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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만호 이대원 장군과 정운 장군을 모신 사당인 쌍충사 모습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과 정운 장군을 모신 사당인 쌍충사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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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진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녹동 일대에 있다. 고흥반도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녹도진은 북서를 등지고 동남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흥반도 최남단 동두산 줄기가 동편을 에워싸 막아주고 앞쪽에는 소록도와 거금도가 가로놓여 천연 양항을 이룬다.

군사 지리상으로는 전라좌수영의 우익을 담당했던 수군의 요충지이다. 성은 158.7m의 비교적 낮은 야산의 남쪽 사면에서 해안선까지 이어지는 평산성으로 평면 형태는 반원형에 가깝다. 녹도진 성곽은 성종 16년(1485년)에 계획되어 성종 21년(1490년)에 완성되었다.
  
고지도에서 촬영한  <흥양현 녹도진지도> 모습
 고지도에서 촬영한 <흥양현 녹도진지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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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전라좌수영> 서적에서 발췌한 녹도진 사진으로 바로 앞에는 소록도가 있고 인근에는 거금도가 보인다. 왜란이 거의끝나갈 무렵 거금도(옛 지명 절이도) 앞 바다에서는 녹도만호 송여종이 지휘한 수군이 절이도 해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전라좌수영> 서적에서 발췌한 녹도진 사진으로 바로 앞에는 소록도가 있고 인근에는 거금도가 보인다. 왜란이 거의끝나갈 무렵 거금도(옛 지명 절이도) 앞 바다에서는 녹도만호 송여종이 지휘한 수군이 절이도 해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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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가 2020척, 동서 길이가 810척, 남북 너비가 404척이며 성안에 우물이 둘로, 이 진성으로부터 동쪽 흥양까지는 육로로 54리이고, 동쪽 발포까지는 수로로 2식 15리였다고 한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남문, 서문, 북문, 동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호남진지>에는 동문, 남문, 북문만 기록되어 있다.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과 정운 장군을 모신 사당, 쌍충사

녹도진은 현재 도시화가 많이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매립이 되어 예전 모습을 기억하는 주민도 찾기 어렵다. 현재 녹도진의 흔적은 북벽 일부 잔존석렬이 남아있는 것과 쌍충사 앞에 조성된 비석군이 전부다.

쌍충사 앞에 조성된 5기의 비석을 뒤로 하고 계단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면 쌍충사가 나온다. 쌍충사는 조선시대 녹도만호였던 이대원 장군과 정운 장군을 배향한 사당이다. 이대원은 녹도만호로 1587년 정해왜변 또는 손죽도 전투라 불리는 해전에서 왜적을 맞아 전과를 올렸으나 안타깝게 순절했다. <여지도서>에는 녹도만호 이대원이 손죽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왜적과 싸운 기록이 있다.
  
쌍충사 뒷편에는손죽도에서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이대원 장군과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정운 장군의 동상이 있다. 두 분 모두  녹도만호 출신이다.  손죽도는 현재 여수 관할이지만 당시에는 고흥 관할이었다.
 쌍충사 뒷편에는손죽도에서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이대원 장군과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정운 장군의 동상이 있다. 두 분 모두 녹도만호 출신이다. 손죽도는 현재 여수 관할이지만 당시에는 고흥 관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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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은 손죽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피를 흘리며 사흘 동안 싸웠지만 수사 심암은 도와주지 않았다. 군대가 싸움에 패배해 왜적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왜적이 항복을 강요해도 굴하지 않자, 배의 돛대에다 이대원을 묶고서 칼로 마구 찔렀는데 죽을 때까지 꾸짖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선조 때 병조참판을 추증했으며 사당을 세우도록 명령하였다."
 
임진왜란 7년 전쟁에서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동력은 수군의 해상전력과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이 분투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수군이란 사실상 전라도 수군이 대부분이었고 그 중에서도 5관 5포 출신 전라좌수영 수군이 주력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거의 전멸된 경상도 수군에 비해 이순신을 필두로한 전라좌수영 수군은 전투준비에 만전을 다하고 있었지만 임란 초기 수륙 각 지역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패퇴하고 있던 상황이라 경상도 해역에 출동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경상도 수군이 거의 전멸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 바닷길 사정에 어둡기때문에 선뜻 진군할 수가 없었다.

이때 녹도만호 정운은 "적세가 이미 서울까지 박두했으니 더 없이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만약 해전에서도 싸울 기회를 잃고 나면 뒷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군관 송희립도 "영남은 우리땅이 아니란 말인가? 적을 치는데 이 지역 저 지역 차이가 없으니 먼저 적의 선봉을 꺾어 놓게 되면 본도 또한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고 주장해 전라좌수영 수군이 영남해역으로 진군해 옥포해전부터 부산포해전까지 연전연승할 수 있었다. <여지도서>에 기록된 정운의 전공 내용이다.
 
녹도진 바로 아래 있는 비석군 모습
 녹도진 바로 아래 있는 비석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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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녹도만호 정운은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웠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싸우다가 부산에 이르러 왜적의 배가 바다를 뒤덮은 것을 보고 힘껏 용기를 내어 곧바로 왜적에게 돌진했다. 하루 종일 죽음을 무릅쓰고 피를 흘리며 싸움을 치러 왜적들의 배가 있는 노가 거의 부러지고 물에 빠지는 상황이 되었는데 느닷없이 총알을 맞아 숨을 거두었다."
 
충무공 이순신이 그의 공을 기리면서 위령제를 지내고 이대원과 한 자리에서 제사를 함께 모시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나라에서는 기특하게 여겨 허락하고 병조 참판을 추증하였다. 숙종 계해년(1683년)에는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요청하자 특별히 '쌍충사'라는 현판 이름을 내려주었다.

힘없는 나라의 설움 느끼게 한 절이도 해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무술년(1598년) 7월 24일 고흥 절이도(현재 거금도) 해역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는 녹도만호 송여종이 전선 8척을 동원해 적선 11척과 접전해 적선 6척을 모조리 포획하고 적의 머리 69급을 베어 용맹스럽게 귀환했다.
  
쌍충사에서 본 바다 모습으로 건너편에 소록도가 보인다
 쌍충사에서 본 바다 모습으로 건너편에 소록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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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절이도 해전이 중요한 전투임에도 잊힌 역사가 된 데에는 명나라 수군 때문이었다. 이 해전의 결과는 당일 고금도에 보고되었고 운주당에서 주연을 베풀고 있었던 통제사와 명나라 제독 진린에게도 보고되었다. 소식을 들은 진린은 명나라 수군이 활약하지 못한 것에 격분해 술잔을 내던졌다.

통제사 이순신은 명나라 장수 지린과 계금에게 각각 40급과 5급의 수급을 취하게 하여 이들을 달랬다. 힘없는 나라의 서러움이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녹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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