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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김종필 골프경기
 1972년 김종필 골프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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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여 년 전 일반 국민들은 골프를 특권층의 귀족 스포츠로 여겼고, 골프장은 정관계 파워엘리트 특권층의 ‘놀이공간’으로 치부됐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했다. 정치, 이권, 인사의 뒷거래가 그 공간에서 이뤄졌다. 소위 기득권 카르텔과 그들만에 골프장이 공존했다. 오마이뉴스 2022년 2월 8일자 기사에 보면, 1960년대 말 국회내 ‘코스모스골프구락부 결성사건’은 한국 골프정치의 화룡점정에 해당된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말 기존의 <관광사업진흥법>을 전부개정했다. 동시에 ‘관광진흥을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해 관광개발사업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다. 경향신문 1968년 8월 28일자에 보면, 이같은 계획은 우선 매년 16만명 정도의 외국관광객을 유치함으로써 약 5백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목표였다. 당시에 전국 호텔의 파친코 현황은 36개소 634대 정도였다.

또한 국제관광공사(현 한국관광공사)는 외국관광객을 유치한다는 이유로 워커힐 호텔에 ‘동양 최대규모의 카지노 시설 ’콘티넨탈 카지노클럽‘을 1968년 3월에 개장했다. 사실상 워커힐호텔도 국제관광공사에 의해 운영됐고, 국제관광공사는 1962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만들어졌다.(프레시안, 2017.7.5) 그때 중앙정보부장이 김종필 대령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관광진흥책 가운데 우리의 시선을 특별히 끄는 정책이 있다.
 
“②주한외국인들을 위한 휴양 및 오락시설을 대폭 증설코자 요정, 기생을 이른바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카지노, 도박장도 늘리며..”(조선일보, 1968.8.28)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국기계, 해운공사, 조선공사 등 국영기업체의 운영난을 핑계로 국공유재산의 헐값 불하를 서슴치 않았다. 당시 정부출자 국영기업체는 한국은행, 한국전력, 국제관광공사를 비롯한 총 36개였다.(1969년 기준) 박정희 대통령 1차 재임 기간에 ‘국공유지 재산불하사건’은 이미 국회의 특별조사대상이 됐었다. 국민의 공공재산을 특정업자들에게 헐값으로 넘겨주고 사익을 채워주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당시 충남 대덕군 유성면에 소재한 유성cc 코스부지가 물색될 때도 나중에 동아일보 1973년 8월 11일자 보도로 확인되었듯이, 정부는 도립임업시험장 28만 평을 관광개발에 기여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한국특수금속(주) 유봉선 사장에게 1억 2천만 원에 매각해 골프장으로 둔갑시켰다.

1969년 3선개헌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장기집권 문호를 열어줬다. 국회의원들과 행정부 고위공무원들의 골프정치 파문은 ‘코스모스골프구락부 결성사건’을 계기로 언론과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3선개헌 당시 반대투쟁을 한창 벌이던 야당인 신민당 역시 당내 의원 가운데 일부 변절한 의원들을 ‘골프족’으로 성토하면서, ‘초선 의원들도 골프장에 나가면서부터 당성이 흐려지고 공화당 의원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이상해졌다’고 골프정치를 힐난할 지경이었다.(경향신문, 1969.8.4)
 
1970년 한 해 골프인구는 전년도보다 20% 증가했고, 골프장도 용인cc, 부평시사이드cc, 오산cc, 유성cc 4개가 새로 개장해 전국에 14개가 됐다. 골프장 입장세가 1인당 1회 100원에서 250원으로 대폭 인상되어 세수는 늘어났다. 골프장에 입장세를 부과하기 시작한 것은 1964년 한양cc가 개장한 이후부터였다.(한양컨트리클럽 40년사, 2004) 세수를 놓고 볼 때, 골프장은 카바레, 나이트클럽, 파친코 등과 같이 유흥업소 취급을 받던 터이라 입장세(특별소비세) 납세대상이었다. 하지만 한양cc, 뉴코리아cc, 관악cc, 태릉cc, 안양cc 등 대부분 골프장은 제대로 된 정부의 인가도 없이 건설됐다.

당시에 집권당 민주공화당(이하 공화당)내 골프 동호회 ‘18구락부’가 있었다. 이 골프 친목단체 명칭은 핸디 18 골퍼로서 국회의원 18명으로 구성되어 매월 18일에 라운드를 한다는 의미였다. 오치성 사무총장, 김진만 원내총무, 김성곤 재정위원장, 장경순 국회부의장, 길전식 상공상임위원장, 송한철 사무차장, 국회의원 민기식, 이백일, 양정규(구락부 간사) 등이 모였다.(조선일보, 1970.3.29.)

 1971년 1월 23일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후보는 연초에 기자회견을 열고, ‘새해의 포부’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선거공약을 밝혔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⓵총통제 음모의 분쇄 ②민족안보의 전개 ③예비군의 완전폐지 ④대중경제 실현 ⓹농업혁명의 추진 ⓺부유세의 신설 ⓻전태일 정신의 구현 ⓼여성의 지위향상과 능력개발 등을 실현하고자 했다.

특히 부유세 신설은 세제의 일대개혁을 단행해서 부유세와 특별행위세를 신설하고, 호화주택이나 골프 등 사치행위 등에 중과세하고 노동자의 조세부담을 대폭 감면하는 조세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이었다. 기자회견 직후 당시 ‘김대중 후보집 폭발물사건’이 일어나 대선 정국을 긴장시켰다.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3월 초 대목 장사하듯, 또다시 ‘골프 금지령’이 백두진 국무총리 명의로 공무원과 국영기업체 간부들에게 떨어졌다. 일찍이 백두진은 한국 골프사의 새로운 원년인 1953년에 서울cc ‘창설동의자 18인’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6.25전쟁이 휴전되기도 전 그해 봄부터 서울칸트리구락부(서울cc) 초대 이사장 이순용을 중심으로 김진형, 김태선, 백두진, 손원일, 윤호병, 이기붕, 장기영, 전용순, 조주영, 최순주, 한홍 등 18인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순용은 해방직후 미국 첩보기관 전략사무국(OSS) 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복심이었다.(골프저널, 2021년 2월호) 한국사회 특권층의 특성으로써 골프를 기업가들은 ‘비지니스의 연장’이라고 푸념하곤 했고, 정치인들은 골프를 필수 덕목으로 여기는 사이에 ‘사랑방 정치’ 또는 ‘요정정치’가 골프정치로 번지고 있었다. 요사이 ‘식사정치’라는 신조어가 횡횡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보면, 격세지감이 참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1971년 4월 대선 개표 결과 김대중 대선후보를 누르고 94만여 표를 더 얻은 박정희 공화당 후보가 그때도 영남에서 몰표를 얻었다. 이승만 정권이 3선개헌으로 장기집권을 꾀한 이후로 또다시 박정희 후보가 3선 대통령에 당선됐다.

승기를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에 앞서 6월 초 조기 개각을 단행해 김종필을 국무총리에 앉혔다. 정치계의 ‘풍운아’로 알려진 국무총리 김종필은 세간에서 별칭 ‘JP’로 불렸고 골프실력도 ‘A급’으로 통했다. 그도 5.16군사쿠데타 주동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전경련 주최로 안양cc에서 김종필의 국무총리 취임축하골프대회가 열려 신임각료와 공화당 당무위원 등이 초원에 모여 당-정, 정-경할 것없이 격의 없는 골프정치를 즐겼다. 이날 김종필 국무총리, 백남억 공화당의장, 김용완 경제인연합회장, 이병철 삼성회장이 한 조가 되어 18홀을 돌았다.(조선일보, 1971.6.22.)

 당시 박정희 정권하에서 국민에게 공약과 약속을 해놓고도 식언하기를 밥 먹듯이 하던 정치인들은 국민의 눈과 귀를 피하지도 않고 특권적인 골프정치에 열중했다. 유신독재의 먹구름이 덮쳐올 때쯤에 특권층의 골프정치는 자연스레 국회와 행정부의 ‘당정친선골프’로 발전되어 갔다. (계속)
 

태그:#골프정치, #3선개헌, #10월유신, #박정희, #한양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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