍니다. 우리가 우리의 도시와 운명을 좌우하였고 우리는 하나였읍니다. 학생, 교수, 일하는 사람 모두가 하나였고 우리는 광주의 시민이었고 우리는 광주였읍니다.

시민위원회가 오후 아홉시 통금을 선포하였고 모두가 지켰읍니다. 광주의 이상스런 적막은 이따금 도시 변두리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의해 끼어지곤 하였읍니다. 목요일(5월 22일)은 더욱더 희망과 희열의 기분이 느껴졌고 군인들은 도시를 다시 차지하지 않으려 하였읍니다. 광주는 아직도 시민들에 속해 있었읍니다. 우리는 광주의 상처를 깨끗이 하기 시작했고 부상을 치료하고져 시도하였읍니다.

사람들이 같이 일함에 따라 흥분의 분위기였읍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여주는 하나의 큰 가족이었읍니다.

[7쪽] "가장 행복했고, 가장 슬펐던 날들"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 데이비드 돌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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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령부와 협상이 시작되었고 시민 대표부(는) 정부의 요구가 무엇인지 들었고 중요한 요구는 시민들로부터 무기를 회수하는 것이었다.

그날 오후 집회에서 45명의 희생된 광주시민들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읍니다. 우리는 자유한국을 믿으며 희생되었던 그들을 기념하여 애국가를 불렀읍니다. 그들은 도청 건너편에 있는 체육관에 모였읍니다. 시민대표들인 나의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니 죽은 사람의 숫자가 토요일(5월 24일) 오후까지 육백칠십사명이었읍니다.

군인들이 광주를 쳐들어오기 전가(까)지의 날들은 내가 한국에 있었던 날 중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고 또한 가장 슬픈 날들이었읍니다. 나는 그날들을 내가 염려했던 친구들과 사람들과 보내며 내가 올(옳)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하였읍니다.

나는 또한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을 위해 돌아간(돌아가신, 즉 죽은) 친구들의 관을 보았읍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시민대표부가 앞으로 피흘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또한 광주의 지속적인 자유를 위하여 협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읍니다.

[8쪽] "미 대사관 중재 좌절... 광주시민 황폐화"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 데이비드 돌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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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정부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민들로부터 무기를 모으고, 정부가 요구한 무기가 매일매일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웠읍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좌절이 보였읍니다. 그들은 협상이 단지 정부가 공격하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을 알았읍니다. 그들을 위해서 미 대사관 협상 중재의 요청은 좌절되었읍니다.

대신에 미국은 그 사태를 선동하는 이북공작원을 두려워 했기 때문에 비행기를 보냈읍니다. 제삼세계의 어떠한 나라의 사람도 자신의 운명을 조정하려고 하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라고 추측합니다. 우리는 단지 모든 미국인들이 원하는 것과 같은 자유와 민주를 원하는 대한민국의 시민들이었읍니다.

한국민들과 광주의 시민들은 미국 정부가 광주시민들을 황폐화시켰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9쪽] "검은 베레가 언제고 공격해올 걸로 예상"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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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요일(5월 25일)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외국기자들을 위하여 번역을 해주거나 친구들과 같이 도청에서 보냈읍니다. 나는 도청에서 토요일(5월 24일) 저녁을 시민 대표부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아보며 한 친한 친구와 이야기하며 보냈읍니다. 이때는 지도자들은 더 이상 정부를 믿지 않았으며 검은 베레가 언제고 공격해올 것으로 기대(예상)했읍니다.

그날 저녁 나는 한 퇴역 군인을 만났읍니다. 그는 40대 중반이었으며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군인으로 지냈읍니다. 그가 군악대에 주시하는 동안 우리는 잠시 동안 이야기했으며 생달걀을 먹었읍니다. 그는 그들이 우리의 지친 몸을 도울 거라고 말했읍니다. 그는 그의 가족, 아들, 딸에 대해 이야기했고 왜 그가 시민들을 돕는지 이야기했읍니다.

그는 왜 정부가 광주의 시민을 죽일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했고, 그가 전에 알지 못했던 기본 인권과 자유를 자기 자녀들이 어떻게 갖기를 원하는지 이야기했읍니다.

[10쪽] "그날 내렸던 비, 광주의 눈물"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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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 기꺼이 죽을 것이었읍니다. 나는 그를 그날 저녁 이후 다시 보지 못했읍니다. 일요일(5월 25일) 아침 비오는 것을 보았고 지금 다시 그것이 광주의 눈물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우리가 그 당시 몰랐던 것을 광주는 알았읍니다.

나는 그날 아침 명상하고 싶어 교회에 갔읍니다. 내가 도청에 돌아왔을 때 도청은 함성소리 안에 있었읍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났읍니다. 도청 앞에 있던 사람이 말하길 누군가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길 나의 친한 친구라는 것입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나는 전남대학병원으로 뛰어가서 응급실에 있는 그를 발견했읍니다. 심하진 않았지만 그 주를 먹지도 자지도 않았기 때문에 상처는 그에게 더 심한 영향을 주었읍니다. 그의 형이 그를 그날 오후 집에 데려갔읍니다. 나는 그를 다시 보지 못했고 그는 군사들이 다시 돌아올 때 싸우다 죽을 것이라고 맹세했읍니다.

[11쪽] "낙심을 깨는 젊은 여인의 외침"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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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친구의 집에서 지쳐 녹아 떨어졌읍니다.

군인들이 화요일(5월 27일) 아침 세시 삽십분경 공격해왔읍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학생들은 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을 월요일(5월 26일) 저녁 알았읍니다. 그들은 도청에서, 금(남)로에 있는 YMCA에서 USIS빌딩 근처에 있는 여관에서 같이 자기로 결정했읍니다. 나는 몇몇 평화봉사단원과 같이 묵었읍니다. 우리는 마루에 누워 싸우는 것을 들었읍니다. 기관총소리가 시민들의 카빈총소리에 잇달아 들려왔읍니다.

이와 같은 낙심의 노래를 깨는 소리 하나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군대의 공격을 알리며 시민들이 뛰어나와 그들의 도시를 위해 싸우라고 알리는 젊은 여인의 소리였읍니다. 대부분의 총소리가 (5월 27일 오전) 일곱시경에 끝났읍니다. 우리는 밖에 나가 시내를 돌아보았읍니다. 십오명의 죽은 사람이 쓰려져 거리에 누워 있었읍니다. 그들은 오후 늦게까지 거리에 남아 있었고 그들을 덮으려는 시도가 산재해 있는 군인들의 재빠른 행동에 의해 취해졌읍니다.

[12쪽] "죽은 사람 중 내가 잘 아는 네 사람"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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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 중 내가 잘 아는 네 사람을 셀 수 있었고, 그들은 친구들이었읍니다. 그것은 광주를 위해 생명을 바친 좋은 친구들의 숫자가 열 명이 되게 했읍니다. (이외에도) 군인들이 돌아온 후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나는 나로 인해서 어떤 사람도 구속되길 원치 않읍니다. 만약 내가 길에서 사태에 관계된 친구를 만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약간의 경계와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매년 이때가 되면 내 가슴은, 나의 가슴은 광주사람들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헛되이 생명을 바치지 않았기를, 또한 언젠가 한국이 그들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태그:#5.18민주화운동, #데이비드 돌린저,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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