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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여러겹의 시간을 걷는 것
▲ 여행의 사고 여행이란 여러겹의 시간을 걷는 것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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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여행 정보나 여행지에서 느낀 감상이 궁금해서 이 책을 선택했다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윤여일 작가의 <여행의 사고>는 유명 관광지의 정보를 알려주는 관광 책자는 아니며, 여행지에서 느낀 소소한 감상과 사색이 담긴 여행 에세이라기에는 조금 더 무겁다. 

굳이 책의 주제를 분류해 본다면 '여행 철학서' 쯤이 되지 않을까? 관광과 여행이 같을 수 없음을 레비 스트로스를 통해 사유하였고, 데카르트를 통해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정의하였기에 이 책은 충분히 철학서가 되고도 남음이다.

'여행이란 무엇인가'와 '여행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여행지에서 나는 어떤 여행객이었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여행에 대해, 여행지에 대해,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과 광경, 사물에 대해 지극히 낭만적이고 소모적인 시선만으로 내가 욕망하는 곳에 가서 내가 욕망하는 것만을 보고 돌아오는, 순전히 자기충족적인 여행의 함정에 빠져있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여행이란 무엇이고 더불어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그(레비 스트로스)에게 진정한 여행이란 단순히 지리적 이동이 아니었다. 맥락의 전환을 의식하는 행위여야 했으며, 그렇지 않고서야 여행지는 자기 세계의 연장이 될뿐이다." (p.37)

작가에게 여행이란 '맥락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여행지는 그런 성찰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더불어 데카르트적 사고를 여행이라는 행위에 대입하고 사유한다.

"여행을 하면서... 그러므로 우리를 설득하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나 선례라는 것... 즉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것은 기존의 선입견과 학설이 내 준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의심했다." (p.39)

따라서 그에게 있어 여행은 '이국적인 체험'으로 소비되는 관광의 영역을 넘어 '인식론적 공간의 탐색'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자신의 앎과 감각이 의문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회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렇기에 작가가 '꺼리는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 현지 사회의 역사와 고유한 맥락을 무시하는 여행, 그래서 꼭 이곳이 아니라 저곳을 다녀왔어도 되는 여행, 이리저리 난폭하게 문명의 잣대를 들이대는 여행, 자신의 시간 위에서만 배회하는 여행, 그래서 결국 자신이 바뀌지 않는 여행." (.p45)

그리하여 그가 원하는 여행이란 "자신의 감각과 자기 사회의 논리를 되묻게 만드는 여행", "현지인의 목소리를 듣지만 그것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여행", "카메라를 사용하되 그 폭력성을 의식하는 여행", "마음의 장소에 다다르는 여행", "길을 잃는 여행", "친구가 생기는 여행", "세계를 평면이 아닌 깊이로 사고하는 여행"이며 이 여행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자기로의 여행"이다. 

반드시 깨달음과 자아의 성찰이 수반되어야만 여행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휴식과 휴양 역시 여행의 커다란 미덕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 또한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여행의 끝에서 "결국 자신이 바뀌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해보면, 그 시공간의 총체적 순간이 상품으로서만 소비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기에 여행의 본질은 자기로의 여행이며, 그를 통해 자신이 바뀌게 되는 경험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제안을 쉽게 뿌리치기 어렵다. 

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보다 사람의 생각이 변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내 생각을 1인치, 아니 1센티미터라도 확장시켜주는 책을 만나게 되면 마치 내가 기적의 주인공이 된 듯한 순수한 기쁨을 맛보게 되는데 이 책이 딱 그랬다. 

책의 도입부에서 저자는 여행의 사고에 대해 논했다면, 본문은 멕시코와 과테말라의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견문록이 주된 내용이다. 그가 여행한 곳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장소가 있다. 바로 멕시코의 오래된 식민도시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카사스'.

여러 이름을 거쳐 1943년 주민 청원으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라스카사스는 스페인 출신의 수도사로 선주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원래 이름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로 쿠바 농장 노예 소유주였으나 1502년 신대륙에 건너간 후로 자신의 재산을 수도원에 헌납하고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신부가 되었고 동시에 아메리카 인디오의 인권을 주장했던 개혁가이기도 했다.

서양철학사에서 한번쯤 들어봤을 볼테르, 베이컨, 몽테스키외, 흄 등 서구근대정신사의 대부들이 아메리카 선주민을 열등한 종족으로 폄하했지만 그보다 훨씬 선대인인 라스카사스는 목숨을 걸고 인디오 역시 억압과 강제노동에 저항할 권리가 있으며 기독교로 개종시키더라도 군사의 힘이 아닌 가르침과 설득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대의 관성을 거부하는 시대정신은 시대의 힘에 채이고 마모된다. 당대에 그가 여러 사람의 미움을 샀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후세에 그의 행동을 평가하는 잣대가 바뀐다는 사실까지를 포함한다." (p.86)

"종교의 제약, 지시의 제약, 제도의 제약, 또 정치 환경의 제약 등등. 그 여러 제약들을 품고 있었기에 한 개인의 시도는 뒷걸음질 쳤지만 역사의 무게를 지닐 수 있었다. 그 무게를 헤아리는 일은 손쉬운 가치판단보다 어렵지만 가치 있다. 후세 사람들이 시대의 한계 운운할 수 있는 것은 앞선자들이 시대의 한계 속에서 한계치를 조금씩 바꾸어놓았기 때문이지 않겠는가."(p.90)


저자는 이처럼 산 크리스토발 라스카사스라는 관광도시에서 그 도시가 가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바로 그 순간의 흐뭇한 감정, 그 감성의 찰나에서 멈추지 않는다. 도시 이름의 유래를 좇다 한 인물을 만나게 되고, 그 인물의 행위를 통해 시대정신에 휩쓸리지 않고 인간의 본질적인 인권에 대해 사유하고 주장함으로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정신을 발굴해낸다. 

여행을 떠나기 전 자신만의 여행 철학을 확고하게 수립했던 그는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여행한 이후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여행길에 공부의 의미를 입히리라. 낯선 장소를 텍스트로 삼아 나의 사고력과 감각 능력으로 그 낯선 맥락속으로 얼마나 진입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싶었다." (p.341)

그렇다. 작가는 공부를 결심했다. 세계의 낯선 곳을 텍스트(교과서)로 삼아 스스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세계를 어디까지 깊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시험할 생각이다. 그리하여 새롭고 낯선 세계에서 인식의 전환을 경험하고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을, 자기의 고국을, 세계의 문화를 한층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작가의 결론과 통찰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무의미할지 유의미할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여행의 사고를 활자화 했다는 것으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윤여일 작가는 이  책 이후로 인도와 네팔, 중국과 일본을 여행하였고 <여행의 사고> 2, 3권을 추가로 발간했다. 같은 아시아권 나라이면서도 다른 문화를 가진 각각의 나라에서 작가는 과연 어떤 사유를 건져냈을지 몹시 궁금하다. 

여행의 사고 하나 - 여러 겹의 시간 위를 걷다 - 멕시코 과테말라

윤여일 (지은이), 돌베개(2012)


태그:#윤여일, #여행의 사고, #레비 스트로스, #멕시코 문화,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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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음악, 여행을 좋아하고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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