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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에서 맛집을 찾다 보면 노키즈존(No kids zone) 문구가 붙어 있는 음식점이나 카페를 종종 마주하게 됩니다. '어린이는 올 수 없는 곳', 왜 그곳에는 어린이가 들어가면 안 되는 걸까요? 어린이가 사고를 칠까 봐 그럴까요? 아니면 시끄러워서? 하지만 모든 어린이가 사고를 치거나 시끄러운 것은 아니고, 어린이가 아니라고 해서 사고를 치지 않거나 시끄럽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대학생이나 직장인, 종교인, 취객들이 식당이나 카페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종업원을 힘들게 한다고 해서 노대학생존, 노직장인존, 노종교인존, 노취객존이 만들어진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노키즈존만 즐비하지요.

어린이가 실제로 영업을 방해했을 때 가게에서 내쫓는 것도 아니고 '어린이는 영업에 방해가 될 거야'라는 편견만으로 가게에 어린이 손님이 입장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 이는 어린이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구체적인 차별행위로 발현된 것입니다. 어린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나는 아직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어리다는 이유로 '잘못할 게 뻔한 존재', '거부해도 되는 존재'처럼 취급받는다면, 너무 괴롭지 않을까요? 그와 동행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또 어떨까요?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아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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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법적 혼인 관계를 맺는 절차는 전혀 복잡하지 않습니다. 근친혼, 중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성인 두 명이 쌍방 합의하고 구청에 혼인신고를 접수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둘은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법적 혼인 관계에서만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지요. 그런데 이토록 간단한 혼인신고의 문턱을 넘은 사람이, 동성 연인 사이에서는 지금까지 단 쌍도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결혼식도 하고 수십 년을 같이 살며 사랑을 나눈 연인이, 단지 성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이 되지 못합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상대가 아파도 서로 법적인 보호자가 되어줄 수 없습니다. 동성과 결혼하고 싶어서, 자유롭게 사랑하고 싶어서 한국을 떠날까 고민하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 그들을 떠나게 만드는 차별에 분노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차별하는 것은, 차별할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별의 화살은 주로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향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로도 차별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때로 차별받지 않는 존재들은 차별받는 존재들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차별받는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나는 차별받지 않으니까, 나는 괜찮으니까…' 이런 마음으로 차별받는 존재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한목소리로 차별에 맞서야 합니다.

'차별을 금지하자'는 우리의 요구가 너무 모호하고 선언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차별을 금지하려 한다면 우리 사회가 과도하게 경직되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리라고 지레 걱정합니다. 음, 생각해보면 때로는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부모님의 행위를 차별이라고 금지할 수는 없겠지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은 학생들에게 사탕을 선물로 주는 선생님의 행위도 그렇고요.

하지만 차별이라는 행위가 항상 그처럼 모호한 것만은 아닙니다. 폭력이 우리의 몸에 멍과 상처를 남기듯이, 어떤 차별은 이 세상에 우리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흔적을 남깁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수시전형에서 감점을 당한 입시준비생,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 통보를 받은 대학생, 건강상의 이유로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 취업의 꿈이 좌절된 취준생, 육아 휴직계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한 직장인… 그들이 마주한 차별이라는 현실은 전혀 모호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들 앞에 놓인 차별은 단단한 돌벽만큼, 드높은 장벽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꿈을 번번이 좌절시키고, 그들을 울게 하고, 나아가 그들을 죽게 만드는 냉혹한 실체입니다.

'갑자기 웬 죽음이냐?'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겁니다. 어제까지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주고받던 친구들의 부고가 그 친구의 오늘자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것을 보고 나면,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장난치던 친구가 갑자기 한 달 동안이나 연락이 두절 되었던 이유가 자해하고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문득 깨닫게 됩니다. 갑작스럽다는 말조차 허망하게 느껴질 만큼 죽음이 우리의 삶과 너무나도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것이 너무나도 쉽게 찢어지는 연약한 막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맙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사고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죽음이 그들 탓이라고 말합니다. 목숨을 바칠 만큼 절절한 영화 속 사랑 이야기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성소수자의 죽음이 좌절된 사랑 때문이라는 말은 믿지 않습니다. 매년 4월 20일이면 저명한 장애인을 무대에 세우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람들이 평범한 장애인의, 평범하지 않은 죽음 대부분이 예상할 수 있었던 사고라는 사실은 부정합니다. 연일 뉴스에서 보도하는 살인 사건 소식에 분개하던 사람들이 외국인과 이민자, 여성과 노인의 죽음 앞에서는 그럴 만했다며 인자한 재판관이 됩니다.

더는 이렇게 위태롭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내디디면 깨질지도 모르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소중한 친구들과 행복할 때 같이 웃고 슬플 때 같이 울며, 고된 삶을 살아가는 서로를 위로하고 내일을 꿈꿀 용기를 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점점 그 친구들과의 내일을 꿈꾸기가 두렵습니다. 마치 우리가 꾸던 꿈이 죄라도 되는 듯, 함께 내일을 꿈꾸던 친구가 하나둘 깊은 물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문득,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역시 어둡고 깊은 물 속으로 사라지게 될까 두렵습니다.

차별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내일을 꿈꿀 수 없습니다. 내일을 꿈꾸는 사치를 부리기에 오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차별금지법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당장, 지금 당장 제정되어야 합니다. 차별금지법 없이 우리의 내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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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차별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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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차별의 예방과 시정에 관한 내용을 담은 법입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 행동하는 연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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