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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안마당이던 청산도 읍리의 고인돌이 증거 하듯이 청산도의 사람살이는 선사시대부터 고려 때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공도정책으로 버려진 이 나라 대부분의 섬들처럼 청산도에서도 한동안 사람이 살수 없었다. 이 섬에 사람살이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다. 선조 41년(1608년) 경부터 주민 거주가 허락됐다. 숙종 7년(1681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설치돼 왜구와 해적들의 침략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가 됐다. 주민 거주가 금지된 섬들은 임진왜란 전부터 왜구나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왜선 수척이 달량·청산도에 이르러 상선을 약탈하고, 무명 50필, 미곡 30여 석을 빼앗아 갔으며, 세 사람을 죽이고 일곱 사람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성종 14년(1483년) 기사

중종 27년 실록기사는 왜구들이 청산도나 달량도(소안도), 추자도, 보길도, 노화도 등까지 드나들며 수산물을 채취해 갔다고 전한다. 전란 전부터 섬들은 이미 왜구의 수중에서 농락당했으니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섬들은 왜구보다는 양반 관료와 아전들의 수탈에 시달렸다. 

청산도라고 다르지 않았다.

장한철의 <표해록>에는 영조 시대의 청산도 모습이 생생하다. <표해록>은 제주도 유생 장한철이 향시에 합격한 뒤 과거를 보기 위해 육지로 향하던 중 표류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청산도에 표류한 장한철은 박중무란 사람 집에 머문다.  

장한철은 청산도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소를 빼앗기고도 보복이 두려워 감히 송사를 벌일 생각을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양반들의 수탈을 피해 섬으로 왔으나 수탈이 섬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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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들길의 마을들, 청계리와 원동리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논들이 남아 있다. 구들장 논. 옛날에는 섬이나 뭍이나 귀한 것이 쌀이고 논이었다. 삿갓 놓을 땅만 있어도 논을 만든 것이 산간 지방의 '삿갓배미'고 비탈진 언덕에도 층층이 논을 만든 것이 남해 등지의 다랭이 논이다.

청산도 또한 비탈진 땅이 많아 논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긴 것이 저 구들장 논이다.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들고 논바닥에 구들돌같이 넓적한 돌을 깔고 개흙 칠을 해서 방수처리를 한 뒤 흙을 덮어 물을 가두고 논을 만들었다. 그토록 척박한 섬이었으니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는 속담도 생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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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는 돌과 바람의 나라다. 

상서리와 동촌리는 청산도에서도 돌담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는 마을들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새마을 운동이란 명목으로 수많은 돌담들이 헐렸다. 오래된 전통은 싸구려 근대화의 이름으로 철저히 짓밟혔다. 새마을 운동 때 돌담을 헐어내고 세웠던 시멘트 블록 담은 불과 40년 세월을 못 버티고 시커멓게 썩어간다.

고흥 득량만의 섬들에서 나그네는 썩어 허물어져가는 시멘트 담들을 목격한 바 있다. 하지만 청산도의 돌담들은 수 백 년 세월에도 여전히 견고하다. 돌담은 바람의 방어벽이 아니다. 아무리 견고한 돌담도 오랜 세월 큰 바람을 막아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바람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지 않았다. 바람을 분산 통과 시켜주기 위해 돌담을 쌓았다. 돌들 사이에 틈을 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람과 섬사람들 사이에 생긴 평화 협정의 산물. 청산도 돌담은 바람의 통로다.

초분, 바람의 장례

구장리 마을 앞산, 어느 집안의 선산일까. 초분 한 기가 땅 위에 떠 있다. 풍장, 초분은 마치 풀로 지붕을 덮은 배 같다. 이승을 떠났지만 초분의 주인은 땅속에 묻히지 못하고 땅 위에 모셔져 있다. 초분은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망자의 관을 덮었다. 볏짚은 삭을 대로 삭았다.

초분 주인의 후손들은 이엉을 푸른 그물로 씌우고 나일론 줄로 다시 묶었다. 임시 주거지에서의 거주기간이 끝나면 초분의 주인도 청산도 땅 한 모퉁이에 아주 터를 잡게 될 것이다. 청산도에서는 설 명절을 전후해 초상이 나면 어김없이 초분을 쓴다. 몇몇 사람만 참가해서 임시 장례를 하는 것이다. 정식 장례는 매장 때 다시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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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은 초분을 쓰고 3년이 지나야만 가능하다. 풍수에게 길일을 받아서 매장을 하지만 그해 길일이 없다고 판명나면 또 3년을 기다린다. 그래서 과거 어떤 초분의 주인은 십 몇 년씩이나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초분은 풍장이다. 풍장은 살이 풍화되고 남은 뼈만 추려내 매장을 하는 2중 장례 풍습이다.

지금은 청산도를 제외하고는 섬 지방에서도 더 이상 초분을 보기 어렵게 됐지만 근래까지도 서남해의 섬에서는 초분이 흔했다. 뭍에서는 옛날에 사라진 이중 장제가 섬 지방에서 유달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은 섬이란 폐쇄적 공간의 신앙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승과 저승 사이 강을 건너 죽은 자들이 저승으로 간다고 믿는다. 아프리카 요루바 족의 원로들은 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너기 위해 카누에 매장되기도 한다. 

섬사람들에게 바다란 현세 삶의 공간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어제는 섬을 집어 삼킬 듯 풍랑 거세던 바다가 오늘은 또 간데없이 평화롭다. 

바다란 늘 삶을 이어주는 생명의 바다인 동시에 삶을 끊어버리는 죽음의 바다이기도 하다. 삶을 건너는 일만이 아니라 죽음을 건너는 데도 배가 필요 하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생사의 바다. 섬사람들은 그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연락선으로 초분을 만들어 이용했던 것은 혹시 아닐까.

강제윤 시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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