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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조리 노동자에서 시골 농가레스토랑 요리사로 있는 조철 씨. '요리는 농사'라는 그의 철학이 담긴 시골살이를 들어보았다.
 호텔 조리 노동자에서 시골 농가레스토랑 요리사로 있는 조철 씨. "요리는 농사"라는 그의 철학이 담긴 시골살이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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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 레스토랑. 빨간 지붕에 창문 아래쪽 알록달록 칠을 한 나무벽. 펼쳐 보고 싶은 요리책, 그림책 그리고 엘피(LP)판. 옛 농가 모습을 될수록 남겨 둔 흔적. 대여섯 개 테이블. 도자기 굽던 가마터. 널찍한 앞마당. 건물 바로 옆에 있는 텃밭. 
 
빨간 지붕을 한 농가 레스토랑 ‘모래재너머’. 주방과 손님 테이블이 있는 곳이다. ㄱ자 모양으로 오른쪽은 비슷한 빨간 지붕이 있다. 살림집이기도 하고 손님이 많으면 쓰기도 한다. 한때 도자기 공방과 전시장으로 쓰였다. 오른쪽 위로 가면 가마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빨간 지붕을 한 농가 레스토랑 ‘모래재너머’. 주방과 손님 테이블이 있는 곳이다. ㄱ자 모양으로 오른쪽은 비슷한 빨간 지붕이 있다. 살림집이기도 하고 손님이 많으면 쓰기도 한다. 한때 도자기 공방과 전시장으로 쓰였다. 오른쪽 위로 가면 가마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 나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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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 멋진 농가 레스토랑을 아내와 함께 운영하며 요리사로 있는 조철씨를 만났다. 진안군 부귀면 한 농가를 다듬어 꾸민 농가 레스토랑 '모래재너머'를 운영하는 요리사 조철씨는 특급 호텔 요리사였다. 게다가 호텔 노조위원장을 거쳐, 민주관광연맹 위원장 등 1990년대 노동운동 한복판에 서 있기도 했다. 지난 2월 초, 그를 만났다.

군대에서 요리를 배웠어요

"프랑스 요리를 주로 하셨는데, 프랑스에서 공부하셨나요?"

"아뇨. 용산에 있는 미국대사관 멤버십 클럽에 있었어요. 조리과를 다녔는데, 1학년 때 교수가 거기서 일해 볼 생각 없냐고 했죠. 좋잖아요, 학교 다니면서 돈도 벌고. 이름은 클럽이지만 바도 있고 구내식당도 있고 규모가 굉장히 컸죠. 거기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처음 프랑스 요리를 시작했어요."


그는 경희호텔경영전문대학 조리과를 나왔다. 2학년 때는 워커힐호텔에 취직하여 본격 요리사의 길을 걸었다. 어려서부터 요리에 관심이나 소질이 있었나 싶었다.

"어머니가 식당을 하셨으니까 가끔 도와드렸죠. 어머니 말씀으로는 초등학생 때, 바쁘면 가끔 내가 밥을 했대요.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소질이 있었나 봐요. 자연스럽게 익혔겠죠."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 삼천포를 떠나 부산을 거쳐 중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왔다. 전학 절차를 몰라 바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야간 중학교를 잠깐 다니다 말고 공장 생활, 볼링장 핀 보이(핀 세워 주는 일) 등을 전전했다. '이렇게 살아서는 인생에 전망이 없겠다' 싶어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붙은 뒤 방위 생활을 했다.

"훈련 끝나고 자대 배치를 하잖아요. 그때 특기 있는 사람들을 먼저 뽑아 가요. 다들 요리하는 사람들 대우가 좋다는 거예요. 1군단에 배치가 됐는데 요리할 줄 안다고 했더니 장교식당 요리병으로 보냈어요. 그래서 요리를 시작한 거죠."
 
계산대 한쪽에 놓인 명함. 명함도 좋지만 명함꽂이가 눈길을 끌었다.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계산대 한쪽에 놓인 명함. 명함도 좋지만 명함꽂이가 눈길을 끌었다.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 나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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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 식당이었으니 신경이 많이 쓰였다. 더구나 군부 정권이 권력을 잡던 때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늘 파티를 했다. 외부 출장을 비롯해 행사도 많았다. 눈치껏 재빠르게 일을 해내야 했다. 당연히 선임병들은 사회에서 직업으로 요리를 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군에서 배운 게 꽤 도움이 됐죠. 요리병들이 대부분 요리를 하던 사람들이잖아요. 고참들이래 봐야 몇 살 차이 안 나는데도, 내 눈에는 실력이 있었어요. 또 가르쳐 준 것도 있었겠지만, 일을 빨리빨리 쳐내야 했으니까. 시키면 눈치껏 해야 되잖아요. 그러면서 일을 빨리 많이 배웠죠."

승승장구하던 특급 호텔 프랑스 요리사

방위를 마치고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배운 게 요리였으니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일이었다. 돈벌이는 되었다. 한 달 남짓 하니까 제법 돈이 모였다. 포장마차 자리다툼도 치열했다. 먼저 자리 잡은 포장마차에 신고당해서 몇 차례 벌금을 물기도 했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일이었을 테다. 서울 충무로에서 신촌역(기차역)까지 포장마차를 끌고 자리를 찾기도 했다. 돈을 벌었지만 주머니에 남아 있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유흥으로 쓰고 말았다. 유흥가가 늘어서 있고 유혹도 많았다.
 
손님용 테이블에서 바라본 모래재너머 마당 쪽. 왼쪽이 살림집이다. 살림집 옆으로 텃밭이 있다.
 손님용 테이블에서 바라본 모래재너머 마당 쪽. 왼쪽이 살림집이다. 살림집 옆으로 텃밭이 있다.
ⓒ 나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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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하겠더라고요. 유혹이 너무 많은 거예요. 주머니에 늘 얼마라도 현금이 있으니까. 어느 날 술을 한잔 먹고, '야,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집기를 그냥 다 부숴 버렸어요. 포장마차를 접고, 고등학교 졸업이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검정고시는 인정을 안 해 줘요. 취직을 하기도 마땅치 않더라고요. 뭔가 졸업장을 요구해요. '아, 안 되겠다. 어쨌든 대학을 가야겠다' 마음먹었죠."

점수에 맞춰서 취직이 빨리 될 만한 경희호텔경영전문대학 조리과를 갔다. 88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어 곳곳에 호텔이 세워지던 때였다. 빨리 취직할 수 있어 보였다. 요리 실력을 인정받았는지 1학년 때부터 미국대사관 클럽의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1985년 2학년 때는 쉐라톤워커힐호텔 조리 부서로 가서 정식 요리사가 되었다. 하지만 북가좌동 집에서 너무 멀었다. 마침 3년 뒤, 집에서 가까운 스위스그랜드호텔이 문을 열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승진이 빨랐다. 헬퍼(helper), 서드(third), 세컨드(second), 퍼스트(first) 쿡까지 갔다.

어깨 너머로 눈치껏 배우기만 하지 않았다. 선배 요리사와 외국인 요리사들한테도 많이 배웠다. 그들이 가진 자료나 요리책을 얻어 복사하여, 글은 몰라도 이미지로 눈치껏 공부했다. 굵직한 행사도 거뜬히 치러냈다. 요리 실무에서 가장 높은 퍼스트 쿡 자리에서, 그는 입사 4년째에 스위스그랜드호텔 노동조합 위원장이 되었다.
 
40대 때 호텔 셰프 시절 조철 씨 모습.
 40대 때 호텔 셰프 시절 조철 씨 모습.
ⓒ 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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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이 세상 보는 눈을 바꿔 줬어요

첫 직장 노조는 어용노조였다.

"조합원인지도 몰랐어요. 유니언숍이었으니까요. 어느 날부터 월급에서 조합비를 떼요. 그래서 알았죠. 한번은 명절 수당인가를 30명쯤 되는 우리 동기들은 안 줘요. 대표 몇 명을 뽑아 노조를 찾아갔죠. '다 회사 방침이야' 이래요, 노조가."

노조가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있긴 했지만, 스위스그랜드호텔이 개업하면서 경력직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때가 1987년이었으니, 군부 정권에 맞선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큰 물결이 호텔노동자들에게도 흘러들었다. 자연스레 노조가 만들어졌다.

조철씨는 노조에 적극이지는 않았지만 조리 부서 대의원을 하였다. 노조는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사회 분위기는 비껴갈 수 없었다. 조철씨를 비롯해 몇 사람은 노동조합 공부를 하기도 하고, 일부는 개인적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노동자신문을 비롯해 외부 노동교육센터 등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였다.
 
모래재너머 주방.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모래재너머 주방.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 나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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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을 좀 제대로 민주적으로 만들어 보자 이런 분위기가 있었죠. 그래서 노조 민주화 이런 활동을 좀 하고, 노조에서 인정 않는 노보를 만들었어요. 저까지 셋이서. 만든 지 얼마 안 됐지만 노조 불신임 과정을 거치고 노조위원장 선거를 하는데, 조합원들이 저더러 하라고 등 떠밀어서 할 수 없이…."

요리 실력도 인정받았던 그가, 입사 4년째인 1991년에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연임을 하여 임기를 마친 1996년 이후에는 주방이 아닌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에서 활동하였다. 이랜드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일어난 투쟁 현장에 연대의 손길을 내밀고 20여 호텔 노조를 조직하여 '민주관광연맹'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던 당시, 호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내걸고 파업을 이끌어 성과를 내기도 했다.

2001년 그는 갑자기 노동운동을 접었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상처를 받은 탓이 컸다. 다시 호텔 주방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파업과 수배 등으로 집행유예를 받은 경력을 빌미로 회사는 조철씨를 해고했다. 40대 초반, 어린 자녀와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막막했다.

10여 년 노동운동을 하느라 아내에게 특히 미안했다. 먹고살아야만 했다. 명동, 강남 등의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30대 사장과 유학파가 넘쳐 나는 젊은 요리사들로 일자리 잡기도 쉽지 않았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다 보니 요리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뀌었다. 이익만을 내기 위해 값싼 수입 농산물을 쓰고 화려한 포장으로 가격을 부풀리는 현실이 편치 않았다.
 
손님 테이블 한쪽에 놓인 서가에는 갖가지 요리책이 많다. 또한 기후위기나 생태 등에 대한 그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인문서도 많이 꽂혀 있다.
 손님 테이블 한쪽에 놓인 서가에는 갖가지 요리책이 많다. 또한 기후위기나 생태 등에 대한 그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인문서도 많이 꽂혀 있다.
ⓒ 나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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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꿔 오던 귀농을 결심했다. 10여 년 노동운동이 그에게 남긴 건 무엇이었을까?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도 있었겠지만, 그의 삶에 변화를 주기도 했을 듯하다.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죠. 내가 뭐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살아왔어요. 어쨌든 사는 문제에만 매몰되어 있었죠. 그런데 이제 같은 사안을 보더라도 깊이 근원적으로 고민하게 돼요. 뭐 오히려 좀 복잡해졌을 수도 있겠죠. 가급적이면 잘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경제적인 의미가 아닌…."

슬로푸드 로컬푸드 농가 레스토랑

농사를 지었다. 그러면서 지역 학생들에게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식품회사 컨설팅 등을 하며 자리를 잡아 갔다. 농사는 만만치 않았다. 3년 짓던 농사를 접던 때, 백두대간 자락에 있는 육십령휴게소 입찰 공고 소식을 들었다. 낙찰받아 5년 계약으로 육십령휴게소에서 돈가스와 파스타를 만들어 팔았다.

면을 빼고는 지역에서 나온 제철 친환경 재료로만 음식을 만들었다. 슬로푸드와 로컬푸드를 지향한 데다 맛도 좋아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마침 언론에 소개되어 손님은 더 많아졌다. 수입이 늘었지만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계약한 5년이 다가올 무렵 진안군 부귀면 조그만 농가를 구입해 손을 보아 농가 레스토랑 '모래재너머'를 열었다. 텃밭 농사를 지으며 슬로푸드를 지향하는 레스토랑인 셈이다.
 
유치원 아이들과 요리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조철 씨.
 유치원 아이들과 요리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조철 씨.
ⓒ 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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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로 많이 알려졌지만 이제 돈가스는 만들지 않는다. 고기를 두드리다 보니 나이가 들면서 어깨가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절반은 맞지만 사실 다른 까닭이 있었다.

"그동안 매년 메뉴를 바꿨는데, 건강 문제도 있긴 했죠. 근데 어깨가 아프다고 한 건 핑계 중에 하나였어요. 그러니까 유전자 조작 콩을 사용한 대표적인 식품 가운데 하나가 식용유예요. 그래서 튀김 요리를 안 해야겠다는 생각이 컸죠. 근데 이걸 손님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렵잖아요."

지역의 친환경 재료를 구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올해는 지역에서 자연농 하는 분들과 협업을 고민하고 있다. 그분들 농산물로 만든 요리를 다른 사람들한테 소개하는 '맛 콘서트'를 두 달마다 열 계획이다. 나아가 자연농 하는 분들의 작물이 다양하지 않기에 좋은 농사를 짓는 분들의 농산물을 염두에 두고 메뉴를 바꿔 볼 계획을 마련하고 있기도 하다.
  
진안 마령고등학교 학생들과 요리 수업을 하고 있다. 지역 식품회사 등에 요리 컨설팅을 하기도 하지만, 틈틈이 요리를 통한 교육 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해 왔다. 교사를 꿈꾸기도 했던 그에게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을까 싶다.
 진안 마령고등학교 학생들과 요리 수업을 하고 있다. 지역 식품회사 등에 요리 컨설팅을 하기도 하지만, 틈틈이 요리를 통한 교육 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해 왔다. 교사를 꿈꾸기도 했던 그에게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을까 싶다.
ⓒ 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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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위해 우리를 위해(for earth for us)

진안 시골살이가 벌써 12년이 되었다. 슬로푸드를 만들고 팔면서 자연스레 느린 삶을 사는 듯하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지금은 지구를 위한 삶이 곧 우리를 위한 삶인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메뉴에 대한 고민은 그에게 있어서 삶의 변화로도 이어진 듯하다. 음식 재료를 택배로 받는 경우가 많은데, 포장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자꾸 쌓이는 것도 골칫거리다. 그러니 더욱 지역 농산물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올해부터는 쓰레기나 지구온난화 주범이라고 하는 이산화탄소를 줄이려고 해요.  특히 음식 하는 사람은 당사자잖아요. 어디서 보니까 육류 소비만 줄여도 지금의 상황을 절반 이상 줄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공부를 더 해야겠고, 실제 변화를 주려고 해요. 아내도 동의했는데, 채소 요리로만 하는 레스토랑으로 바꿔 볼까 고민을 하고 있어요."
 
살림집 방에 놓인 책. 요즘 보는 책인 듯하다. 호텔에서 자료나 외국 요리책으로 공부하듯 여전히 공부하는 요리사임을 짐작케 한다. 맨 위 책은 슬로푸드와 로컬푸드를 지향하는 채식 메뉴를 고민 중인 그의 흔적이 아닐까. 《이사의 채식 백과》는 지금 절판되었다. 나도 관심이 있어서 헌책방을 뒤져 어렵게 구입했다.
 살림집 방에 놓인 책. 요즘 보는 책인 듯하다. 호텔에서 자료나 외국 요리책으로 공부하듯 여전히 공부하는 요리사임을 짐작케 한다. 맨 위 책은 슬로푸드와 로컬푸드를 지향하는 채식 메뉴를 고민 중인 그의 흔적이 아닐까. 《이사의 채식 백과》는 지금 절판되었다. 나도 관심이 있어서 헌책방을 뒤져 어렵게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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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메뉴를 한꺼번에 채식으로 바꾸기는 힘들 테다. 손님들과 관계도 있고, 지속적인 운영도 고민을 해야 한다. 조금씩 변화를 주면서 손님들도 변화의 흐름에 함께하고, 이 과정에서 생산자인 농민들과 힘을 보태고 지혜를 모을 수 있을 거라 본다.
결국 요리에 대한 철학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요리를 수십 년 해 온 조철씨에게 요리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우선 요리는 추억, 기억이잖아요. 옛날에 먹었던 것을 나도 모르게 구현해 낸대요. 배운 적도 없고 곁눈질로 봤을 뿐인데도요. 저는, 농산물의 최종 완성품이 요리다 생각해요. 농사짓는 궁극 목적은 먹기 위한 거잖아요. 그래서 '요리는 농사야, 좋은 농사가 요리야'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요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건강한 먹을거리 운동은 정치, 농업, 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조철씨는 요리사들이 지역 친환경 식재료를 쓰고, 지역 생산자나 중간 생산자와 연대를 한다면 유통 체계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꿈의 실체를 보여 주기 위해 그는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다.
 
인터뷰하다 잠깐 쉬는 사이에 조철 씨가 차를 더 따라주고 있다. 끝나고 돌아갈 때는 졸릴까 봐 커피까지 손수 내려주었다. 마음씀씀이가 고맙다.
 인터뷰하다 잠깐 쉬는 사이에 조철 씨가 차를 더 따라주고 있다. 끝나고 돌아갈 때는 졸릴까 봐 커피까지 손수 내려주었다. 마음씀씀이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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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전히 운동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요리사의 꿈을 그리고 있다. 건강한 먹을거리를 위해 생산자인 농부와 소비자 사이에서, 마른 몸이지만 강단 있게 그러나 부드럽게 동네를 바꾸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농가 레스토랑 모래재너머가 기후 재난 시대에 걸맞은 메뉴를 만들어 내고 많은 이들이 모여 다른 길을 모색하는 사랑방 구실을 하리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작은책(www.sbook.co.kr)에도 실립니다.


태그:#모래재너머, #농가레스토랑, #기후위기, #요리사, #제로웨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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