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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대통령 당선 보도. 왼쪽이 1972년 12월 23일 '매일경제', 오른쪽이 1978년 7월 6일 '동아일보'.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 보도. 왼쪽이 1972년 12월 23일 "매일경제", 오른쪽이 1978년 7월 6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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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1970년대는 유신귀신이 긴급조치라는 도깨비 방망이를 들고 정의와 이성을 압살하는 암흑기였다. 많은 사람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암살당하고, '전국민의 죄수화'와 '전국토의 감옥화'는 일제강점기의 재판이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미국 정계를 상대로 벌인 뇌물 매수공작은 국제사회에 국격을 먹칠하고도 남았다.

이같은 비극의 원인과 이유는 절대권력자의 치유 불가능한 권력중독 증세였다. 박정희는 1978년 7월 6일 제9대 대통령 선거를 맞아 이번에도 체육관선거에서 단독으로 출마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78명 중 2,577표, 무효 1표라는 또 한 차례 코미디 같은 선거를 치렀다. 득표율 99.9%라는 희대의 사기극은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고 국민을 허탈과 상실감에 빠뜨렸다.

당시 국제사회는 민주주의가 크게 신장되어가고 있었다. 닉슨 미국 대통령이 사법권 방해로 탄핵되고(1977년), 소련이 유엔총회에서 데탕트를 선언했으며(1977년), 인도 총선에서 수상 간디가 낙선, 야당 인민당이 집권하고(1977년), 영국에서는 첫 여성 수상 대처가 집권하고(1975년), 베긴 이스라엘 수상과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1978년)

박정희가 국제정세 변화의 물결에도 역행하며 1인 독재체제로 질주한 것은 언론계 풍각쟁이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앙일보>는 <제9대 대통령>이란 7일치 사설에서 "박대통령은 우리 민족이 역사상 미증유의 탈바꿈을 이룩한 시기에 이 나라를 이끌어왔다."라고 예찬하고, <조선일보>는 같은날 <제9대 대통령 선출>이란 사설에서 "그동안 우리는 엄청난 변화를 경험한 것이 사실이다. 세계질서의 재편성 과정에서 유독 한반도에만 그대로 도사리고 있는 냉전구조의 어려운 시련 속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적 비약을 도모한 유신체제의 치적을 우리는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고 치켜세웠다. 

<한국일보>는 7일 <박정희대통령 재당선>의 사설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61년 5월 군사혁명과 72년 10월 유신을 주도했으며(…)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지위가 단순한 행정부 수장에 그치지 않고 입법, 행정, 사법에 걸친 조정자적 기능을 갖춘 헌법상의 영도자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또 그간 집권과정의 눈부신 근대화작업의 실적은 '권력의 인격화'라는 징표를 생각케 한다."라고 예찬했다.

장기집권이나 1인 출마, 99.9%의 득표율 등 반민주적인 지적은 커녕 '유신체제의 치적'을 치켜세우고 '권력의 인격화'라는 나치 언론의 서사를 나열했다. 권력 중독자가 이같은 언론계 풍각쟁이들이 내뱉는 '민심'을 보면서 더욱 오만해질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유신체제의 죄과는 권력중독자 1인뿐만 아니라 이를 떠받치고 있던 법비와 풍각쟁이 언비들의 몫도 적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이 1978년 12월 27일 장충문화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 약 3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딸 박근혜와 함께 취임식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이 1978년 12월 27일 장충문화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 약 3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딸 박근혜와 함께 취임식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대통령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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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눈과 귀는 막고 민심은 속일 수 있었지만 국제사회를 막고 가릴 순 없었다. 내실이 빈약할수록 외화를 요란하게 꾸미는 경우가 적지 않다. 12월 27일 체육관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정부는 임시공휴일 지정, 고궁 공짜 개방, 야간통금 해제 등 선심조치를 취하고 각국에 축하사절단을 요청하여 과시하고자 했다.  

그런데 씁쓸하기 짝이 없는 취임식이었습니다. 미국ㆍ일본에 사절단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다 거부했어요. 대만에서조차 거부했어요. 장개석은 박정희와 사촌 간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독재정치를 하던 사람으로, 서로 도와야 할 형편인데, 그런 장개석 정부조차도 사절단을 일절 안 보냈어요. 박정희 정권과는 되도록 멀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이런 정권이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국제적으로 이렇게 버림받은 정권이. 다만 박 정권을 18년간 돌봐준 기시 전 일본 수상, 그 사람은 대륙 침략의 원흉으로서 패전 직후 도쿄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수감이 돼 있다가 살아난 사람 아닙니까? 그 기시가 쿠데타가 날 때부터 만주국 후배인 박정희를 공공연하게 돕겠다고 했지요. 이 일행만 왔어요. 그러고는 아무도 안 왔습니다. (주석 2)

사제단은 선거를 앞두고 4월 12일 발표한 〈신앙과 양심에 따른 4월선언〉에서 "1인 권력의 영구화와 절대화를 위한 요식행위로서의 이른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는 인정할 수 없다. 선거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양심과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해야할 당면 과제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고 선언한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득표율 99.9%의 대선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주석
2> 서중석,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195쪽, 역사비평사, 2008.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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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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