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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편의점이 생겼다. 이전에는 수공예를 배우는 가게였다가 펫숍을 거쳐 조금 오래 반찬가게를 유지하다 지금의 편의점이 되었다. 가게가 생겼다가는 금세 사라지곤 하는 상권과 무관한 곳이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다 보면 '이런 게 생겼네' 하다가 또 다른 가게가 곧바로 들어오곤 했던 것이다.

편의점이 생기고 나서 지하에 있던 커다란 대형 마트가 문을 닫았다. 운영이 어려워 보이기는 했지만 아쉬울 때 가끔씩 이용하던 나름 대형 마트였는데 아들과 딸은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어쩌다 급하게 사다 줄 것을 부탁하면 시간이 걸려도 먼 곳의 편의점으로 가거나 초대형 마트의 동네 버전 매장을 이용했다. 다니던 길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편의점이 생긴 후로는 종종 그곳에 들렀고 필요에 따라 무언가를 자주 사 들고 들어왔다.

구매 품목은 다양했다. 간편식부터 상비약은 물론 원 플러스 원의 경제적인 음료까지. 들어오며 덧붙이는 말은 편의점이 생겨서 너무 좋다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편의를 제공하는 점포인 것 같았다.

남편이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3회 차부터 병원 식사를 신청하지 않았다. 음식을  잘 못 먹기도 했고 냄새도 힘들어했기에. 처음엔 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해 병원으로 날랐고 회차가 지나며 병원 내 편의점에서 음식을 공수했다. 

그러다 어느 날 병원 편의점에 OO우동이 동났다며 집 근처 편의점에서 사다 줄 것을 부탁한 적이 있다. 동네 편의점을 8곳을 모두 뒤졌고 비슷한 종류의 제품을 두 곳에서 찾았다. 편의점 순례를 하며 동네에 편의점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매장마다 가져다 놓는 품목이 다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후로는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편의점이 한눈에 들어왔고 원 플러스 원이나 투 플러스 원의 쏠쏠한 경제적 이익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용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곳이 불편했다. 내게는 동네 슈퍼가 편했고 시장이 편했고 길거리 노점상이 편했지, 편의점이 편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쩌다 들어가면 답답했다. 매대로 가득 찬 실내, 한 사람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통로, 밖으로 나오면 한두 개씩 내어 놓은 야외 테이블에 가득한 담배꽁초와 쓰레기까지. 들어가기는 고사하고 지나칠 때도 외면했던 것 같다. 그곳에서 라면에 소주병을 기울이는 취객을 자주 보았고 편의점의 인상은 더 안 좋은 쪽으로 굳어졌던 것 같다.
 
불편한 편의점(40만부 기념 벚꽃 에디션), 김호연 (지은이)
 불편한 편의점(40만부 기념 벚꽃 에디션), 김호연 (지은이)
ⓒ 나무옆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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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에는 마흔넷 직장인 경민이 나온다. 타고난 흙수저지만 성실함과 친절함이 무기인 그가 나이 들며 무너진 자존감과 회사에서의 굴욕, 집에서의 소외감을 풀 수 있는 소화제로 택한 곳이 청파동 골목의 작은 편의점이다.

이른바 '참참참(참깨라면, 참치김밥, 참이슬)' 메뉴로 부담스럽지 않은 하루를 마감하는 곳. 그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는 곳이 바로 편의점이다. 작품 속 경민을 마주하며 내가 몰랐던 이웃 누군가에 대한 연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생기는 느낌이었고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혼술족의 사연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책 제목은 '불편한 편의점'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곳은 손님들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따뜻한 편의점'이다. 매일 아침 야외 테이블을 깨끗이 청소하고, 추운 겨울밤 손님들에게 온풍기를 슬그머니 켜주며, 야밤에 도시락을 찾는 손님에게는 밑에 두었다가 챙겨주는 등 손님 하나하나의 취향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곳.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인물이 그곳에 있다.

범상치 않은 기억 상실자 '독고'씨의 활약이 가능한 것은 평생을 교직에 있다가 은퇴하고 편의점 사장이 된 70대의 염 여사의 안목 덕이다. 염 여사는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 준 노숙자 독고씨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 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한다. 다소 억지스러운 믿음의 근거는 지나온 삶에서의 '사람을 보는 눈'이 틀리지 않다는 스스로에 대한 어설픈 확신뿐이지만.

어디에나 있을 법한 진상 손님을 대하는 장면도 통쾌하다. 베테랑 시현도 긴장하게 만드는 '제이에스(진상 손님)'는 독고씨에게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밤새 외운 까다로운 담배의 이름을 기억해 손님의 요구에 즉각 응하여 시비를 차단하고, 당당하고 서늘한 눈빛에 굽히지 않는 자세로 제이에스의 트집에 가까운 봉투 제공 요구를 가뿐하게 받아넘긴다. 느린 말투지만 단호하게 진상 손님의 무논리를 논리로 대응한다.

사실 그의 정체는 의사였다. 이른바 '불사조 면허'를 가진 의사인 그가 의료사고에 연루되고 사고의 수습 차원에서 병원을 잠시 쉬게 된다. 병원에서는 다시 그를 찾지만 의료사고의 실상을 알게 된 가족은 경멸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해 술에 의지하고, 술은 기억을 휘발시키고. 그렇게 그는 서울역에 이르렀고 노숙자가 된 것이었다. 법적 제재가 아닌 양심의 가책이 그가 노숙자가 된 이유다.
 
이 나라에선 사람을 죽이거나 성범죄를 저질러도 의사 면허가 취소되지 않는다. '불사조 면허'라고 한다. 왜 그러냐고? 의료 기술자들이 법 기술자들과 친하기 때문이다. 그걸 믿고 우리는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그런 끔찍한 특권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다 보니 스스로를 전지전능한 신으로 착각한 건지 모르겠다.(p.262)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보다는 자신의 감정이 우선이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내친다. 그렇게 일방통행으로 사는 것이 손해보지 않는 방법이고 지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우직하고 일관된 믿음과 친절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염 여사와 독고씨가 보여준 것처럼.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인경에게서다. 요즘 도통 글쓰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소재도 고갈된 듯 떠오르지 않는다. 쓰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인생이 피폐해지는 것 같고 행복하지 않다. 작가로서의 마지막 작품을 고민하는 인경의 심정이 와닿는 요즘이다.
 
어떤 글쓰기는 타이핑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해왔다면, 그것에 대해 툭 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 만큼 생각의 덩어리를 키웠다면 이제 할 일은 타자수가 되어 열심히 자판을 누르는 게 작가의 남은 본분이다. 생각의 속도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당신은 잘하고 있는 것이다.(p.163)

최후의 집필 장소인 청파동 편의점 앞 빌라에 잠시 입주한 인경은 '독고'씨에게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작품의 소재를 얻고 무대에 올릴 기회를 얻는다. 주변의 것들을 포착하고 궁금증을 키우고 작은 소재도 놓치지 않으려는 인경의 모습에서 글쓰기의 힌트를 얻어 본다. 주변을 잘 살피기. 그러고 나서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하기. 그렇게 해서 툭 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 만큼 생각의 덩어리를 키우기.

<불편한 편의점>은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가온 조금 특별한 편의점의 이야기'다. 사람은 모두 자기 성격대로 살아가고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또한 행복은 어렵게 만나고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준다.

작품 속 작가인 인경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준 희수 샘의 말처럼 행복은 멀리 도달하고자 하는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다. 불편한 편의점의 독고씨는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과 동시에 편의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원 플러스 원의 친절을 베풀고 행복으로 인도한다. 그 친절이 결국엔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p.140)

불편한 편의점 (40만부 기념 벚꽃 에디션)

김호연 (지은이), 나무옆의자(2021)


태그:#불편한 편의점, #친절,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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