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휴가를 즐기는 '에르큘 포와로(케네스 브래너)'. 그런 그의 앞에 친구 '부크(톰 베이트먼)'가 나타나고, 포와로는 부크 덕분에 행복한 신혼부부인 '리넷 도일(갤 가돗)'과 '사이먼 도일(아미 해머)'의 결혼식 피로연에 초대받는다. 그러나 화려하기 그지없던 피로연은 도일 부부와 치정으로 얽힌 '재클린(엠마 맥키)'의 등장으로 인해 엉망이 되어 버린다.

이에 리넷은 하객들을 모두 나일 강의 초호화 여객선인 카르낙 호에 태워 아부심벨 신전으로 여행을 떠나며 재클린을 피하려 하지만, 결국 그 배 안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위태롭고 불길한 분위기의 선상에서 탐정 포와로가 탑승객들 모두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가운데, 연이어 발생한 살인 사건은 냉철한 탐정인 그의 영혼까지 뒤흔든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추리 소설을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작가로, 수많은 클리셰를 만들고 보급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탐정이 사건과 관련 있는 인물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후에 모든 진상을 설명하는 결말을 처음 활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애거사 크리스티 특유의 클리셰와 스타일은 그녀의 추리 소설이 어떤 쾌감을 의도하는지를 말해준다.

추리소설의 또 다른 대명사인 셜록 홈즈 시리즈가 사건이 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추적한다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은 왜, 누가 이 사건을 벌였는지를 추적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작중 등장인물들의 개인사와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심리적 동기와 감정적 반응을 살피며 고조되는 긴장감을 맛본다. 이는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 소설 중 동명의 작품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자, 2017년에 개봉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속편인 <나일 강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고전적 매력과 현대적 감성 모두 잡은 <나일 강의 죽음>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실제로 <나일 강의 죽음>의 구성과 구조를 보면 이 작품이 원작의 묘미를 충실히 옮기기 위해 노력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부상을 입게 된 포와로의 사연을 보여준 후, 시선을 돌려 본작의 살인사건에 관계된 이들을 하나하나 선보인다.

본격적인 사건은 카르낙 호 살인 사건에 결부된 11명에 달하는 용의자들의 관계와 과거를 살핀 후에야 시작된다. 그러다 보니 1시간가량이 지날 때쯤에야 진짜 사건이 벌어지는 영화의 템포는 상당히 느리게 느껴진다. 사건의 결과물을 먼저 제시하고 신속하게 추리 과정으로 넘어가는 최근의 트렌드와는 정반대의 접근법이기 때문이다.

범인을 추적하는 에르큘 포와로의 모습 역시 일반적인 탐정의 이미지보다는 프로파일러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그는 배에 승선하고 있던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겠다는 듯이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수사 내지는 심문 과정 역시 적극적으로 증거물을 추적하거나 찾기보다는 살해된 레닛과의 관계, 주변인과의 관계 및 감정선을 파악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 결과 후반부 1시간 역시 앞선 분량과 유사한 특징을 갖는다. 물론 점점 과감해지는 살인범의 존재가 보다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인물의 관계가 명확해지기는 하나, 온도가 천천히 올라도 좀처럼 끓지 않는 물을 지켜보는 듯한 인상은 여전하다. 이는 상업 영화로서는 호불호가 명백히 갈릴 지점이다.

다만 그 덕분에 <나일 강의 죽음>은 케네스 브레너 감독이 의도한 고급스럽고 세련되며 또 클래식한 리메이크의 매력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한다. 극의 속도감을 희생함으로써 원작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카르낙 호 승객들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고, 그 결과 고전적 매력과 현대적 감성을 모두 잡는 것이 대표적이다.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귀족 출신 영국인이 쓴 소설답게 본래 <나일 강의 죽음>은 상류층 인물을 다수 등장시키고, 사교계를 주된 배경으로 삼는 등 영국적이고 귀족적인 면모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계급이 낮은 하녀, 물려받은 작위보다는 스스로 획득한 의사라는 직업을 더 중시하는 귀족 자제, 경제적으로 부유한데도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부인과 같은 인물상을 묘사하면서 상류층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 그에 따르는 의무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준다.

이에 더해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 1900년대 초중반을 살아가던 흑인과 유색인종을 향한 선입견과 편견 및 그들이 겪어야 할 아픔과 설움도 등장시킨다. 이는 다양성을 반영하기 위한 현대적 접근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비극적 사랑이라는 클래식한 테마에 초점을 맞춰서 치정에 의한 살인사건과 이를 풀어가는 사랑에 아픔이 있는 탐정이라는 교과서적인 구도를 안정적으로 펼쳐 보이기도 한다. 사랑의 힘이 이룰 수 없는 것은 없다는 명제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대비시키면서 효과적으로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이다.

영화는 소설에서 묘사된 적 없는 포와로의 사랑 이야기를 선보인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큰 부상을 입는데, 이때 약혼자인 캐서린으로부터 참혹한 상처도 끊을 수 없을 만큼 사랑의 힘은 강하다는 위로를 받는다. 이후 영화는 삼각관계를 비롯해 백인과 흑인 간의, 또 여성 간의 금지된 로맨스를 펼쳐 보인다. 이처럼 다양한 로맨스의 모습은 포와로로 하여금 사건을 해결하는 단초로서 오래전 연인의 위로를 떠올리게 한다. 그 결과 추리 소설을 영상화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작품은 마치 멜로드라마처럼 느껴진다. 

특급 배우들도 가리지 못한 '불협화음'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의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이에 더해 <나일 강의 죽음>은 이집트와 나일 강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를 비틀어 활용하며 비극적 사랑의 안타까움이라는 테마를 강조하고, 고전적 매력을 덧입힌다. 그 흔적은 리넷의 대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람선 출항 직전의 퍼포먼스처럼 그녀는 스스로를 유달리 클레오파트라에 자주 비유하며, 도일 부부는 자신들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빗대어 소개한다. 다만 그들처럼 나일 강 유람을 떠난 커플로는 정작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가 더 유명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 대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정식으로 결혼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는 달리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그저 연인관계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마치 영화 속 나일 강 유람에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즉 역사는 도일 부부와 재클린, 이 세 인물 가운데 진짜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 그리고 카이사르가 누구인지를 찾을 결정적 힌트가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영상미도 영화의 매력과 주제를 강조한다. 마치 이집트로 여행을 떠나온 듯한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사랑과 죽음이라는 테마를 시각적으로, 또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아부심벨 신전의 존재가 단적인 예시다. 작중 아부심벨 신전은 카르낙 호의 목적지이자 사랑으로 말미암은 비극이 시작되고 결말을 맞이하는 장소다.

흥미로운 것은 아부심벨 신전이 람세스 2세가 첫 번째 왕비인 네페르타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세운 신전으로 유명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관습을 거스르고 파라오인 자신과 같은 크기로 왕비의 조각을 세운 바 있다. 그러다 보니 심혈을 기울인 아부심벨 신전의 생생한 묘사는 사랑의 다양한 단면이라는 영화의 주제와 한몸이 되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는 나일 강의 낮과 밤, 노을과 동녘을 아름답게 비추는 연출 덕분에 더욱 돋보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방점을 찍는 것은 결국 배우들이다. 전작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페넬로페 크루즈, 조니 뎁, 윌렘 데포, 주디 덴치, 미셸 파이퍼, 데이지 리들리와 같은 화려한 출연진을 자랑하면서 흠잡을 데 없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과 비교해봐도 <나일 강의 죽음>의 캐스팅은 밀리지 않는다. 갤 가돗, 아미 해머, 엠마 맥키, 레티티아 라이트 등 제각기 유명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꿰찼던 배우들이 안정적인 합을 보여준다.

다만 배우들의 퍼포먼스도 원작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는 데 주력한 결과물에서 들려오는 묘한 불협화음까지 온전히 가리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나일 강의 죽음>은 전작처럼 다시 한번 무난한 타임 킬링 영화이자 착실한 영화적 재현이라는 평가와 지루하고 안이한 리메이크라는 상반된 평가 사이에 놓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와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나일 강의 죽음 애거사 크리스티 케네스 브래너 갤 가돗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top