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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이낙선 상공부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
 1972년 이낙선 상공부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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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10월유신 50년이 되는 해이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조치가 발표됐고 그때까지 모든 민주주의 제도가 정지됐다. 박정희의 유신체제 조치는 또 한 번의 '헌정유린사건'으로 기록됐다. 한국내 민생정치는 실종됐고, 골프정치는 '당정친선골프', '자매결연골프', '원내교섭단체친선골프'로 물을 만난 듯했다. 어쩌면 독재가 심해지면 질수록 골프정치는 더욱 난숙해져 갔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장기집권 길이 활짝 열린 상황 속 1971년 4월 대선에 이어 7월에 치러진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 민주공화당(이하 공화당)이 과반 의석을 구축했다. 한국사회는 점점 10월유신의 블랙홀에 빠져들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도 국회의원 선거도 그 전초전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민적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1971년 7월 28일 현직 판사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신청이 발단이 되어 판사 153명이 집단 사표를 낸 '사법부 파동', 탐관오리와 투기꾼이 결탁해 불거진 '광주대단지사건', 군사정권의 학원 병영화를 막기 위한 대학생들의 '교련반대운동', 서울시 일원에 발동된 위수령 및 대학휴교령 반대시위 등 각계각층의 민주화 요구가 더 거세졌다.

당시 사법부에는 민복기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원 판사 16명이 있었다. 그들 대우는 행정부 장관직과 동일한 봉급 13만 2천 원(1971년 기준)을 받았다. 민복기 대법원장도 골프 마니아인데, 1954년 성동구 구의동에 서울cc 군자리골프장을 만들 때 큰 역할을 했었다. 당시 그는 외자구매청 차장(현 조달청장)이었다.

군자리골프장 부지는 국공유지로써 구황실재산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 관리하고 있었고, 서울cc측 대리인으로 골프장 부지의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골프저널, 2021년 3월호) 부연 설명하자면, 지금은 '가짜뉴스'같은 팩트지만 이승만 정권때 고위공직자들끼리 모여 국공유지를 일부 떼어 골프장 부지로 정했는데 그 임차 계약 당사자가 지금에 조달청장이었다는 얘기이다.

1960년대 말 사법부에도 골프바람이 불었다. 판사들은 골프세트나 자가용을 살 여유조차 없었는데 변호사들에게 접대를 받으면서 신종의 '골프관례'가 생겼다. 또 <조선일보> 1971년 8월 26일자 기사에 보면, '작년에 대법원 판사들 전원이 청와대로부터 골프세트를 선사받은 후 사법부내 골프붐이 불어 양희경, 이영섭, 주재황을 빼고는 모두 초원에 나가 여가를 즐긴다'고 보도됐다.

특히 민복기 대법원장의 라운드 파트너는 일제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후배인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이었다. 골프장에서 '만년 콤비'로 유명했던 민복기와 홍진기 두 골퍼의 핸디는 17로 알려졌다. 서울cc 창립멤버이기도 한 이들은 주말마다 주로 삼성재벌 이병철의 안양cc에서 라운드를 했다.

1968년 6월 안양cc는 회원제 골프장으로써 코스 설계자 미야자와 조헤이(宮澤長平), 시공사 중앙개발(주)에 의해 완공됐다. 당시 안양cc 골프장은 '관계(官界)의 애용물'로 유명했다. 1968년부터 매년 안양cc에서는 '대법원장배골프대회'와 '국무총리배골프대회'가 열렸다.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이병철의 3남 이건희가 1967년 4월에 결혼해서 양쪽 집은 사돈관계를 맺었다. 홍진기는 이승만 정권 말기에 법무부 장관을 거쳐, 4.19시민혁명 때는 내무부 장관직을 지냈다. 홍진기의 장남이 지금 한국내 대표적인 싱크탱크로 알려진 '여시재'의 실세로 얘기되는 중앙홀딩스 회장 홍석현이다.

한편 한국 정치무대에서 골프정치가 당연시될 무렵, 여당의장과 국무총리는 번갈아 가며 초청하는 방식의 '당정친선골프'는 정례화됐다. 1971년 8월 22일 일요일날 비가 오는데도 한양cc(현 서울·한양cc)에서 김종필 국무총리가 주최한 친선게임이 지난번 백남억 공화당의장의 친선골프에 대한 답례로 열렸다.

정부 측에서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오치성 내무부장관(준장 예편), 남덕우 재무부장관, 김보현 농림부장관 등 반수가 참석했고, 당 측에서는 정책위의장 길재호(준장 예편), 중앙위의장 김성곤(쌍용재벌), 재정위의장 김진만(5.16쿠데타때 부정축재혐의자), 사무총장 길전식(대령 예편), 의원 구태회(럭키재벌, 현 LG), 민병권(중장 예편) 등이 대거 참가했다.

이날 골프대회에 이어 그다음 주말에도 같은 골프대회를 열어 정기국회 재회를 앞둔 당정협조를 도모한다는 것이었다.(경향신문, 1971.8.23.) 공화당 의원들이 많이 참가할 때는 40여 명 이상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8대 국회 여당 의원수는 113명이었다.

심지어 1971년 '10.2 항명파동' 다음날 개천절에도 김종필 국무총리와 백남억 공화당의장은 뉴코리아cc에서 따로따로 공을 쳤지만, 클럽하우스에서 만나 예정에 없던 담화를 나눠 기자들의 주목을 끌었다.(동아일보, 1971.10.4.)

'10.2 항명파동'은 당시 여당인 공화당 내 일부 국회의원들이 규합하여 오치성 내무부장관의 해임을 획책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cc 이사장을 하고 있던 여당의 '금고지기'로 알려진 김성곤 의원이 주동자로 지목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3대 재벌중 하나로 쌍용그룹 창업자인 김성곤은 1959년 국민학원(현 국민대학교)을 인수한 뒤 이사장에 취임했고, 1971년부터 현재의 정릉캠퍼스 시대를 열었다. 아니나다를까,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배우자 김건희의 박사학위 논문표절 의혹으로 시끌벅적한 국민대학교에 현 김지용 이사장은 김성곤의 손자이다.

'국가비상사태선언'이 1971년 연말에 선포된 이후 반년 동안 국회는 폐업상태였다. 특히 집권 여당 정치인들은 의사당 대신에 골프장에 출근할 기회가 더 많아졌다. 골프정치는 한층 번져나가 '당정친선골프' 이외에도 집권 여당 의원들끼리 '자매결연골프'까지도 만들어졌다. 동아일보 1972년 9월 11일자를 보면, 10일 개최된 '자매결연골프'는 경북 출신 국회의원들 10명과 전남 출신 국회의원들 10명이 푸른 초원 태릉cc에 모여 골프정치의 특권을 즐겼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를 기해 '대통령 특별선언'(10월유신)을 공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제3공화국의 헌정을 중지시켰다. 국회도 해산됐다. 계엄사령관에는 육군참모총장 노재현을 임명했고, 계엄사령부는 계엄군법회의를 설치했다. 노재현 계엄사령관의 핸디는 19였다. 그해 12월 27일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제4공화국이 시작됐다. 특권적인 골프정치 자체는 한층 물을 만난 듯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원내교섭단체친선골프'로 업그레이드됐다.

유신헌법은 서울시 교육감 조희연 박사의 주장처럼,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주어졌던 형식적 자유민주주의적 요소들을 정지시키거나 대거 후퇴시키게 된다. 대통령의 임기를 없앴고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을 부여했으며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할 수 있게 해서 입법부의 기능을 전면 무력화"했다.

최근 시민종편 RTV에서 방영된 역사다큐 <백년전쟁>을 통해 널리 알려진 '프레이저보고서'에도 유신체제는 이렇게 평가되고 있다. '유신헌법은 모든 권력을 사실상 박정희 대통령의 수중에 두려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1978년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조사, 분석, 제출된 한미 관계의 조사 보고서이다. 결국, 한국 현대사에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 신화를 만든 '개발독재' 신드롬이 시작됐다.

태그:#10월유신, #골프정치, #유신독재, #박정희, #군자리골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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