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위기가 발생하기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은 2014년 유로마이단 시위(2013년 유럽 연합의 통합을 지지하는 대중의 요구로 시작된 대규모 시위)와 연관되어 있다.

2013년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EU와 자유무역협정을 거부하고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선택했다. 이로 인해 키예프의 독립광장을 점거하는 집회가 시작되었고 우크라이나의 서부로 확산되었다. 친러시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는 유로마이단 시위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사태는 결국 한쪽에서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친분리주의 단체와 다른 한쪽에서는 우크라이나 정부 간의 군사적 충돌로 확대되었다.

이 오랜 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고, 돈바스 광산의 동부를 친러시아 세력이 장악했다. 2021년 러시아는 침략하지 않겠다고 주장했지만 우크라이나 국경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면서 잠재적인 침략의 두려움이 재점화되었다. 러시아는 자신의 행동이 북대서양조약기구인 나토(NATO)가 우크라이나까지 진출해 러시아 국경과 맞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밝혔다.

국제전략센터는 우크라이나의 위기에 대해 살펴보고자 베를린 자유 대학교 동유럽 연구소 연구원이자 유라시아 연구와 안보에 대한 새로운 접근 프로그램인 포나스(PONSARS) 유라시아 멤버인 볼로도미르 이쉬첸코를 인터뷰했다. 이쉬첸코는 우크라이나 혁명 및 시위운동에 대한 연구로 자코뱅지, 알자지라, 트루스아웃 등과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내며 우크라이나 정치에 대한 좌파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래는 국제전략센터 2월 진보포럼에서 이쉬첸코를 사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인터뷰는 지난 13일에 이뤄졌다.
 
지난 2월 13일 국제전략센터는 베를린 자유 대학교 동유럽 연구소의 볼로도미르 이쉬첸코 연구원을 인터뷰했다.
▲ 볼로도미르 이쉬첸코 인터뷰 지난 2월 13일 국제전략센터는 베를린 자유 대학교 동유럽 연구소의 볼로도미르 이쉬첸코 연구원을 인터뷰했다.
ⓒ 국제전략센터

관련사진보기

     요즘 소련 시기의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소련의 압제 아래 고통받았던 식민지 담론이 주로 이야기되고 있다. 1932-33년 수백만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기근으로 사망한 홀로도모르를 다시 소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소련 시기 가장 산업화된 소비에트 공화국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나 심지어 2002년까지도 공산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회자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남은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였는지를 논쟁할 수 있지만, 학자들 사이에서조차도 우크라이나를 소련의 식민지로 보는 입장은 소수라고 생각한다. 모든 공포와 홀로도모르로 알려진 대기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는 현대화라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소련은 80%가 농민이자 문맹인 국가를 선진국에서 가장 산업화된 국가로 변화시켰다. 예를 들어, 유럽 최초의 컴퓨터는 키예프에서 개발되었다. 소련이 붕괴되었을 때 우크라이나의 산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우크라이나의 상당 부분이 도난당하고, 파괴되었으며, 구소련의 무역 관계가 끊긴 후 대체 시장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면을 보면 소련은 우크라이나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절을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의지를 꺾기 위해 스탈린이나 공산당 엘리트가 의도적으로 고안한 민족 학살이다. 그러나 이는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역사가 사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홀로도모르가 발생한 같은 해에 소련의 다른 지역 농민들도 죽어가고 있었다. 또한 스탈린이 수백만의 우크라이나 국민을 죽이려고 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할 수 있지만, 잔인한 정권의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또한 1929년 자본주의 위기로 소련 수출품의 가격이 떨어졌기 때문에, 소련의 1차 5개년 계획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농민 경제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해야 했다는 연결성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확실히 식민지 억압에 대한 담론은 복잡하고 논쟁적이며 우크라이나 학자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갈린다."

199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의회에서 어느 정당보다 많은 121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2012년 공산당 의석은 32석으로 줄었다. 소련 붕괴 직후 공산당이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우크라이나의 공산주의 과거의 유산이 많은 대중 매체에서 얼마나 잘못 그려지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공산당은 최근 선거에서 많은 좌석을 잃었는데, 수십 년 동안 공산당의 영향력이 감소한 이유는 무엇인가?

"2002년까지 공산당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크라이나 의회에는 좌파 세력도 다수였기 때문에 사회주의자인 올렉산드르 모로즈가 수년 동안 의장을 할 수 있었다. 모로즈는 당시 대통령인 레오니드 쿠치마를 가장 노골적으로 비판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해방되는 순간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선택했을 것이라는 반공주의자들의 주장을 반증한다. 실제로 자유주의나 민족주의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계속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투표했다. 다시 말해, 소련의 붕괴가 어떠한 진보적인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에 다수가 다시 공산당을 지지했다. 

그렇다면 왜 2002년 이후 좌파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에서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 이념정치가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좌우파의 이념정치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온정주의적 관계에 기반을 둔 과두정당들에게 압도당했다. 그래서 공산당에 투표했던 사람들은 가장 영향력 있는 과두 집권층으로 구성된 지역당에 투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산업화된 지역인 남부와 동부 지역의 많은 불만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우크라이나 서부에서도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시기의 중요한 집단인 민족민주운동당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지식인들을 결속시켰을 때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당은 사실 공산당 다음으로 큰 지지를 받았지만, 분열되면서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서구화를 시도하던 다른 과두지배층보다도 지지율이 떨어졌다. 

유로마이단이 시작되었을 때, 실질적인 이념 정당은 극우 정당이었던 자유당뿐이었다. 자유당은 '사회국가주의 정당'으로 불렸는데, 알다시피 이는 '국가사회주의'(독일에서는 흔히 나치로 알려짐)를 바꾼 것 뿐이다. 그들은 나중에 자유당으로 정당명을 바꿨다. 우크라이나 파시스트의 부상을 두려워하는 동부 유권자를 동원하고자했던 지역당이 실제로 자유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유로마이단 이후에도 극우세력은 강력한 선거세력이 아니었고, 의회 의석도 한 석에 그쳤다. 그들은 거리에서 더 강해졌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선거에서는 다른 과두지배층이 통제하는 언론과 그들의 돈을 유통하는 곳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이념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 이념을 가진 유일한 정당이 극우 정당밖에 없는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이념이 상실된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념의 위기는 전세계적 현상이다. 세계를 휩쓴 포퓰리즘 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은 무정형의 주장을 하고, 실제로 구조가 없으며, 60년대 헌신적인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파시스트, 또는 진보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정치적 프로그램이나 이념도 없다. 소련의 붕괴로 사회 자체가 파괴된 것이다.

공동의 이익을 위한 싸움은 사라졌고, 기업의 이해관계에서 특정 경쟁자를 둘러싼 싸움의 수사만 이용할 뿐이다. 대다수가 가난으로 밀려나는 동안 소수의 개인이 국부의 대부분을 몇 달 만에 사유화해 대부호가 되었다. 그래서, 이념은 단지 사람들을 속이는 방편으로만 여겨졌다. 공산당에 투표하던 사람들은 국가도, 계급도 없는 사회라는 꿈을 건설하는 데 헌신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삶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지키기 위해 공산당 투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1990년대 공산당의 높은 지지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대 과두지배층이 권력을 통합했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우크라이나의 진보와 발전을 이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최소한 안정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지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러시아의 푸틴, 벨라루스의 루카셴코에게 투표하기 시작한 것과 같은 이유다.

즉, 소련 이후 사회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지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진보적인 돌파구가 없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몇 달 동안 연금이나 임금을 받지 못했던 때를 기억한다. 매우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그저 삶에서 약간의 안정감이 생긴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 다수가 유로마이단을 자유당과 같은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했다고 설명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극우 정당들은 의회에서 의석이 많지는 않다. 이전에 자코뱅지와 했던 인터뷰를 보면, 우크라이나의 극우 정치는 서유럽의 현대 민족주의 운동이라기보다는 1930년대 파시스트적 거리 조직과 닮았다고 했다. 극우세력의 영향력이 과대평가된 것인가, 아니면 선거로 극우 세력의 영향력을 측정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은 것인가?

"좋은 질문이다. 유로마이단 이후의 정치에서 급진적 민족주의의 공포는 소위 자유 시민 사회나 우크라이나의 우방인 서구가 했던 유로마이단의 화이트워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유주의적인 담론과는 반대로 극우, 특히 자유당은 유로마이단 시위를 지속시키고 상황을 폭력적인 봉기로 확대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자유당에 이념적인 무장세력이 가장 많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 중도정당 대부분이 과두지배층의 선거 수단일 뿐이고, 자유주의 성향의 NGO들은 대부분 서방 대사관과 연결되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지, 상당한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로마이단 이후의 민족주의 운동인, 공산당 금지 운동, 우크라이나화를 위해 공산주의 범죄와 나치 협력자 미화 운동에 대한 독일의 뉘렘부르크식 재판 설치를 살펴보면, 모두 명목상 극우 정치인들이 벌인 일이다. 그들은 이 의제가 실제로 우크라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관심사가 아니었음에도 이러한 의제를 끌어들여야 했다.

여론조사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은 역사와 언어에 대한 질문은 매우 낮게 평가했다. 예를 들어, 우선순위를 정할 때 동상 철거 여부보다는 임금에 더 신경을 쓴다. 그러나 같은 과두지배층은 계속 부유해지는 상황에서, 민족주의 정책들은 실제로 변화는 일어나지 않지만 변화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포브스지에 실리는 유로마이단 이전과 이후의 부유한 우크라이나인 명단을 보면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10위 안팎에서 상위 5위까지 올라간 포로셴코의 경우인데, 공직을 사적으로 이용해 이익을 취한 완벽한 사례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극우파가 강력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고, '매번 20-30% 지지율을 받는 르펜과 비교해 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는 극우정치에 대한 매우 좁은 견해이다. 서유럽의 극우세력은 준군사조직을 소유하지 않는다.

유로마이단 이후, 급진적 민족주의 정치는 전쟁 상황을 이용했기 때문에 더욱 강해졌고 무장 부대와 정당 인프라를 구축했다. 가장 악명 높은 예로는 국가방위군의 신나치 조직원들로 결성되어 정당으로까지 확장된 아조프 대대가 있다. 우크라이나의 극우파는 선거에서는 영향력이 없지만 거리에서는 영향력이 있다. 때문에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하며, 적어도 러시아의 선전선동이 아니냐는 화이트워싱을 멈춰야 한다." 
 
한 우크라이나 군인이 지난 15일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지역의 합동전력작전 훈련 중 NLAW 대전차 무기를 휴대하고 있다.
 한 우크라이나 군인이 지난 15일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지역의 합동전력작전 훈련 중 NLAW 대전차 무기를 휴대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있는가? 이 어려운 상황에서 희망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은 우크라이나에 희망을 요구할 때가 아니다. 갈등 상황에서 진보적인 세력을 지지하고 국제좌파가 연대할 수 있는 사회운동과 연대를 논할 수 있는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일 러시아가 침공할 것이라는 뉴스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당장 다음주에 무언가를 계획하는 것도 어렵다. 우크라이나 중립과 민스크 협정(2014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루간스크 인민 공화국 사이에 서명한 돈바스 전쟁의 정전 협정)의 진전이 이 위기의 해법이 될 수 있지만, 이를 할 시간이 있는지, 그것이 가능할지조차 말하기 어렵다.

현재 우크라이나 국민 대부분은 평범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특히 이 상황이 혼란스럽게 보일 것이며, 친우크라이나 행진을 보면 얼마나 작은 규모인지 놀랄 것이다. 인구가 200-300만 도시인 키예프에서 조직된 시위에, 많아야 몇천 명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일상과 이러한 논의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의 절반정도가 러시아의 침공을 믿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희망도 찾기가 매우 어렵다. 누군가 나에게 '우크라이나에서 누구를 지지하는지' 묻는다면, 지금은 아무도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제전략센터 웹사이트(www.goisc.org)에 한글과 영문으로 게시했습니다.


태그:#우크라이나, #러시아, #나토, #전쟁, #국제전략센터
댓글1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활동하는 전 세계 사람들이 언어, 지리,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소통과 연대하는 것을 추구하고 이를 지원하는 단체입니다. 주요 활동으로 연대에 기반한 다양한 국내외 대안 사례 연구, 현장 연수, 특정 주제에 대한 자료 번역 및 뉴스레터 제작, 학습 모임 등이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