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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7일 오전 경기도 구리시 구리역 광장에서 열린 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7일 오전 경기도 구리시 구리역 광장에서 열린 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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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공약 발표 기자회견 때 "양성평등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홍보 등으로 실망감을 안겨줬다"며 폐지 필요성을 역설한 그는, 지난 1월 7일에는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자를 남겼다.

지난 2월 27일 유세 때는 이와 관련된 가짜 뉴스도 언급했다. "우리 정부가 성인지 감수성 예산이란 걸 30조 썼다고 알려져 있다"며 "그 돈이면 그중 일부만 떼어내도 우리가 이북의 저런 말도 안 되는 핵 위협을 안전하게 중층적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근거 없이 잘못된 발언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여성가족부와 북한 핵문제를 접목시키는 발상도 문제였다.

그는 선거일이 임박하자 다소 몸을 움츠렸다. 이달 2일 페이스북에 "여성이 안전한 대한민국, 성범죄와의 전쟁 선포"라는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여성 문제의 테두리를 반영하는 글이다. 약간 움츠리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고수하고 있다.

선거 때면 돌아오는 '여성 관련 부서 폐지' 공약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지난 1월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고 적었다. 3월 2일, 대선을 7일 앞둔 시점에선 '여성이 안전한 대한민국, 성범죄 전쟁 선포'라고 적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지난 1월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고 적었다. 3월 2일, 대선을 7일 앞둔 시점에선 "여성이 안전한 대한민국, 성범죄 전쟁 선포"라고 적었다.
ⓒ 윤석열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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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이승만의 자유당이 여성 전담 부서의 폐지를 추진한 사례다. 자유당의 위세가 상대적으로 강해졌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이승만은 1950년 5.30 총선 때 자파 세력이 전체 210석 중 14석밖에 얻지 못하는 참패를 경험했다. 그랬던 그가 26일 뒤 발발한 한국전쟁을 계기로, 정권 지배력을 비약적으로 공고히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여소야대도 이만저만한 여소야대가 아니었으므로 국회 간선제로는 재집권을 기약할 수 없는 그였다. 그래서 그는 전쟁 중인 1952년에 이른바 발췌개헌을 통해, 휴전 이후인 1954년에 이른바 사사오입개헌을 통해 폭력적이고 위헌적인 방법으로 정치구조를 급격히 변경시켜 나갔다.

개헌에 필요한 국회 의결정족수가 재적 의원 3분의 2인 136명이고 사사오입 개헌에 대한 찬성표가 135표였는데도, 반올림을 해서 136명이 찬성한 것으로 간주한 사건이 사사오입 개헌이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국회 간선제를 국민 직선제로 바꾸고 대통령 3선 제한 규정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금지 예외' 규정으로 바꾸었다. 전쟁과 그 직후의 혼란이 아니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같은 사사오입 개헌 직후에 이승만이 자유당이 추진한 것이 여성가족부의 전신인 '부녀국'의 폐지였다.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공포된 날이 1954년 11월 29일이다. 그 뒤 곧바로 부녀국 폐지가 시도됐다. 12월 초부터 언론에서 부녀국 폐지 문제가 거론됐을 정도다. 이미 그 전부터 부녀국 폐지를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식 및 제3회 광복절 기념식(자료사진).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식 및 제3회 광복절 기념식(자료사진).
ⓒ 대통령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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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국은 미군정이 1946년 9월 14일 공포한 부인국 설치령에 기원을 뒀다. 보건후생부에 설치된 부인국이 대한민국정부 하에서 부녀국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이 부서는 노동·복지·보건·공직진출·참정권·여행안전·부랑부녀·성매매여성 등의 다양한 사무를 관장했다. 20세기 들어 한층 고조된 여성의 힘이 미군정기의 부녀국 설치를 추동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냉전 수구세력은 부녀국의 존재가 못마땅했다. 오늘날처럼 그때도 여성 혐오론을 조장하며 부녀국 폐지론을 퍼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가 사사오입 개헌에 편승한 부녀국 폐지 시도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혐오론을 퍼트린 것은 개인적으로 여성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정치적 필요가 이유였다. 2016년에 <역사문제 연구> 제35호에 실린 허윤 이화여대 초빙교수의 논문 '냉전 아시아적 질서와 1950년대 한국의 여성혐오'는 "한국전쟁과 정전협정, 급속하게 진행된 미국화와, 북한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반공주의 등 냉전체제가 만들어내는 질서는 사회를 통치하는 손쉬운 방법으로 여성혐오를 선택한다"고 설명한다.

냉전 유지 도구로 쓰인 '여성 혐오'

냉전을 유지·강화하는 도구로 북한 및 김일성 혐오뿐 아니라 여성 혐오도 활용됐다는 것이다. 여성혐오를 조장한 것은 '군복 입고 공산세력과 싸우는 남성상'을 띄우기 위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냉전에 동원되는 남성 군인의 이미지를 신성화시키고자 여성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것이다. 위 논문은 여성학 학자 정희진의 글을 인용하면서 "친미반공 군부독재세력이 주도하는 호전적 남성성이 전후(戰後) 한국사회를 지배"한 결과로 여성 혐오가 부추겼다고 설명한다.

그런 정치적 동기에서 여성혐오론을 확산시키고자 부녀국 폐지를 추진했지만, 자유당이 겉으로 표방한 명분은 당연히 사뭇 달랐다. 사사오입 개헌 5일 뒤인 1954년 12월 4일 <동아일보>는 자유당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보도하면서 개정 원칙 중 하나기 "중앙행정기관을 대폭 조정·간소화하여 상호간의 중복·마찰을 해소하고 행정사무의 신속·원활을" 기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원칙 하에 내놓은 방안이 부녀국과 원호국을 묶어 후생부 사회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상이군경 지원 등을 수행하는 원호국의 역할도 소중하지만, 원호국과 부녀국의 통합이 원호국에는 어느 정도나 도움이 되고 부녀국에는 어느 정도나 도움이 될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개정안이었다.

행정사무의 신속·원활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원호국과 부녀국의 통합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조정 방안이었다는 평가가 나올 만했다. 여성 관련 사무를 어떻게 유지해 가느냐를 고민하기보다는, '부녀국 폐지' 자체를 서두르다 보니 그런 방안이 나오게 됐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기에는 여성 문제가 특히 심각했다. 남성들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입었지만, 여성들은 더 많은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여성들이 입는 불이익은 한둘이 아니지만, 이 당시에는 남편을 잃은 여성들의 경제 문제가 특히 심각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었다.

휴전 1개월 뒤에 보도된 1953년 8월 26일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 기사는 "30만 명에서부터 50만 명까지로 추산된다는 전쟁미망인들의 구호 내지 선도 문제는 아직까지도 구호행정에 선행하는 통계조차 잡지 못한 형편"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여성 문제의 일부만을 다룬 이 기사에서도 나타나듯이 한국전쟁 직후에는 국가가 여성들과 함께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그런 시기에 자유당이 부녀국 폐지를 추진했던 것이다.

"어쩌려고 폐지하려느냐" "언어도단"... 격렬한 반대 부딪히다

일자리나 재산이 생기는 것만으로 개인의 경제력이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경제력을 높이고 그것을 유지하자면 정치적·사회적 지위의 상승과 법률제도의 개선도 함께 수반될 수밖에 없다.

전쟁으로 피폐된 여성의 지위를 개선하려면, 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회 전체의 혁신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자유당은 거기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엉뚱하게도 부녀국 폐지를 시도했다. 사사오입 개헌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자 그 힘을 거기에 사용했던 것이다. 사회 곳곳을 남성 중심의 냉전질서로 신속히 바꿔야 한다는 조급증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12월 27일자 <조선일보> 2면
 1954년 12월 27일자 <조선일보> 2면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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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2월 27일자 <조선일보> 2면 상단 기사에 따르면, 그런 어이없는 시도에 대해 대한부인회는 "(여성) 문제를 어떻게 하려고 부녀국을 폐지하려느냐?", "부녀국을 폐지함으로써 국가적으로 얻는 이득이 무엇이며 그 의도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비판했다. 또 "부녀국은 여성들을 위한 단 하나의 정부기관인데 그나마 폐지하면 여성들의 나갈 길을 심히 어둡게 하는 것"이라며 재고를 촉구했다.

국회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야당 의원은 물론이고 자유당 의원에게서도 나왔다. 1955년 1월 12일자 <경향신문> 톱기사에 따르면, 의원들은 '여성의 존엄성을 무시한 것이 아닌가?', '자유당이 지향한다는 신생활체제에 역행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퍼부었다. 1월 13일자 <조선일보> 1면 우중단 기사에 따르면, 반민특위 부위원장 출신인 김상돈 의원은 "부녀국을 폐지한 것과 같은 것은 언어도단이 아닌가"라며 어이없어했다.

1950년대 사람들도 지금만큼이나 여성 문제에 민감했다. 한민족을 억누르던 일본제국주의가 무너진 직후라 여성의 힘을 포함한 민중의 힘이 급격히 분출하던 때였다. 그런 힘에 맞서 자유당이 부녀국 폐지라는 엉뚱한 일을 시도했던 것이다. 아무리 냉전질서를 등에 업었다 해도 "여성들을 위한 단 하나의 정부기관"마저 없애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것이 무모했다는 점은 부녀국 폐지가 강력한 사회적 반발에 부딪혀 결국 좌절된 데서도 나타난다.

자유당은 냉전구도 강화라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부녀국 폐지를 추진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언어도단'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흑백논리로 세상을 갈라놓고 이를 통해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자유당은 여성과 남성까지도 갈라놓으려 했다. 하지만 "언어도단이 아닌가?"라는 발언에서 느낄 수 있듯이 당시 사람들은 자유당을 어이없게 바라봤다. 유치한 방법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을 그렇게 바라보는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을 것이다.

태그:#여성가족부 폐지 , #여성부, #부녀국, #냉전질서,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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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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