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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더해질수록 감정은 과잉된다. 2018년 여름, 홍성수가 쓴 <말이 칼이 될 때>를 읽었다. 책의 맨 첫 장에 "나의 말이 칼이 돼서 누군가에게 꽂히지 않길"이라고 적어 뒀다. 끄적거린 다짐이 무색하게도 지난 한 해는 말이 칼이 된 기억들이 제법 많았다.

다른 사람의 말이 칼이 되어 내 가슴에 꽂히기도 했고, 내가 뱉은 말 역시 칼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꽂히기도 했다. 고작 세치 혀로 꼬일 대로 꼬인 인간관계를 풀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말을 통해 진심이 전해질 수 있을 거라 믿었으며, 비밀은 지켜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말이란 게 참 묘한 게, 꼬인 관계를 풀기 위해 했던 말은 되려 관계를 끊어버렸고, 진심은 왜곡되었으며, 전해져선 안 되는 말들은 과장된 채로 오해를 더욱 키웠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같이 대화하며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내가, 말을 하는 일도 말을 듣는 일도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말이 가진 힘, 말이 가진 무서움이 마음에 사무쳤다.

일본의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차별 감정의 철학>(2019, 김희은 역)에서 "불쾌는 수동적 감정인 데 반해, 혐오는 능동적 감정이며, 내가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말은 내가 누군가에게 '싫어할 만한 대상'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불쾌한 마음을 위로하고자 말을 하면 할수록 처음에는 단순히 불쾌하다는 수준에 머물렀던 감정이 타인에 대한 혐오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뉴스를 통해, 한 배구선수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찰은 타살 혐의점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언론들은 일제히 고인이 생전에 SNS에 남긴, '자신에 대한 악플을 멈춰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고인이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한 이유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던져대던 사람들의 말이 고인을 얼마나 괴롭혀왔을까.

말을 하는 일은 쉽다. 큰 아이는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식사할 때가 지나도록 아이에게 밥을 주지 않아도 밥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간식을 즐겨 먹는 편도 아니다. 대개 그 또래 아이들이 그러하듯, 아이는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부모가 도와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밥을 먹는 일 빼고는...

얼마 전 아이에게 제안을 했다.

"네가 먹을 수 있는 만큼, 먹고 싶은 만큼 밥솥에서 밥을 퍼. 대신 네가 푼 밥은 꼭 다 먹어야 돼."

내가 쉽게 뱉은 말이 불러온 결과는 매우 컸다. 처음 며칠 아이는 밥을 정말 잘 먹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스스로 먹을 수 있고, 먹고 싶은 만큼 밥을 푼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며칠 전부터 아이는 밥을 정말 조금씩 푸기 시작했다. 아이를 그대로 둬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딸, 너무 조금 푸는 거 아니야. 그것보단 더 먹어야지"
"아빠, 아빠가 먹을 만큼만 푸고, 그것만 먹어도 된다며. 약속을 지켜야지!"


말을 하는 일은 쉬웠는데, 그 말을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가볍게 던진 말이 결코 가벼운 무게로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한 대선후보는 지난 12월 8일 '장애인'의 반대개념으로 '정상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지적을 당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애인'을 '장애우'라고 표현하여 다시 한번 지적을 받았다.

장애가 없는 사람을 정상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마치 장애인이 '비정상'인 것처럼 읽힐 수 있는 옳지 못한 표현이며, '장애우'는 실제 친구가 아닌 장애인을 '친구'라고 부르는 것 역시 옳지 않기 때문에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다.

말에는 말을 하는 사람의 생각이 담겨 있다. 미국의 철학자 랄프 에머슨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말에 의해 평가를 받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 한 마디가 남 앞에 자기의 초상을 그려놓는다"라고 했다.

아이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쉽게 한 아빠, 가볍게 뱉은 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려준 유치원생 딸, 잘못된 표현을 사용해 지적을 받은 뒤 같은 실수를 저지른 유력 대선후보. 말을 제대로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말이 넘치는 요즘이다. 넘치는 말 중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는 말, 갈등을 줄이는 말, 관계를 회복하는 말, 위로를 주는 말, 지킬 수 있는 말이 어떤 말일지 여느 때보다 더욱 신중히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은 힘이 크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립니다. 이 글은 쓰신 정한별님은 사회복지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태그:#말, #감정, #관계, #갈등, #말의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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